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놈과 사통한 여인
1. 천놈과 사통한 여인
뙤약볕이 내리쬐는 계절.
버썩 마른 흙바닥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포도청 앞마당에는 포도대장의 문초가 한창이었다.
“네년이 천것과 사통하였다는 발고가 여럿이다! 이래도 모른 척할 것이냐?”
형틀에 묶인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총명했던 눈은 생기를 잃었으며 피골은 상접한지 오래였다.
며칠 동안 음식은커녕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버썩 마른 여울의 입술 사이로 지친 목소리가 흘렀다.
“……사내와 손도 잡아본 적 없는 제가 무슨 수로 사통했단 말씀입니까?”
“입만 열면 거짓이구나. 여봐라, 죄인을 데려오거라!”
포졸들이 포도청 앞마당으로 사내 한 명을 끌고 왔다.
사내의 피부는 거칠었으며 이는 옥수수처럼 누리끼리했다.
떡이 진 머리에는 이가 들끓었고 옷에는 알 수 없는 오물까지 묻어 있었다.
포도대장이 사내에게 언성을 높였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예조 참의 한 씨의 장녀 한 여울과 배를 맞댐이 사실이더냐?”
“예, 사실입니다.”
“거짓을 고한다면 능지처사할 것이다. 자백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하느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합니다……!”
포도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후, 여울에게 시선을 옮겼다.
“발칙한 것! 이래도 발뺌할 것이야?”
여울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얗던 피부가 더욱 창백해졌다.
“처음 보는 이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반가의 여인이 천것과 화간하여 양반의 위신을 더럽힌 죄가 크다. 이는 강상죄로 다스려야 할 것이니 의금부로 이송해 엄히 처벌할 것이다!”
여울의 하늘은 노래졌다. 벼락이 떨어진 듯 정신이 어질하고 손이 덜덜 떨렸다.
대역 죄인을 다루는 의금부.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살아서 나올 수 없었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의금부에 끌려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억울합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나리!”
“죄인을 옥에 가두어라!”
“제발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여울은 포졸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목 놓아 호소했다.
자리에 모인 이들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여울을 바라볼 뿐.
억울한 이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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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옥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울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옥사 문 앞으로 의관을 갖춰 입은 중년의 선비가 보였다.
여울은 안도감에 눈을 글썽였다.
“아버지……!”
“나오거라. 속전을 치렀다.”
예조 참의 한 씨.
양반가인 그에게 옥사에서 양딸 한 명 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울이 일어나려는데 한 씨가 입을 열었다.
“신랑 측에서 혼담을 파했다.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어야지.”
여울이 천민과 사통했다는 소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버렸다.
그런 소문의 여인에게 아들을 장가보낼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씨의 목소리에 옅은 분노가 깔렸다.
“십여 년 동안 키워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냐?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울을 딸로 받아들인 한 씨였다.
여울의 사통 사건은 한 씨에게 모멸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씨가 쯧 혀를 찼다.
“누가 근본 없는 태생 아니랄까.”
“…….”
여울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바닥에 떨궜다.
툭 소리와 함께 여울 앞으로 은장도와 보따리가 던져졌다.
여울의 동공이 흔들렸다.
“떠나거라. 오늘이 널 자식으로서 보는 마지막 날이니.”
십여 년 전. 한 씨는 부인의 간곡한 청으로 여울을 수양딸로 삼았었다.
하지만 여울을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은 요절해버렸으니.
한 씨에게 여울은 재앙을 가져온 존재였다.
눈엣가시가 된 여울을 죽은 부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키웠다.
그러다 명망 있는 가문에 시집보내게 되었다.
이제야 쓸모를 다하려나 싶었던 찰나, 여울은 추문으로 가문의 명예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소문의 진위를 떠나 한 씨에게 여울은 눈 밖에 난 자식이었다.
미운 정조차 한순간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네 손으로 자결하거라.”
여울을 내려다보는 한 씨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 시선엔 일말의 정도 남지 않았다.
가문의 수치엔 붙은 숨조차 사치라는 듯, 한 씨는 재차 되물었다.
“알았느냐?”
울컥한 것이 여울의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왔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 번도 한 씨의 뜻을 거스른 적 없는 여울이었다.
여울은 마지막만큼은 착한 딸로 남기 위해 울분을 삼켰다.
“……예, 그러겠습니다.”
창백한 손이 은장도를 집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은 서글프리만큼 차가웠다.
***
저잣거리의 인적 드문 골목.
낮임에도 불구하고 골목은 어둡고 음산했다.
그래서일까, 골목길을 걷는 자는 태 외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태의 훤칠한 키, 단단한 풍채를 생각한다면 골목길의 스산함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태의 뒤로 사내 하나가 조용히 나타났다.
사내는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며 태의 뒤를 밟았다.
태가 모퉁이를 꺾어 들어가자 사내도 따라갔다.
그러자 사내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
태가 보이지 않았다.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또 다른 골목에서 우악스러운 팔이 나타나 사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윽!”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사내의 등은 벽에 부딪혔다.
어느새 나타난 태가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태는 서늘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의 꼬리더냐.”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태가 뿜는 기세에 전신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마, 말할 수 없습니다.”
“뭐,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 같긴 하구나.”
태는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날을 꺼내 들었다.
환도의 섬뜩한 섬광에 사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태가 비죽거리는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뒤를 밟다니. 이대로 보내긴 괘씸해서 말이지.”
“제, 제발……!”
태가 사내의 뺨에 검날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에 사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가 겁에 질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제헌이 나타났다.
무복 차림에 삿갓을 쓴 제헌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태에게 허리를 숙였다.
“찾았습니다.”
태가 동작을 멈췄다.
태는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움직였다.
“운이 좋군.”
태가 사내의 멱살을 놓았다. 그러곤 건조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중전마마께 안부 인사 전하고.”
“흐익……!”
풀려난 사내는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다.
사내에게서 진즉 시선을 뗀 태는 검날을 닦아내며 물었다.
“찾으라는 사람은 찾았나?”
“예. 찾았습니다.”
환도를 닦던 태의 손이 멈췄다.
수개월 만에 얻은 수확에 태의 눈엔 이채가 스쳤다.
계속하라는 듯, 태가 턱을 까닥이자 제헌은 말을 이었다.
“한여울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더군요. 나이, 성별, 배경 모두 말씀하신 정보와 일치합니다. 10세 때부터 예조 참의 한 씨의 시양녀로 들어갔으며 넉 달 전 사통 죄로 파혼당했고 지금은 가문에서 쫓겨나 따로 살고 있습니다.”
“흐음…….”
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찾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하늘은 그의 편인 모양이었다.
태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말려 올라갔다.
“심 씨 가문의 영광도 얼마 안 남았군.”
“그런데 그 사통 죄라는 게……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제헌이 고개를 기웃하며 말을 이었다.
“좀 더 조사해보니 사통했다는 천놈. 신분을 세탁했더군요. 영 구린 냄새가 납니다.”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태가 말끔해진 환도를 검집에 넣었다.
“그 여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라.”
***
도성에서 떨어진 시골 마을.
여울이 이곳에서 지낸 지도 어언 넉 달이 지났다.
그녀가 사는 초가집은 사람 한 명이 누우면 가득 찰 정도로 자그마했다.
하지만 비를 막고 잠을 청할 수 있다면 여울은 그걸로 족했다.
어슴푸레 땅거미가 진 저녁. 여울은 일감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마당에 들어섰다.
그때, 숨어 있던 사내가 튀어나와 여울을 끌어안았다.
여울의 비명과 함께 바구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뭐, 뭘 하는 겁니까?! 당장 놓으십시오!”
여울은 사내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누런 이를 번들거리며 히죽였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왜 이래?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담장 너머로 여울과 마을 사람들의 눈이 마주쳤다.
다급해진 여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여울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게 중에는 여울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자들도 있었다.
사내는 여울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괜히 힘 빼지 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놓아라!”
여울이 사내의 팔을 깨물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여울을 내동댕이쳤다.
여울은 바닥에 이마를 부딪쳤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여울이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 휘둘렀지만, 은장도는 볼품없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얌전히 있으면 쉽게 끝날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아까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내가 허리춤의 몽둥이를 꺼내 휘둘렀다.
여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꺼헉!”
사내의 신음과 함께 뜨겁고 축축한 것이 여울을 뒤덮었다.
불쾌한 감각에 눈을 뜨자 새빨간 비가 쏟아져 내렸다.
여울을 겁박하려던 사내가 천천히 무너졌다. 그 뒤로 검을 든 태가 보였다.
눈앞에 나타난 태는 보통의 사내보다 키가 한 척은 컸다.
널따란 어깨에서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는 태산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하였다.
붉은 꽃비를 뒤집어쓴 모습은 마치 도깨비를 연상케 했다.
태의 형형한 검은 눈동자가 여울을 내려보았다.
혈기를 머금은 검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네가 한여울이더냐?”
동굴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
낮게 고여 드는 목소리가 여울의 몸을 침식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는 맡지 못했던 피비린내가 강하게 진동했다.
사람이 죽었다. 뒤늦게 밀려온 두려움에 여울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구원자라 불러야 할지, 살인자라 불러야 할지 모를 태가 제 얼굴에 튄 피를 거칠게 닦아냈다.
태는 다시 한번, 여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네가 한여울이냐 물었다.”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녀의 이름을 아는 걸까.
여울에게 고정된 검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그가 내뿜는 중압감에 여울은 몸이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여울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제가 한여울입니다.”
태는 죽은 사내의 옷자락에 환도를 문질러 피를 닦아냈다.
얼룩 없이 말끔해진 환도가 퍼런 광을 냈다.
이번엔 환도의 칼등이 여울의 턱 끝을 향했다.
여울은 몸을 움츠렸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신의 털이 바짝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날붙이의 차가운 감촉 때문이 아닌, 태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 때문이라.
칼 등이 여울의 뺨을 쓸며 천천히 올라갔다.
충분히 위협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를 해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진 않았다.
쓸어 올라가는 와중에도 칼끝은 여울의 여린 살결에 흠집 하나 내지 않았다.
사라락. 고요한 방 안에 머리카락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섬세한 움직임으로 뺨을 타고 올라가던 칼끝은 흐트러졌던 여울의 머리카락을 거둔 후 움직임을 멈췄다.
태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나쁘진 않군.”
태의 시선이 여울의 몸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시선은 여울의 풀어 헤쳐진 옷고름에서 멈췄다.
좀 전에 몸부림을 치다가 옷고름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태에게 여울은 정신이 팔렸었다.
하여 여울은 제 꼴이 어떤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제 행색을 알아차린 여울은 황급하게 옷깃을 닫았다.
하지만 태의 시선은 옷고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여울이 입을 열었다.
“……시선을 거두어 주십시오.”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
쨍그랑! 칼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여울이 몸을 움찔했을 때, 태가 긴 다리를 뻗어 여울에게 다가갔다.
농밀하면서도 묵직한 목단향이 여울의 코를 자극했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여울은 어질했다.
그녀보다 한 마디 이상 큰 태의 손이 여울의 옷고름을 붙잡았다.
그대로 잡아당기자 여울의 몸은 태 쪽으로 기울어졌다.
“아……!”
여울은 주춤하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몸에 힘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태의 품에 안길 뻔했다.
불현듯, 불길한 직감이 여울의 뇌리에 스쳤다.
‘설마…….’
여울은 태가 그녀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태의 목적이 찾아왔던 사내와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잘 차려진 먹잇감처럼 고분고분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던 여울은 옷고름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무엄하십니다.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반가의 여인을 이리 함부로…….”
여울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태가 다시 한번 옷고름을 당겼다.
여울의 손에서 옷고름이 빠져나왔다.
이대로 당하는 걸까 싶던 찰나.
태가 여울의 옷고름을 고쳐 매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인 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동작이었다.
태의 기행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저고리는 어느새 단정하게 여며져 있었다.
작은 임무를 마친 태는 여울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그러곤 여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비로소 만족스러워졌는지 태는 한쪽을 입꼬리를 비죽 틀어 올렸다.
“제안 하나 하지.”
여울이 태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심연 같은 검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웃는 얼굴 너머로 어떤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지 여울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위험하다는 직감만큼은 분명하게 들었다.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며 침을 꿀꺽 삼켰을 때, 태가 새까만 목적을 드러냈다.
“나, 강성대군 이태의 여인이 되거라.”
예상치도 못한 말에 여울의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그녀의 인생에 두 번은 없을 오만한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