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애 아빠 된 거 축하해
1. 애 아빠 된 거 축하해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였다. 순백색의 드레스는 흰 피부를 더욱 환하게 만들었고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과 헤어는 청초한 외모와 어우러져 상대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신부 대기실, 널찍한 소파에 앉은 여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사진 기사가 본분을 잊고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런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대체 어떤 남자일까. 막연히 생각하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신부님, 신랑님 아직이실까요?”
사진을 위해 억지로 미소 짓던 다은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아, 다시 전화해 볼게요.”
다은은 드레스 밑에 둔 핸드폰을 꺼냈다. 밝고 해사했던 그녀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완벽해야 할 결혼식, 몇 번이나 확인하고 점검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메이크업까지 함께 받았던 예비 남편인 영훈이 두고 온 게 있다며 급히 회사로 가서는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화를 세 번째 걸었을 때 영훈이 전화를 받았다.
“영훈 씨, 어디야?”
—헉, 허억, 거의 다 왔어! 그, 금방 갈게.
뛰는 중인지 영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다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불편한 다리로 홀로 손님을 맞을 모친이 신경 쓰였고, 철부지 동생이 축의금 받는 일을 잘 해낼지 걱정되었다. 무엇보다 부케를 주기로 한 주리에게 연락이 없었다.
뭔가 안 좋은 일 생길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차 안은 뜨겁고 습한 공기로 가득했다.
두 남녀는 한데 엉켜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그들은 욕정을 채우기 급급했다.
누군가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짜릿함이 흥분을 고조시켰다. 숨 가쁘던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영훈 씨, 얼른 옷 입어. 결혼식 늦겠다.”
“좋았어?”
“나야 항상 좋지, 자기랑 하는 거.”
교태 어린 주리의 말에 영훈은 만족한 듯 더운 숨을 길게 내뿜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
“우리 다은이 불쌍해서 어쩌지? 결혼식 날까지 예비 남편이랑 제 친구가 붙어먹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텐데.”
오늘은 영훈의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신부는 주리의 친구인 다은이었다. 주리는 축축한 영훈의 등을 팔 벌려 끌어안았다.
“절대로 알면 안 되지.”
무심코 중얼거리던 영훈이 슬쩍 주리의 눈치를 살폈다. 한순간 표정을 굳혔던 그녀가 생긋 웃고는 제 몸에서 그를 떼어 냈다.
“정말 늦겠어.”
어쩔 수 없다는 듯 옷을 챙겨 입은 뒤, 차 문을 연 영훈이 주리의 이마에 키스했다.
“일단 갈게.”
“식장까지 데려다줄까?”
“아니, 택시 타고 갈게. 제주도에서 보자.”
“응.”
주리 역시 흰색 원피스를 정돈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잘 빗어 틀어 올렸다.
신혼여행지인 제주도에서 보자는 말은 기어코 결혼을 진행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내가 나서야겠군.
차라리 잘됐다. 결혼식, 가장 행복한 순간 그 행복을 산산조각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내 친구를 위해서 사실을 얘기하는 게 좋겠어. 미안, 영훈 씨.]
주리는 영훈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뒷좌석에 고이 놔둔 부케를 집어 들었다.
지고지순하고 가련한, 오늘의 주인공인 다은을 위해 직접 준비한 부케였다.
***
다은은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다른 지인들은 이미 사진을 찍고 대기실을 나갔는데 제일 친한 친구와 예비 남편은 아직이었다.
그때 또각또각 유난히 큰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고 다은은 곧 상념에서 벗어났다. 학창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인 주리였다. 화려하고 세련된 외모의 주리가 들어오자 신부 대기실이 더욱 환해지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와 도우미가 입을 벌린 채 경악했다.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에 꽃다발까지 든 주리는 다은보다 더 신부처럼 보였다.
“늦어서 미안. 여기.”
부케를 직접 만들어 주겠다던 주리는 뒤늦게 나타나 다은의 손에 부케를 안겨 주었다. 사진을 위해 조화를 들고 있던 다은이 부케를 받고는 주리를 올려다보았다.
의도한 것처럼 흰색 옷을 입은 주리 때문에 쉽게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눈치가 없어 가끔 다은을 곤란하게 하곤 했지만 오늘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오래 준비했지?”
뜬금없는 주리의 말에 다은이 고개를 갸웃댔다.
“뭘?”
“결혼 말이야.”
“……뭐, 그렇지.”
영훈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것부터 해서 상견례, 예식장, 스튜디오, 가전 가구들을 준비하느라 진땀을 뺐다. 영훈은 아무 장식도 없는 밋밋한 반지 하나만을 주었을 뿐, 결혼 준비는 다은이 도맡았다.
“나도 오래 준비했어.”
주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주리와 다은은 아주 오랜 인연이었다. 다은은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구김 없이 예쁘기만 한 얼굴과 상냥한 태도로 다정한 웃음을 짓는 애였다. 오늘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혼자 착한 사람인 듯 무구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주리야, 너 무슨 일 있어?”
미심쩍은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다은을 향해 주리는 생긋 웃어 보였다. 다은이 늘 그랬듯이.
“나 아이 가졌어.”
주리의 말에 당황하여 눈만 깜빡거리던 다은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전에 만난다던? 그 남자도 알아?”
“응, 알아. 결혼하려고.”
“그거 다행…….”
“너만 없으면 될 것 같아.”
“뭐?”
“너만 사라지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주리가 가방에서 초음파 사진을 건넸다. 다은은 멍하니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내 아이야, 영훈 씨와 내 애.”
영훈이라는 이름이 주리의 입에서 나오자 다은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양주리. 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제대로 얘기해.”
다은이 주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점차 충혈되기 시작했고 입가는 바르르 경련했다. 난생처음 보는 다은의 분노한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주리는 풋, 하고 웃은 뒤 입을 열었다.
“네 예비 남편, 나랑 놀아났어.”
다은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리는 친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에는 영훈과 주리가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나란히 볼을 대고 웃고 있었다.
화면을 옆으로 넘기자 영상이 나왔다. 어딜 만지느냐며 까르르 웃는 주리를 영훈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키스를 퍼부었다. 침대 위로 쓰러지는 두 사람을 보던 다은이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다은의 드레스 정리를 돕던 도우미가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 놀리는 거지? 그럴 리 없잖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주리는 다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그리고 같은 회사에 다니며 속 얘기를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가끔 눈치 없게 행동할 때도 있지만 심성은 착하다고 믿어 왔다. 기쁜 일이 있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제 일처럼 화를 내 주던 친구였다.
영훈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태 다른 사람이 생겼다며 다은을 매몰차게 버렸던 전 남자친구들과 달리 그는 다은만을 바라보았고, 아껴 주었다.
그런데 그 둘이 다은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웠다니, 다은으로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봐.”
주리는 필사적으로 외면하려는 다은의 눈앞에 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키스를 나누며 한데 엉켜 헐떡거리는 두 사람은 주리와 영훈이 맞았다.
다은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2주년 기념일에 영훈 씨, 갑자기 출장 갔었지? 그때 나랑 부산 여행 가서 찍은 영상이야, 이게.”
다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날 주리는 혼자 있는 자신에게 전화해 2주년 잘 보내고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때 처음으로 주리에게 거짓말을 했다. 주리가 걱정할까 봐, 영훈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이건 우리 100일 때 찍었던 웨딩 사진이고.”
다은은 기가 찼다. 영훈은 다은과 웨딩 사진을 찍었던 스튜디오에서 주리와 웨딩 사진을 찍은 것이다.
다은은 웨딩 촬영이 있던 날을 떠올렸다. 영훈은 일 때문에 피곤하다고 비협조적으로 굴며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미소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리 옆에서는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너희 진짜…….”
그때 신부 대기실 안으로 영훈이 들어왔다. 그는 다급해 보였다.
“다은아!”
다은은 입을 꾹 닫은 채 영훈을 노려보았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그녀의 얼굴을 본 영훈은 당황한 듯 입을 뻐끔거렸다.
“저, 다은아. 그, 그게…….”
영훈은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주리의 눈치를 살폈다. 주리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도 할까, 걱정인 듯했다. 그런 영훈의 모습을 보며 다은은 확신했다. 주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주리는 그 정도로는 부족한지 키를 낮춰 다은에게 귓속말했다.
“창범 선배도, 선호도 다 내가 그랬어.”
창범 선배, 선호.
속으로 곱씹던 다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 두 사람은 다은의 전 남자친구였다. 창범과 선호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며 일방적으로 다은에게 이별을 통보했었다.
앙다문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꼬셨는지 알아?”
“그만해, 양주리.”
“잤어.”
고작 한 번 잤을 뿐인데 그들이 넘어왔다며 주리가 깔깔 웃어 댔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영훈 씨가 이미 잡아 놓은 결혼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더라고. 너와의 우정을 생각해서 내가 결혼식 전에 말해 주는 거야.”
주리는 그렇게 말한 뒤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러니까 왜…….”
“왜 하필 오늘 알려 주냐고?”
주리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창백하게 질린 다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 친구라면서…….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면서!”
“맞아. 네가 행복해지길 바랐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알려 주고 싶었거든. 그래야 더 불행해지니까.”
주리는 행복한 듯 웃었다. 그 모습이 기괴해 소름 끼칠 정도였다. 일순 표정을 굳힌 주리가 작게 속삭였다.
“말했잖아, 오래 준비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