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네가 감히
2. 네가 감히
주리는 그 말을 끝으로 신부 대기실을 나섰다. 약속이라도 한 듯 영훈이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다은은 그런 영훈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무 기가 막혀 화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시댁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파혼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제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영훈 씨, 애 아빠 됐다면서.”
차가운 어조에 영훈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다은아, 실수였어, 정말 딱 한 번뿐이었어. 피임도 확실하게 했단 말이야!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라, 제발…….”
그때 신랑을 찾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은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웨딩 로드로 이어진 신부 대기실 뒤 자동문 앞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움찔했다.
다은은 부케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식장 문을 열었다. 이미 하객들로 만석이 된 식장을 보며 떫은 숨을 내쉬었다.
신랑 입장 후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어야 할 웨딩 로드로 신부가 먼저 걸음을 내딛자 하객들이 놀란 눈으로 보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 결혼을 깨기 위한 핑계를 말이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신부는 부케 대신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없는 집안에 장가보내기엔 제 아들이 너무 아깝다며 다은을 쥐 잡듯 잡았던 시어머니를 보자 확신에 확신이 더해졌다. 다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남편 측 사정으로 결혼식 진행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걸음 해 주신 하객분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축의금은 꼭 접수대에서 다시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사회를 맡은 대학교 선배이자 회사 동기인 준원이 입을 떡 벌렸다. 다은은 떨리는 호흡을 다 뱉어 냈다. 하객들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다은을 잡은 건 신랑이 아닌 사회자 준원이었다.
“송다은 무슨 일이야?”
“저 X끼, 애 있대.”
다은은 어느새 따라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영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개X……!”
준원이 다은을 대신하여 영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영훈의 모친 향미가 꺅, 소리를 지르고는 준원을 밀쳤다. 향미는 만만한 다은을 잡고 늘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다은이 너, 이렇게 가면 우리 집안이랑 영영 끝이야!”
잘 손질된 향미의 머리 위로 그녀가 저질렀던 악행이 한둘씩 떠올랐다.
“무슨 집안이요? 1년에 제사만 다섯 번 지내는 집안이요? 김장철이랍시고 결혼도 안 한 예비 며느리한테 김치 백 포기씩 담그게 하는 그 대단한 집안이요?”
뺨을 때리려다 다은이 휙, 하고 피하자 향미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불편한 기색만 보여도 바들바들 떨며 눈치 보던 송다은은 이제 없다.
이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데, 눈치를 볼 이유가 뭐가 있을까.
“송다은,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날 망신 줘야 직성이 풀리겠어?”
아, 아직 망신을 안 줬구나.
“애 아빠 된 거 축하해. 그러니 결혼은 애 엄마하고 하는 게 좋겠어.”
다은은 마이크에 대고 또박또박 말하고는 남편이 될 수도 있었던, 이제는 전 남자친구인 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또각또각, 웨딩 로드를 벗어나는 그녀의 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
아수라장이 된 결혼식장, 중앙에 앉아 거침없이 웨딩홀을 빠져나가는 다은을 지켜보던 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상상 이상의 볼거리를 제공해 준 그녀에게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역시 재밌어, 송다은.”
남자의 이름은 차유권, 결혼식을 스스로 망친 예비 신부 다은의 상사였다.
“저 결혼해요.”
오랜만에 잠을 푹 자고 상쾌한 마음으로 출근했던 날이었다. 다은이 청첩장을 제게 내밀지만 않았어도 꽤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을 터였다.
“참석 안 하셔도 됩니다. 축의금도 사양하겠습니다.”
다은은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단정한 옷차림과 그보다 더 단정한 자세로.
그와는 그저 모시는 상사와 비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 말끔한 얼굴이었다.
그날 유권의 눈에는 다은의 모든 것이 그저 괘씸했다.
평소보다 더 청초한 얼굴도, 복숭앗빛으로 물든 두 뺨도, 머금고 싶은 촉촉한 입술도.
“결혼을 한다고, 네가?”
신부 송다은.
유권은 한참 동안 청첩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첩장 속 나란히 찍힌 고영훈은 영업팀 직원이었다. 어떤 놈인지 조금 파 보니 가관이었다.
그래서 유권은 다은의 바람과 달리 가벼운 걸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했다.
다은은 그로 인해 쓰레기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제 손을 거칠 기회까지 빼앗길 줄 몰랐지만 오히려 유쾌했다.
“안 가실 겁니까?”
비서인 다은을 대신해 동행한 유권의 운전기사 정우가 물었다.
“식사하고 가지.”
“……여기서요?”
유권을 가만히 응시하던 정우는 손을 들어 직원을 호출했다. 반 이상 빠진 하객들 때문에 우왕좌왕했던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운 채 다가왔다.
정우는 직원에게 음식을 부탁한 뒤 유권에게 물었다.
“축의금은 어떻게 할까요?”
“전달해.”
“전부요?”
“전부.”
식이 진행되는 동안 코스로 나왔어야 할 음식이 한꺼번에 차려졌다. 유권은 느긋한 동작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정우는 유권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우가 알기로 그는 식사를 즐기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맛있다는 듯 식사를 이어 갔다. 매우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
잠에서 깬 다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며칠을 꼼짝없이 앓았다.
제게 일어났던 비극이 모두 꿈이었기를. 모든 게 그저 악몽이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잔인한 현실은 어제와 다를 바 없고,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해지기는커녕 더욱더 선명해졌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통쾌한 결말 같은 건 없었다. 한바탕 지르고 집으로 돌아온 다은은 결국 혼절하고야 말았다.
여태 경험한 적 없는 고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밤중에는 다현에게 업혀 응급실에 다녀왔다.
유일한 낙이 먹는 것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은 챙겼었는데, 이번 일에 처음으로 식사를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아무런 표정 없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문득 모친 금숙이 친척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결혼식이 깨졌는지 설명하던 금숙이 속상한 듯 가슴을 퍽퍽 때렸다. 다은은 살짝 열려 있던 문을 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나쁜 건 그 두 사람이다, 되뇌고 또 되뇌었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비참한 마음만 더해질 뿐.
세상 사람들이 다 저를 손가락질할 것만 같았다.
다은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악에 받쳐 소리 지르고 우는 것밖에 없었다.
반년 동안 준비한 결혼이 깨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결혼식 전에 알아서 천운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아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다른 여자도 아닌 주리여야 했을까. 그리고 주리는 왜 다른 남자가 아닌 영훈이어야 했을까. 왜 나여야만 했을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재미없고 부끄럼이 많은 다은과는 달리 주리는 활발하고 재치가 넘쳤다. 그래서 종종 영훈과 다은의 데이트에도 함께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주었다.
주리는 늘 영훈에게 제 친구를 울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런 주리가 영훈의 애를 가졌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전 남친들마저 유혹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전 남자친구와 만날 때도 주리와 셋이서 보고는 했다. 비슷한 수법이었겠구나.
다은의 바싹 마른 입술 틈으로 비소가 새어 나왔다.
하객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미처 받아 가지 못한 축의금은 계좌이체로 전달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 그간의 흔적을 다 지우고,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짧은 순간, 수없이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지쳐 갔다.
계속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 더욱 우울해지는 것 같아 신혼여행을 위해 낸 남은 연차를 모두 반납했다.
당장 내일 출근하면 지독한 워커홀릭인 상사 덕에 숨 고를 틈 없이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다은의 상사 차유권 상무는 신혼여행 휴가를 쓰는 것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 결혼 꼭 해야 하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차라리 미친 척하고 상사의 말을 들어야 했나. 다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일주일 이상 낭비했다.
후회는 짧게 하고 현실을 살아야 했다.
“다은아, 너 회사 그만뒀어?”
내내 누워 있던 모친 금숙이 살짝 열린 다은의 방문으로 빼꼼 머리를 들이밀고는 물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나 싶어 다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더 악착같이 회사에 다녀야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 출근하는 사람한테.”
“아니……. 난리 통 속에 마지막으로 내고 간 것 같은데, 명일 이름으로 1억이나 들어왔길래 혹시 퇴직금인가 했다. 이번 일로 문제 생긴 거 아니지?”
침대에 앉아 있던 다은이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켰다. 명일은 다은의 직장이었다.
“뭐? 1억? 그걸 왜 이제 얘기해?”
“진짜 그만둔 거 아니야?”
금숙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다은이 회사를 그만두면 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니라니까.”
축의금을 받았던 동생 다현이 종이봉투에 담아 둔 돈뭉치를 가리켰다.
“그 봉투에 오백이 들었는데 총 이십 개야, 누나.”
“누가 줬어? 얼굴 봤어?”
“그, 동글동글한 안경 쓰고 귀엽게 생기신 남자분.”
차유권의 운전기사이면서 심복이나 다름없는 김정우가 분명했다. 축의금 안 받겠다고 했더니만. 이렇게 전달하다니.
다은이 종이봉투를 가져가려 하자 다현이 제 뒤로 쓱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