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억짜리 쌀
3. 1억짜리 쌀
“뭐 하는 거야? 돌려줘야 해.”
다은이 손을 내밀자 다현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이미 주신 건데 그냥 감사히 받으면 안 돼?”
“달라고 했다.”
“결혼한 셈 치고 받자, 누나야.”
평소에는 다은에게 ‘야’라고 부르던 다현이 갑자기 다정하게 ‘누나’라는 호칭을 썼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다은은 고개를 돌려 금숙을 보았다.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다현이 슬쩍하려다가 금숙에게 들켰고, 금숙은 혹여라도 다은이 회사에서 잘렸을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안 돼. 나 잘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거 이리 내. 결혼했어도 그런 큰돈 못 받아.”
다은이 단호하게 말하자 다현이 꼬리를 내렸다. 냉큼 쇼핑백에 종이봉투들을 담아 방으로 와서 문을 잠갔다. 내일 당장 유권에게 돌려줄 참이었다.
커다란 가방 안에 쇼핑백을 통째로 넣고는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해서 마련했던 수학여행비를 동생이 훔쳐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의 오토바이를 빌려서 타다가 사고를 내서 다은이 물어 준 적도 있었고, 쇼핑몰을 하겠다면서 사채를 끌어다 써서 대신 갚았던 적도 있었다.
동생 따위 연 끊어 버리겠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만 아들이라면 죽고 못 사는 금숙 때문에 번번이 다은이 해결해 줘야 했다.
“이번엔 어림도 없지.”
갑자기 생겨난 불안감 위로 차유권의 얼굴이 떠다녔다.
혹시 결혼식에 왔던 건가. 하필 유권에게 못 볼 꼴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에게만은 구질구질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입이 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큰돈을 준 거지?”
과거에는 꽤 연이 있었지만 그것도 한때였을 뿐, 우연히 직장에서 재회한 후 다은은 그를 철저히 상사로만 대했고 지금은 회사 사람 정도의 선을 칼같이 유지하는 사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제게 1억이나 되는 돈을 축의금이랍시고 줄 이유가 없었다.
“설마 나 잘린 거야?”
잘렸다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웠다. 유권이 호의로 축의금을 줬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퇴직금이라고 치기에도 큰돈이었다.
***
다음 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은은 가방에 든 돈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씻고 출근할 채비를 마쳤다.
방을 나서는데 금숙이 다은을 애타게 불렀다.
“다은아, 엄마 좀 도와줘. 다현이가 병을 저 높은 데다가 올려놨네. 아이참, 매실청 담가야 하는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금숙을 대신해 다은이 높은 곳에 있는 유리병을 꺼내 주었다.
“여기.”
“고마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와. 회사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엄마가 혼쭐을 내 줄게.”
금숙이 다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았어, 다녀올게.”
다은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출근길에 나섰다. 사실 다현과 금숙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큰돈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빠르게 출근한 다은은 그동안 제 일을 대신해 준 선배 경미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유권은 다은 없이도 일정을 무사히 소화했으며 별다른 이슈도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변경된 일정이 없는지 심기는 어땠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녀가 상사로 모시는 유권이 지독한 워커홀릭에 극도로 예민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적 성격도 한몫했다.
업무를 준비하던 다은은 유권의 기사인 정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유권이 회사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를 들은 다은이 비서실 문을 열고 유권을 맞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무님.”
위압감을 안겨 주는 큰 키와 잘 다져진 근육질의 몸과 인간미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조각 같은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유권이 걸음을 멈추고 다은을 내려다보았다. 내리깐 눈매가 깊게 그늘졌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청량한 향이 코끝에 스몄다.
따갑게 들러붙는 시선에 절로 긴장되었다.
“아닐 텐데.”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다은은 마른 입술을 핥고는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유권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놀리는 듯한 말투에 다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재회한 후 두 사람은 줄곧 선을 유지했다. 그런데 장난스러운 그의 태도에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축의금을 안 찾아가셨던데요.”
유권은 아, 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는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말을 꺼냈다.
“후회 중이야. 음식이 더럽게 맛없었거든.”
아니, 그걸 먹었다고? 그 와중에? 다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 이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진짜로 왔었구나.
치부를 들킨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치부를 들켰다. 결혼식장이 난장판이 되는 걸 보며 헛웃음을 쳤을 유권을 생각하자 수치스러워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에게만은 이런 꼴 보이고 싶지 않은데, 하필이면 최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 그래도 돌려드리려고…….”
다은은 가방에서 쇼핑백을 꺼내서 건넸다. 그 모습이 꼭 고장 난 로봇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유권이 그 안에서 쪽지를 꺼내 읽고는 픽, 실소했다.
쪽지가 있었나……? 판단이 느려져 멍하니 유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입술이 열렸다.
“누나, 미안해. 내가 꼭 성공해서 두 배로 갚아 줄게.”
유권에게서 절대 나올 리 없는 ‘누나’라는 호칭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송다현이 그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닐 거라고!’
다은은 벼락처럼 몸을 움직여 유권에게서 쇼핑백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낙담했다. 봉투 안에는 진공 포장 된 쌀이 들어 있었다.
“좋겠네, 송 비서. 곧 2억이 생기겠어.”
이성이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쇼핑백을 회수하는 다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의 쌀알이 책상으로 떨어졌다. 다은은 떨리는 손으로 쌀알을 주웠다. 슬쩍 본 유권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웃어? 이게 웃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식어 갔다. 잠시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은은 빠르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다현에게 전화했다.
당연하다는 듯 전화는 꺼져 있었다. 수십 통을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분노가 점진적으로 차올랐다.
아침에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돈은 그대로 있었다. 어느 틈에 바뀌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다은아, 엄마 좀 도와줘. 다현이가 병을 저 높은 데다가 올려놨네. 아이참, 매실청 담가야 하는데.”(#기울기)
다현의 단독 범행이 아니었다. 공범이 있었다. 다은이 금숙의 부탁으로 유리병을 꺼내고 있을 때 다현이 가방 속 쇼핑백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다은은 금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받지 않던 금숙이 두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어, 딸.
목소리가 어색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대답하고 싶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니까 일말의 죄책감은 남겨 둔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엄마, 다현이가 전화를 안 받네?”
—어, 음. 걔 원래 전화 잘 안 받잖아. 무, 무슨 일 있어?
금숙이 말을 더듬었다. 확신이 들자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다은은 이를 악물었다.
“1억 당장 안 가지고 오면 나 경찰에 신고할 거야.”
—다은아, 제발. 엄마가 그랬어, 엄마가 욕심나서 그런 거야.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욕심 내려놓고 돈 다시 가져와.”
대답이 없었다. 답답해진 다은은 다시 금숙을 불렀다.
“엄마.”
—다은아, 정말 미안한데 우리 다현이 한 번만 믿어 보면 안 될까? 같이 일하는 형이 진짜 괜찮은 사람이래.
다은이 대답하지 않자 금숙은 다시 말을 이었다.
—동대문에서 물건 떼다가 외국에다 파는데 꽤 쏠쏠한가 봐. 한 달에 천만 원씩 번대. 사입비만 받고 거래처도 다 소개해 준다고. 이번엔 확실한 것 같더라.
“한두 번이어야 믿지. 엄마는 아직도 걔를 믿어?”
—그 형이 아주 싹싹해. 딱 자수성가한 타입이야.
“사기꾼이 얼굴에 사기꾼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면 누가 속겠어?”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잖니. 확실해, 이번엔…….
“근데 왜 고영훈이 쓰레기인 건 몰랐어?”
금숙이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훈의 인상이 너무 좋다며, 다은의 결혼을 무리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다.
다은은 한숨을 길게 쉰 후 말을 꺼냈다.
“엄마, 엄마 딸 파혼했어. 남자한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한데 가족한테 또 뒤통수를 맞아야 할까?”
—미안하다. 내가 장기를 팔아서라도 알아서 돈을 구해야 했는데. 아니, 결혼만 잘 진행됐어도 그 돈이……. 주리, 걔만 아니었어도……!
“됐어, 그만하고 송다현 잡아 놔.”
다은은 전화를 끊고 벽에 머리를 박았다.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태겠다며 절뚝이며 일터로 나갔을 금숙을 생각하자 더 독한 말을 할 수 없었다.
금숙이 다리를 다친 건 다은 때문이었다. 저를 버린 아빠를 찾으러 간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멀쩡했을 다리였다. 그럼에도 금숙은 단 한 번도 저를 탓하지 않았다.
절뚝이며 걷는 금숙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은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가 개망나니 같은 동생을 끊어 내지 못하고 금숙에게 휘둘리는 이유였다.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섰다. 독하고 매정한 상사는 남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으니까.
화장실 칸막이를 열고 나가려던 때,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