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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쩔까, 송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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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쩔까, 송 비서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거기서 나서서 마이크를 잡을 건 또 뭐야. 봤어? 태연한 척 말하는 거?”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 인수인계해 준답시고 독한 향수 냄새를 남기고 가서 창문을 열게 만든 장본인인 경미였다.

“웃음 참느라 혼났잖아. 화장 안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 신부 화장 엄청 안 어울리던데?”

다은은 비서실의 공식 왕따였다. 화장하지 않고 립밤만 바르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혼자 청순한 척, 어린 척하려고 그런다나 뭐라나. 화장품 냄새를 불쾌하게 여기는 유권 때문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자기는 편해서 좋겠어. 나도 화장 안 하고 늦잠 자고 싶다.”

다른 직원들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출근해 미리 준비해 놓는 건 다은이었는데도 선배 경미는 늘 그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저 핑계가 필요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젊은, 게다가 지나치게 잘생긴 유권을 다은이 맡게 되었으니까.

경미뿐 아니라 비서실 사람 모두가 그 자리를 탐냈다. 차유권이 얼마나 재수 없는 남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유권이 얼마나 혹독한 상사인지 안다면 다은과 유권의 긴 인연을 가엽게 여겨야 마땅했다.

“로봇인 줄 알았다니까. 인간미가 없으니까 남자가 바람을 피우지. 내가 송다은이었으면 망신스러워서 바로 도망쳤다.”

가만히 듣던 다은은 제가 왜 이렇게 구석에서 모진 소리를 참아 가며 숨어 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망쳤으면 뭐가 달랐을까요?”

제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다은은 그들이 말했던 대로 태연한 척 손을 닦았다.

경미와 화영이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도 바람피우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도 억지로 강행해서 참고 사는 거보다 낫지 않나.”

저를 겨냥하는 말에 경미가 눈을 부릅떴다. 다은은 본의 아니게 그녀가 통화하는 걸 들었던 적 있다. 제 일이 아니기에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시면 말고요.”

다은은 무심한 얼굴로 손을 핸드 드라이어에 말렸다. 경미가 발악하여 소리쳤지만 유난히 큰 핸드 드라이어 소리에 묻혀 버렸다.

물기 없이 뽀송하게 마른 손을 툭툭 턴 뒤 그 둘을 보며 빙긋 웃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이번엔 가식 한 방울 안 섞인 웃음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독한 상사 밑에서 구를 대로 굴러서인지 이제 이까짓 일쯤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했다.

“에이, 그런 소문 재미없잖아요. 진부하기도 하고.”

영훈은 영업팀이라 같은 회사에 다녀도 얼굴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넉살이 좋아 비서실까지 찾아오곤 했다. 그러다 동료들이 다은의 뒷담화를 하고 있으면 늘 그녀를 두둔해 주었다.

그런 모습에 마음이 열렸던 건데.

아, 내가 다시 사내 연애 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다은은 속으로 다짐한 뒤 전쟁터로 걸어 들어갔다.

***

어떻게 일을 끝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다은은 집 앞에 있었다.

다현은 집에 없었다. 그의 방으로 들어가 보니, 안 그래도 더러웠던 방이 더 더러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당장 필요한 것만 급히 챙겨 집을 나간 것 같았다. 다은의 뒤에 선 금숙은 죄지은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가방에서 1억짜리 쌀을 금숙에게 건네고는 집을 나섰다. 이런 날 부를 친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와 연인을 동시에 잃은 탓이다.

다은은 자주 가던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모, 저 늘 먹던 거로 주세요!”

“신혼여행 벌써 갔다 온 거야?”

“아니다. 소주 한 병 먼저 주세요.”

가만히 다은을 보던 사장이 뭔가 알아챘는지 더 묻지 않고 소주와 잔을 갖다주었다.

다은은 물컵에 소주를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평일에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유권 때문이었다. 입사하고 환영회 때 뭣 모르고 술을 받아먹었다가 다음 날 유권에게 반경 1미터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었다.

사색에 잠겨 소주를 안주도 없이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영훈의 모친 향미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다은은 전화를 받았다. 다시는 전화하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을 생각으로.

“영영 끝이라고 하시더니 전화를 다 하셨네요.”

—다, 다은이니? 내가 그날은 충격을 받아서 말을 좀 심하게 했구나.

“아시면 됐어요.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얘, 잠깐만. 너 정말로 이렇게 끝낼 거니?

“아뇨, 이미 끝났습니다.”

—내가 얘기해 봤는데, 그렇게 깊은 관계는 아니라고 하더구나. 정말 딱 한 번이었대. 남자들 한 번쯤 그럴 수 있잖니. 애는 너 신경 안 쓰이도록 내가 키우마. 너희 둘은 그냥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 제사도 올 필요 없다! 일 년에 딱 두 번, 명절에만 와.

다은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들은 말이 바람피운 남자의 모친에게서 나온 말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특혜를 준다는 듯한 말투에 다은은 기가 찼다.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결혼 준비에 쓴 비용 고영훈 메일로 보내 놨으니 확인하고 정산하라고 전해 주세요.”

—아니, 다은아! 잠깐, 다은아!

다은은 전화를 끊고 컵에 남은 소주를 들이켰다. 더 들을 필요 없는 말이었다.

상황을 정리하고 난관을 헤쳐 나갈 계획을 짜는데 머리에 열이 올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길 가다가 1억 줍고 싶다.”

이쯤 되니 차유권이 원망스러워진다. 그런 돈을 뭐 하러 줘서 마음껏 파혼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대학 시절, 유권은 다은에게 처음으로 설렘과 아픔을 동시에 준 사람이었다. 저도 모르게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마음속 깊이 들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음 당해 보는 매몰차고도 완벽한 거절이었다. 영원히 볼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상사로 재회하게 되었다.

재회한 후에는 피하고만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를 대하는 유권과는 달리 다은은 그저 불편했다. 아니, 불편함을 넘어선 감정이었다.

원하던 회사에 힘들게 입사했기에 이직이나 퇴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지원했던 준원의 부서에 자리가 생기면 정식으로 부서 이동을 신청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자, 그때까지 불편한 감정은 제쳐 두고 일만 열심히 하자, 다짐했건만 이렇게 또 발가벗겨진 채로 그의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다은은 의식적으로 그에게 책잡힐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과거처럼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가능한 한 좋은 모습만 남겨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때 공교롭게도 유권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던 다은이 충동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동시에 설움이 밀려들었다.

“저 1억 못 드려요. 동생이 가지고 튀었단 말이에요.”

술김에 말을 토해 낸 다은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눌러 삼켰다. 정말 참담했다.

—그건 됐고. 어디야, 송 비서.

“저야말로 됐고, 축의금은 퇴직금으로 갚을게요. 사직서는 제 책상 두 번째 서랍에 있습니다. 제발 유병장수하세요.”

다은은 제 할 말만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이상하게 통쾌했다.

안주도 없이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취기는 금세 올랐다.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한 탓도 있었다.

끔뻑끔뻑 졸던 다은은 결국 머리를 테이블에 박고 잠이 들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톡톡,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다은의 시야에 유권의 얼굴이 잔상처럼 흐리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그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엇, 상무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훅 끼치는 술 냄새에 언짢은 듯 보였다. 다은은 뒤늦게 입을 가렸다.

“지나가다 보여서.”

유권이 단조롭게 대꾸했다.

“에이, 평생 이 동네 지나갈 일 없으시면서.”

더 캐물으려던 다은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건 꿈에 불과하니까.

차유권은 이런 포장마차에 올 사람이 아니었다.

다은은 컵에 소주를 따라 홀짝홀짝 마셨다. 유권은 그런 다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은 달았고 눈앞의 유권은 찡그린 얼굴이 아니었다.

다은은 괜히 손을 펴서 유권의 눈앞에 흔들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니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심지어 웃음도 나왔다.

유권이 조금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술에 취한 다은은 그런 걸 알아챌 여력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혼자 술을 마셔.”

다정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다은이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은 나를 죽어라, 벼랑에서 등 떠밀고 있는데 내가 너무 눈치 없이 버티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돌연 고개를 숙인 다은의 얼굴을 긴 머리카락이 감추었다. 유권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순간 다은이 다시 숨을 길게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뭘 또 그렇게까지.”

머쓱해진 유권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왜 1억이나 주셨냐고요.”

다은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는 듯 말했다. 더한 일도 겪었으면서.

“그러게. 어쩔까, 송 비서.”

그녀를 무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유권이 문득 말했다. 그는 찰나의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은을 응시했다.

느른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자 다은이 커다란 눈을 끔벅였다.

그의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달콤한 미소였다. 마치 8년 전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