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직원이었어?
여기 직원이었어?
“그래그래, 우리 시헌이가 어디 이런 일로 기사를 내 본 적이 있었더냐. 연 회장이야 만나서 밥 한 끼 하면 될 일이고. 시헌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거라.”
어차피 차 회장은 꼭 연리나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하루빨리 손주며느리를 보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 그가 끔찍이도 아꼈던 막내 손주가 안겨줄 증손주까지만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할아버지! 그래도…….”
“시연아, 그만하거라.”
시연의 옆에 앉은 현섭이 묵직한 목소리로 시연을 다그쳤다.
강 회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의자 양옆 손잡이를 짚자 옆에 서 있던 김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서 그를 부축했다.
“자리는 너무 오래 비우지 않게 하거라. 곧 인피니티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입찰 준비도 해야 하지 않느냐.”
김 집사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뜨는 차 회장을 향해 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차시헌,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차 회장이 다이닝 룸을 벗어나자 시연이 기다렸다는 듯 뾰족하게 물었다.
“내가 고객센터 대표로 가는 거? 아님, 연애하는 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결혼 생각 없다, 누굴 만날 시간이 없다. 이런저런 핑계로 연리나와 선보는 건 마다해놓고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연리나랑은.”
“너 진짜……!”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내일 첫 출근이라 일찍 나가보려면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씩씩거리는 시연과 한숨을 내쉬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시헌이 여유롭게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
“형! 출근이 9시인데 도대체 왜 6시에 데리러 오라는 건데요!”
다음 날 아침, 시헌을 데리러 온 장우가 투덜거렸다.
“어쨌거나 기본적인 업무 파악은 해야 할 것 아냐. 당분간이겠지만 그래도 대표로 있을 건데.”
“그걸 업무 시간에 하시지 왜 굳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장우가 투덜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시끄럽고, 최근 5년 치 고객만족도 평가 자료는?”
“메일로 보냈어요.”
“AI 상담사 도입 후 콜 인입량 평가 자료는?”
“그것도 메일로 보냈어요. 아, 그리고 형 옆자리에 보시면 고객센터 직원 조직도 파일 있을 거예요.”
시헌은 이미 직원 조직도 파일을 집어 들어 한 장씩 넘기는 중이었다.
어제 분명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라운지에서 한잔하고 잘 거라고 했는데 왜 저렇게 쌩쌩한 건지.
장우는 연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의 평소 루틴대로라면 아마 운동까지 마치고 나왔을 텐데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반듯한 자세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또렷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단정하게 차려입은 깔끔한 슈트까지.
역시 차시헌은 차시헌이구나, 라는 생각이 장우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니 어린 나이인데도 고객센터의 대표로 앉히겠단 이사님의 안건에 다들 반대 하나 없이 동의했던 거겠지.
장우는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임시 기간일지라도 앞으로 함께 일할 H 텔레콤 고객센터의 부서별 파트장과 팀장, 그리고 팀원들의 얼굴을 익히기 위해 조직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고객들과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직접 접촉하며 응대하는 고객 상담 파트와, 상담원들의 업무를 지원하고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업무 지원 파트.
그리고 고객센터의 경영, 기획을 담당하는 경영 기획 파트.
그중 시헌이 근무할 고객센터 본사에는 업무 지원 파트와 경영 기획 파트의 직원들이 함께 근무한다고 했다.
직접 고객을 응대하는 고객 상담 파트는 도급 업체 직원들을 고용해서 따로 지역별 센터를 운영한다고.
앞으로 함께 일해야 할 직원 목록을 훑어보던 중 시헌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업무 지원 파트, 보상 지원팀, 진소이 대리……?”
베네치아에서 사라졌던 그 여자였다.
일단 기사는 내리지 못하도록 조처했지만, 사라진 여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저절로 제 눈앞에 나타나 줬다.
“이십 대 초반인 줄 알았더니 스물일곱이라.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었네.”
작고 아담한 체구에 동그란 눈. 귀엽게 입술을 다물던 모습이 꼭 이십 대 초반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보였는데 스물일곱이라니.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 흘렀다.
재밌네. 여기 직원이었어?
“왜요? 뭐 잘못됐어요?”
장우가 룸미러로 힐끗거리며 시헌을 바라보았다.
“아니, 반가운 얼굴이 보여서.”
시헌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솟았다.
회의실에서 나를 보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이려나.
자꾸만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회사로 향했다.
***
- 오랜만에 출근하는 기분이 어때?
이른 아침 출근길 도훈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소이는 버스에서 내렸다.
시헌과의 기사를 확인한 후 여기저기에서 몰려드는 연락을 여태 다 피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동창이자 오랜 친구인 도훈은 끈질기게 월요일 아침까지 전화를 걸어댔다.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 아니잖아.”
- 기사……, 너 맞아?
역시, 그날 일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 아니지? 너 낯선 남자랑 함부로 원나잇 같은 거 할 성격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일단 기사부터 내려줘야 반박이라도 할 텐데 무슨 생각인지 시헌 쪽은 기사를 내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백도훈. 네가 보기엔 어때?”
- 뭐가?
“딱 봐도 나로 보여?”
- 뭐? 너 그럼……!
“어, 나 맞아.”
낮은 한숨과 함께 소이가 답했다.
- 진소이!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도 모르겠다.”
- 앞으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짓을 해!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늘 소이를 극진히 챙기던 도훈은 이번에도 마치 친오빠라도 되는 양 펄쩍 뛰며 소이를 걱정했다.
- 일단 기사부터 내리라고 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연락처를 몰라. 사실, 알아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라.”
- 아니, 차시헌은 그럼 무슨 생각으로 여태 기사를 안 내린 건데!
나도 그게 궁금해. 도대체 어쩔 생각인 건지.
- 진소이! 너 퇴근 6시지? 이따 잠깐 보자.
“아냐, 오늘은 피곤해. 다음에 이야기하자.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알아서 할게.”
잔소리가 더 심해지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큰일이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냐느니, 겁도 없이 낯선 남자를 따라갔다느니, 한참을 더 떠들어댈 게 뻔했다.
띠리릭거리는 횡단보도 알림음과 함께 도로를 건너 회사 정문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울한 아침이다.
7박 9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출근하는 기분도 별로지만, 무엇보다 시헌과 함께 호텔에 들어서던 사진이 실렸던 기사는 생각하면 할수록 미칠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한 달 동안 가짜 연애를 하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저와의 스캔들에 아무런 대처도 없이 묵묵부답인 상태다.
기사를 내려달라고 연락을 취하자니, 그가 내걸었던 조건이 걸린다.
“그냥 그 기사에 찍힌 여자, 내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버릴까…….”
그러자니 하필 나는 그때 베네치아에 있었지. 몇몇 친구들에겐 그리비티 팰릭스 호텔에 묵을 거란 말도 했었고.
“어떻게든 되겠지…….”
소이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
“소이 씨! 기사, 소이 씨 맞아?”
“진 대리님! 진짜예요!?”
예상은 했지만,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진 대리! 기사에 난 여자, 자기 아니지?”
애매한 표정으로 질문을 때우며 자리에 앉으려던 때 곽 팀장이 다가서며 물었다.
“오늘 우리 회사에 임시 대표님 발령 난 건 알아?”
그리고 뜬금없이 임시 대표 이야기를 꺼냈다.
“아, 아뇨. 대표님 새로 오시나요?”
“어머. 몰라? 새 대표 선출되기 전까지 임시로 오기로 해서 지금 전체 회의실 가야 하는데. 몰라?”
자꾸만 뭘 모르냐는 건지, 팀원들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팀장님! 임시 대표님 오시는 거랑 진 대리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팀원 중 누군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니, 난 또. 기사에 난 여자가 진 대리가 맞다면 당연히 알 줄 알았지. 오늘 누가 임시 대표님으로 오시는지.”
곽 팀장은 묘한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자, 얼른 회의실로 가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곽 팀장이 사무실을 나섰다.
소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팀원들과 함께 전체 회의실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시헌의 강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회의실 내 있던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소이에게 쏠렸다.
‘그래서 곽 팀장님이 그런 질문을…….’
미리 언질이라도 줬다면 무슨 핑계라도 대고 회의실에 오지 않았을 텐데.
이미 시헌과 눈이 마주쳐버린 소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어가고 있었다.
“오늘부터 H 텔레콤 고객센터의 대표로 여러분과 함께하게 될 차시헌입니다.”
끔뻑끔뻑,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는 소이를 보며 시헌이 밝게 웃었다.
소이와 시헌을 번갈아 바라보느라 분주한 시선들이 회의실 가득 요란하게 쏟아졌다.
소란스러워진 회의장을 진정시킨 시헌은 우선 짧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시헌은 앞으로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며 나아갈 방향과 지향하는 목표 등을 설명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헌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소이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회의실 내의 직원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시헌과 소이를 번갈아 훑었다.
“진소이 씨는 잠시 대표실에 들렀다 가주세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이를 호출한 시헌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부러움이 섞인 환호도 곳곳에서 흘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이가 후다닥 몸을 돌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곽 팀장만이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짓씹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