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소이는 연신 입으로 미쳤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마르코폴로 공항으로 들어섰다.
밤새 시헌에게 시달리다 깜빡 잠이 들었던 소이가 잠에서 깨어난 건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소이는 시헌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객실을 빠져나와 곧장 짐을 챙겨 호텔을 벗어났다.
무슨 정신으로 공항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탑승 수속을 마친 후 공항 카페에 앉아 멍하게 정신을 놓은 채로 어젯밤의 일을 다시금 곱씹었다.
아무래도 지난 밤엔 정신이 제대로 나갔던 게 분명하다.
어떻게 감당하려고 차시헌 같은 남자를 도발했을까.
그가 올해 초, 차한 미디어 상무로 발령 나던 당시 이미 한차례 유명세를 치렀던 이유는 연예인 못지않은 수려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MBA를 졸업한 후 귀국하자마자 차한 라이프 그룹 경영기획팀 본부장으로 부임한 그는 2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실적을 쌓았다며 극찬받았었다.
차한 라이프에서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SEEK]을 동남아로 진출시켰을 뿐 아니라 차한 라이프 계열사인 차한 쇼핑몰과 홈쇼핑의 홈페이지를 대대적으로 리뉴얼하고 당일 배송 서비스를 도입해, 2021년도 총매출액과 신규 회원 수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는 둥 그의 이름만 검색해도 나오는 기사가 수두룩했다.
올해 초, 시헌이 차한 라이프의 뼈대 계열사인 차한 미디어 상무로 발령 나며, 드디어 차현섭 회장의 후계 구도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기사로 한바탕 떠들썩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랑 아무리 가짜라 할지라도 어떻게 한 달씩이나 연애하겠다고…….’
도대체 뭐에 홀렸던 걸까.
‘나랑 한 달만 연애해요. 가짜로.’
분명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가짜든, 진짜든. 어쨌거나 거절했어야 했는데.
‘좋아요.’
미쳤다고 좋다고 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던 게 분명해.’
소이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셨다.
“잊자! 어차피 한국 돌아가면 다신 못 만날 건데 뭐. 설마 나 따위를 찾겠다고 사람을 쓰진 않을 테고. 차시헌 정도면 한 달짜리 가짜 연애를 할 여자쯤이야 금방 찾아낼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커피를 마저 마시던 때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소이의 언니인 소은이었다.
“응, 언니. 나 이제 한국 가려고 공항…….”
- 그 기사 너 맞지?
소은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이의 말을 잘랐다.
“무슨 기사?”
- 어제 차시헌이랑 그리비티 팰릭스 호텔 스위트룸!
소이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졌다.
“어……,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 어떻게 알긴!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는데!
“기사?”
온몸이 얼어붙은 듯 멈춰버렸다. 미세하게 휘어진 눈썹 아래로 동그랗게 치켜뜬 두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 뭐야, 혹시 네 동의도 없이 기사가 나간 거야?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소은은 줄곧 소이의 보호자 역할을 대신해왔다. 시헌과의 기사가 터진 이후, 두 사람이 함께 바에 있던 사진까지 SNS에 떠돌기 시작했다.
흐릿하게나마 소이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떠돌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 조치도 없단 사실에 소은이 펄쩍 뛰었다.
- 차시헌한테 연락해서 당장 기사 내리라고 해!
소이의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시헌에게 연락하라니. 연락처를 알아도 연락해선 안 될 사람인데!
- 너 설마……, 원나잇 같은 건 아니지?
그 일은 내가 자초한 거니 진정하란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가짜든 진짜든 어쨌거나 그가 한 달짜리 연애를 제안했지만, 하룻밤의 일탈로 마무리 지으려던 건 나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 그게. 일단 나 지금 탑승 수속 하러 가야 하니까 이따 전화할게!”
탑승 수속이야 진작에 마쳤지만, 소이는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포털사이트를 확인하는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막말 논란의 차시헌 상무, 베네치아에서 여유로운 데이트 목격.]
자극적인 타이틀로 눈길을 끈 기사에는 어젯밤, 그의 객실로 함께 들어서는 자신의 뒷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
따뜻함이 넘치는 집이란 뜻의 당호(堂號)를 가진 성북동 저택 온연재.
5년 전, 세 아들에게 그룹을 골고루 나눠 물려주며 자리에서 물러난 차한 그룹의 명예 회장 차건혁, 차 회장의 저택이다.
시헌의 부친인 차현섭 회장은 시헌이 귀국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자마자 제 가족들에게 성북동, 차 회장의 저택으로 소집 통보를 내렸다.
이미 차한 그룹에서 분리된 차한 라이프 그룹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긴 했지만, 경영과 관련된 주요 안건에 대한 회의 결과는 차 회장과 함께 식사하며 보고하곤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미찜과 싱싱한 석화, 단호박을 썰어 넣은 소갈비찜이 한 상 가득 차려지고 조용한 식사가 이어지던 중 차 회장이 천천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던 차 회장의 시선이 현섭에게로 향했다.
“굳이 자리까지 물러나게 할 필요가 있더냐.”
시헌이 차한 미디어의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날 거란 말에 차 회장의 눈썹이 한껏 휘어들더니, 차 회장은 역시 식사 내내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었다.
“언론을 잠재우는 쪽으론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합니다.”
“무엇보다 잠시일지라도 H 텔레콤 고객센터 대표 자리를 시헌이에게 맡긴다면, 여러 방면으로 시헌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기다렸다는 듯 현섭과 유경이 차례로 대답하자 차 회장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시헌을 바라보았다.
“시헌이 네 생각도 그러하고?”
“차기 대표가 선출되기 전까지만 임시로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 H 텔레콤 고객센터에서 고객 정보가 유출된 사건으로 대표가 사임했음에도, 이미 신뢰를 잃은 고객들은 하나둘 H 텔레콤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고객 이탈률과 민원율이 점점 늘어나는 골칫덩어리 고객센터의 대표 자리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H 텔레콤 계열사도 아니고 자회사 대표라는 것도 모자라 남들이 다 기피하는 자리였으니 시헌에겐 그 자리가 좌천과도 다름없었다.
이제 막 차한 미디어 내에서 입지를 다져가며 영역을 확장하려던 차에 좌천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처사였다.
“그래, 기왕 가기로 결심했다면 시헌이 네가 가서 좀 도와주고 오너라.”
“그러려고요. 우선 개인 정보 유출 건으로 점점 늘어나는 고객 이탈률을 잡아볼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일단 뜻을 따르기로 했으니 시헌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제야 차 회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아이와는 어쩔 생각이더냐?”
이어진 차 회장의 말에 다이닝 룸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가뜩이나 요즘 차 회장은 갈 때가 다 된 것 같다며 막내 손주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오래전부터 대한 전자 회장의 손녀, 연리나와의 혼담이 오가긴 했지만, 차 회장은 누구라도 좋으니 시헌만 좋다고 하면 빨리 결혼시키라며 성화였다.
시헌의 기사를 접한 차 회장이 은근하게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더란 김 집사의 말에 유경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나 모른다.
그래봐야 결국 저를 자극하려고 내보낸 기사일 테니 큰 신경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 설마 결혼할 생각까진 아니겠지.
유경은 태연한 척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시헌에게 눈길을 던졌다.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중입니다. 관계가 더 깊어진다면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고요.”
“시헌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간 시헌의 대답에 현섭이 굵은 목소리로 시헌을 불렀다.
“제 결혼 소식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이어진 시헌의 말에 유경의 눈가가 기어코 매섭게 구겨졌다.
H 텔레콤 고객센터 대표로 발령 낼 거란 소리에 시헌이 반발했을 때, 유경이 대신 내건 조건이 결혼이었다.
대한 전자 회장의 손녀, 연리나와 결혼 후 기반을 다진다면 어떻게든 언론과 해고된 직원들의 원성을 해결해 주겠다고.
시헌은 몇 년 동안 연리나와의 선 자리를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해왔다.
대한 전자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곧 연리나의 부친이 그 자리를 승계할 테니 유경은 연리나와 혼사를 어떻게든 성사하고 싶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결국 시헌은 차라리 잠시 쉬고 오겠다며 상무 자릴 내놓았다.
그리고 떠난 베네치아에서 떡하니 스캔들을 만들어 왔으니 유경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기사는 내리는 게 어떻겠니?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내버려 두거라, 애미야. 시헌이도 다 뜻이 있지 않겠느냐.”
차 회장이 느른한 목소리로 유경의 말을 잘랐다. 테이블 아래로 둔 유경의 두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그래도 기사는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 벌써 몇 년째 대한 전자 회장님 손녀와의 맞선을 이래저래 피해왔는데 열애설이라니요.”
보다 못한 시연이 답답하다는 듯 거들었다.
“이쯤 되면 그들도 알겠지. 내가 그쪽 손녀와 인연이 아니라는 걸.”
바쁘다는 말은 핑계일 뿐, 매년 단호하게 연리나와의 혼사를 거부했다.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연리나 쪽까지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시헌이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