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민족 (2)
저주받은 민족 (2)
다음날 오후.아침부터 시작된 어전회의를 끝마친 이후, 나는 따로 시간을 내어 별궁의 빈방을 찾았다.지난 밤, 폐하가 나에게 건네주었던 신비한 열쇠.왕가에 전해져 내려온다는 특별한 열쇠의 실체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었지.”폐하는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문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있을거라고 이야기했다.어쩌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후우-.열쇠를 움켜쥔 손에 긴장감이 서렸다.“기왕 나올거라면… 제발 정상적인걸로 나와줘라.”오랫동안 왕족들에게만 전해져내려온 물건이다.혹시나 수많은 보물들로 가득차있는 보물고가 나타나지는 않을까.그런 기대감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그렇게 나는 열쇠를 사용했고-.철컥.머지않아,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끼이익-.열리기 시작한 방문 너머로, 색다른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왕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특별한 풍경이, 문 너머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이건…….”내가 마주한건, 별이 빛나고 있는 하늘이었다.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아직 태양이 저물지 않은 왕국에서는 보여선 안되는 풍경이 존재하고 있었다.“설마, 밤하늘을 재현해놓은건가.”하늘을 뒤덮고 있는 돔형태의 유리벽.그 위를 덧칠하듯이, 빼곡하게 하늘을 가득채우고 있는 별들의 모습이 보였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낮과 밤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풍경.그리고 그 아래에서, 복잡한 기계장치를 끼워맞춘 천구의가 분주하게 회전하는 중이었다.드르르륵-.거대한 천구의가 회전할 때마다, 유리벽의 너머에 있는 밤하늘이 그 모습을 바꾸었다.“…….”천장을 뒤덮고 있는 기묘한 밤하늘.그리고, 행성의 움직임을 재현하고 있는 천구의.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인지조차 의심가는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지는 풍경 아래에서, 별빛을 담아낸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저주받은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찾아온건 오랜만이네요.”하늘을 녹여낸 듯한 푸른빛의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흩날렸다.—마녀(魔女).그런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른 채, 하늘을 부유하는 마녀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당신도 불쌍한 백성들을 당신의 손으로 구원하길 바라고 있나요?”천구의 앞에서 부유하고 있던 마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저주받은 민족.그리고, 구원해야 하는 백성들.무척이나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앞에 두고서, 나는 초대면의 마녀를 향해 조금 더 중요한 질문을 꺼내야만 했다.“여기가 대체 어디지?”그러니까, 내가 찾아온 이 장소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이야기였다.그런 내 질문에, 하늘을 날아다니던 마녀가 자연스럽게 고도를 낮추며 내려왔다.“마경의 최심부에 위치한 기록보관소. 오직 자격을 갖춘 왕에게만 허락되는 장소죠.”“……기록보관소?”“이곳은 마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공간이거든요.”마녀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무심한 얼굴로 하늘을 날아다니던 책을 붙잡았다.“그리고 저는… 이곳의 모든 기록물을 관리하고,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마경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기록하는 기록보관소.그리고, 이곳을 관리하는 마녀.자신과 기록보관소에 대해 소개하던 마녀는, 그 뒤에 간단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물론, 제가 번역한 기록물에는 사견이 조금 들어가기는 하지만요.”대체 번역에 왜 본인 사견을 집어넣는단 말인가.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지만, 나는 구태여 입밖으로 그것을 내뱉지는 않았다.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를 마주한 시점에서, 그런걸 따지는건 의미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그러니까, 왕가에 내려오던 열쇠는 기록보관소에 출입하기 위한 물건이라는 뜻인가.’아무래도 이곳 역시 마경에 존재하는 이상현상의 일부인 모양이었다.어쩌면, 눈앞의 마녀 역시 재상 블레인과 비슷한 부류일지도 몰랐다.크흠, 흠-.나는 헛기침을 하며 긴장하고 있던 몸을 진정시켰다.그리고는, 이번에는 두번째로 중요한 이야기를 마녀에게 물어보았다.“그래서, 처음에 한 질문은 대체 무슨 의미야?”내가 이곳에 들어오고서 처음으로 마녀에게 들었던 질문.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저주받은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찾아온건 오랜만이네요.”저주받은 이들.누가 보더라도 메르티인들을 가리키는 말과 함께, 나에게 백성들을 구원하고 싶냐고 물어왔던 것이다.내가 비록 그들이 사탄의 혈육이 아닌가 의심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주받은 민족이라고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그런 내 의문을 풀어줄 생각이었을까.어느새인가 바닥에 착지한 마녀는,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저주받은 이들이 왕국에 있다는건, 당신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지 않나요?”“…….”“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대단한 재상에 대한 기록… 이를테면, 여기 있는 기록물이 그 증거겠네요.”툭-.마녀는 하늘을 날아다니던 서적들 중 하나를 붙잡아 내밀어왔다.나는 마녀가 내민 기록물의 표지에 적혀있는 글자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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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재상 블레인.재상 역사상 최고, GOAT.명재상 블레인 공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있었다.나는 그 모습에 홀린듯이 블레인의 이름이 적힌 기록물을 받았다.“…….”펄럭, 펄럭-.내가 블레인의 이름이 적혀있는 기록물을 넘기는 가운데.마녀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역사강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메르티인들의 나라, 바르티아는 수백년 전에 마왕을 봉인하고서 마경에 세워진 국가죠.”“…….”“다만, 용맹하던 메르티인들은 선조가 저지른 행동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어요.”오래전에 있었던 일들이 무용담이 되어 흘러나왔다.위대한 바르티아 왕국의 시조는 무려 마왕을 봉인하고서 나라를 건국하는데 성공한 것이다.다만, 영웅담을 닮은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마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던거죠. 마경의 의지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거든요.”“마경의 의지?”“당신들은 모두 저주받았어요. 당신들의 이름도, 당신들의 운명도, 당신들의 영토조차도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죠.”그녀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메르티인들은 하나같이 저주받은 모양이었으니까 말이다.“누군가는 마경에 동화되어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로 전락할테고, 또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묶여 같은 자리를 떠돌겠죠.”그 누구도 마경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그렇기에, 저주받은 민족.성황청을 포함해 주신교의 모든 국가들이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충격적인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그와 동시에, 내가 지난밤에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세상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바르티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그것이 마왕을 봉인한 메르티인들에게 내려진 마경의 저주.”마녀의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씨익-.차가운 미소가 마녀의 입가에 드리워졌다.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당신도 당신의 선조와 마찬가지로, 오랜 저주로부터 백성들을 해방시키길 바라고 있나요?”“…….”“그건 분명 어려운 일이 될테지만, 제 조언에 따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마녀의 제안을 들은 직후.나는 마녀를 향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굳이 해방을 시켜야할까?”“네?”깜빡, 깜빡.눈동자를 깜빡이던 마녀의 시선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리고는 이내, 그녀가 나를 향해 다시금 물어보았다.“제 이야기 이해한거 맞죠?”“이해했지.”“그럼 당신도 마경의 저주를 풀고 싶어지는게…….”“내가 왜?”스윽-.마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보험 가입 권유를 눈앞에서 거절당한 보험설계사 같은 얼굴이었다.“부, 불쌍하지도 않나요?”당황한 마녀가 다시금 나에게 물어보았다.그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불쌍하지.”“그렇다면 저들을 구하고 싶어지는게 정상 아닌가요?”나는 마녀의 이야기를 듣고서 가슴이 먹먹해지는걸 느꼈다.그래. 불쌍했다.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다.“당연히 불쌍하지. 어떻게 안불쌍하겠어.”“그럼 제 조언을 따라서…….”“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미칠거같다.”저것들을 데리고 나라를 경영해야하는 내가 불쌍해서 정말이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이딴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게 이상현상이다.’그런 마당에 뭐, 저주를 풀어줘?그것도 이름이랑 얼굴이 똑같은 도플갱어 수백명이랑, 1년치 예산으로 도박하는 재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그럴바에야 차라리 저것들이 자진해서 성불할때까지 부려먹는게 나을 터였다.“…….”그런 내 진심이 마녀에게도 전달된 것일까.마녀는 성적표를 마주한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러니까, 경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굴리려면 괴이들이라도 써먹어야지.”“…….”“한스 복사해서 군대같은거 못만드나? 십만 한스 양병설 같은거 시도해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마녀에게 넘겨받은 기록물을 펼쳐보았다.촤라라라락-.페이지가 넘어가며 유려한 글씨가 떠오르는 가운데.나는 마녀가 기록했다는 블레인에 대한 정보들을 하나씩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재상 블레인. 그는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이라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대륙의 어느 재상도 해내지 못한 업적들을 이뤄냈으며, 왕국의 부족한 식량과 재정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충당하고 있다.- 허나 정말로 놀라운 점은, 그 누구도 그를 왕국의 재상으로 임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저 기괴한 무언가는 재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양이라, 국왕을 포함한 귀족들은 모두 그를 명재상이라고 부르며 칭송하고 있다.블레인에 대한 내용들이 빠르게 시야를 스쳐지나갔다.그 직후, 나는 자신에게 이 책을 건네준 마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마녀는 여전히 성적표를 확인한 어머니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짧은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 맴돌았다.어색한 침묵의 뒤에,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마녀에게 물어보았다.“여기에 적혀있는 내용들 전부 사실이야?”“네, 사실이에요.”“…….”블레인, 이 미친놈아.너 애초에 재상조차 아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