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강성대군 이태의 여인이 되거라
2. 강성대군 이태의 여인이 되거라
“나, 강성대군 이태의 여인이 되거라.”
강성대군 이태.
조선의 왕 이정의 두 번째 아들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 장안의 미친개, 희대의 망나니, 왕실의 수치.
이 모든 게 강성대군 이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 난봉꾼 같은 인상을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한 강성대군 이태는 소문의 주인공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멀끔한 모습이었다.
아니, 멀끔하다 못해 출중했다.
주변의 공기마저 내리누르는 듯한 분위기. 그 묵직함은 어떠한 사내가 와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분이 어찌 내게…….’
여울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 강성대군 이태와 정을 통하는 상대가 되라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뜻을 알고도 물어보는 게 분명한 여울을 보며 태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네가 장안에서 음행녀로 소문이 자자하다지?”
여울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도 좀 전의 사내처럼 소문만 듣고 여울을 어떻게든 해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여울은 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워서 손은 바르르 떠는 주제에 눈빛은 제법 당돌했다.
태는 그런 여울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상관없다. 내가 필요한 건 네 몸뚱어리뿐이니.”
황당함에 여울의 입술이 벌어졌다.
경우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여울은 올라오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곤 할 수 있는 만큼 차분하게 말했다.
“이 나라의 종친은 예도 없습니까? 제가 비록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이오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인은 아닙니다.”
여울이 다시 한번 힘을 실어 제 의사를 밝혔다.
“돌아가세요. 저는 자가가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안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네……?”
여울은 또다시 어벙한 표정으로 태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이상한 소리를 해놓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여울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태가 여울에게 성큼 다가갔다.
태는 제 가슴께 오는 여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억울하지 않나?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거.”
여울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런 여울의 귓가에 태는 나긋하게 속삭였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왜 네가 이런 짓을 당해야 했을까 궁금할 텐데.”
여울의 하얀 살결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슴은 무거운 돌덩이가 얹히기라도 한 듯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을 것이고. 네가 고통스러웠던 만큼 똑같이 갚아 주고 싶겠지.”
복수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여울이었다.
하지만 태의 말은 줄곧 여울의 머릿속에서 그녀를 괴롭혔던 의문들이었다.
그렇기에 여울은 태의 말에 홀려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헛소문을 퍼트린 녀석을 잡아 주겠다. 그에 맞는 응징은 덤이고.”
태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태에게서 녹진한 목단향이 풍겼다.
“그뿐만 아니라 부부인으로서의 명예와 호의호식하는 삶을 보장해 주겠다. 너를 함부로 대할 사람은 없을 거다.”
여울의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울의 말을 믿어 주는 이는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녀를 온전히 믿어 주는 이가 나타났다.
하지만 여울은 안도감보다는 경계심부터 들었다.
‘왜 내게 잘해 주는 거지? 무슨 목적이 있어서?’
눈앞의 강성대군은 오늘 처음 만난 사내였다.
그런 그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리가 없었다.
분명 목적이 있을 터. 여울은 태의 제안에 깔린 숨겨진 저의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사람을 눈앞에서 베어버린 살인자의 말은 쉽게 신뢰할 수 없었다.
여울은 불안한 눈으로 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대군 자가를 제가 어찌 믿습니까.”
“믿고 안 믿고는 그대의 선택이지. 믿지 못하겠으면 평생 이런 촌구석에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든가.”
좁았던 간격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아니면 나와 손을 잡아 명예를 회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든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여울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여울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거라. 이 제안을 놓치면 누구에게 손해일지.”
태는 손을 뻗어 여울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여울의 턱이 천천히 끌어 올려졌다.
그녀의 시야로 태의 잘빠진 이목구비가 보였다.
태는 밤하늘 같은 눈을 내리깔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난 네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태의 검붉은 입술이 오만하게 올라갔다.
살갗으로 전해지는 그의 손길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
.
.
여울의 초가집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거리.
홀로 돌아오는 태를 보며 제헌은 한숨을 쉬었다.
“회유는 실패하신 겁니까?”
“아니.”
“예? 혼자 나오셨지 않습니까? 한여울이라는 여인은요?”
태는 어리둥절한 제헌을 뒤로한 채로 가볍게 말 안장에 올라탔다.
그러곤 확신에 찬 얼굴로 말고삐를 감아쥐었다.
“그녀는 내게 올 것이다.”
태는 여울의 집에서 마주쳤던 사내를 떠올렸다.
차디찬 주검으로 여울의 집에 누워 있을 사내를.
“나 외의 선택지는 없을 테니까.”
.
.
.
덩그러니 남겨져 버린 여울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제멋대로 왔다 사라진 태를 떠올렸다.
‘정말 기이한 사람이야.’
다짜고짜 찾아와서 혼인하자고 하질 않나.
여울의 이름과 사는 곳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혼인하겠다는 건진 모르겠으나 여울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태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사람을 베어버린 것을 보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태가 사람을 죽였을 때의 표정은 하찮은 파리를 죽이는 듯 무미건조했다.
칼날에 묻은 피를 닦을 때는 더러운 걸 닦는다는 듯 불쾌한 얼굴이었다.
만약 여울이 태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다음 차례가 여울이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결정적으로 여울의 본능이 말했다.
강성대군 이태는 위험한 사람이라고.
그와 엮이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일에 휘말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절해야겠지…….’
태가 여울의 말을 믿어줬을 때는 기분이 묘하긴 했다.
여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는 사람은 태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파격적인 제안만큼 위험한 대가가 따를 것이 분명했다.
여울은 명을 단축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자. 돈도 더 모아서 치안 좋은 동네로 이사 가고. ’
누가, 어떤 이유로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는지 궁금했지만, 여울은 먹고사는 일이 시급했다.
성실히 살아간다면 삶에도 숨통이 트이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그보다 여울은 눈앞의 사내의 시체가 골치였다.
자칫하면 그녀가 살인자로 누명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지. 신고부터 해야 하나……?’
눈앞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니 여울은 정신이 어질하고 헛구역질이 났다.
그때, 문밖에서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깁니다! 여기!”
벌컥 열린 여울의 방문으로 포도청에서 온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자그마한 여울의 방이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포졸들은 여울의 방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문밖의 마을 사람들은 방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기함했다.
여울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포졸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저 여인이 죽인 게 확실한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이 정분을 나누려 방에 들어가는 것도 봤고 소리 지르며 싸우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잠시 검문을 하겠소.”
포졸이 여울이 방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피 묻은 여울의 은장도가 보였다.
사내가 죽었을 때, 여울의 은장도에도 피가 묻은 모양이었다.
“본인 은장도 맞소?”
“맞습니다. 하지만…….”
여울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
아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마을 사람들이 나와 증언하기 시작했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깐!”
“저 여자, 사통 죄도 저지른 사람이오!”
“사통 죄도 모자라 살인까지 하다니! 이런 동네 망신이 다 있나!”
“아, 아닙니다.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포졸들은 오라를 꺼내 여울을 묶었다.
“당신을 살인 용의자로 추포하겠소.”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저자가 먼저 저를……!”
“당신이 죽였다고 증언한 증인이 한둘이 아니오. 이래도 발뺌할 것이오?”
“전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니라 하지 않습니까!”
“닥치시오! 변명은 포도청에 가서 하시오.”
여울은 해명하려 했지만, 그녀를 믿는 이는 없었다.
목소리조차 들어주는 이 없이 짓밟히는 대로 짓밟히는 삶.
이것이 여울의 현실이자 인생이었다.
***
둥근 달이 떠오른 밤.
여울은 또다시 옥사로 돌아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여울은 몸을 웅크렸다.
자식의 연을 끊겠다는 한 씨의 다짐에 맞게, 집에서는 연통 하나 없었다.
여울을 변호해 주는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여울의 살인죄는 확정이나 다름없었고 사건은 형조에서 맡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
이대로라면 참형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이대로 죽는 걸까.’
오직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좋은 지어미감이 되기 위해 살아온 여울이었다.
스스로를 죽이고 산 대가가 이 꼴이라니.
이제는 더 추락할 곳도 없었다.
아무도 지켜주는 이 없는 현실 속에서 그녀를 믿어 준 사람은 강성대군 이태라는 사내뿐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오만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린다니 웃긴 일이었다.
‘그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때늦은 후회를 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여울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옥사 생활이 제법 적성에 맞나 보군.”
“!”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강직하고 굵으면서도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
강성대군 이태가 옥사 문 앞에서 여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달빛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가 죽였다 말하지 않았지?”
“……짐승도 먹이 주는 사람은 물지 않습니다.”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가 아니었다면 여울은 사내에게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오명을 쓰고 죽는 일보다 사내에게 당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하여 여울은 저를 구해 준 태의 이름을 꺼낼 순 없었다.
“이거 감동인걸. 보기보다 의리 있는 여인이군.”
태는 여울이 눈높이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내 제안. 아직 유효한데 말이야.”
“……여기서 꺼내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덤이지. ”
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여인이 된다는 조건하에.”
강성대군 이태의 여인이 된다면 여울은 옥사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누명도 벗고 편안한 삶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여울을 향해 태가 물었다.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여울에게 선택지란 없었다.
살인 사건이 형조로 올라간다면 여울은 최소 참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태가 옥사 너머로 손을 뻗어 여울의 뺨을 어루만졌다.
뺨에 닿은 태의 손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너를 믿어 줄 사람은 나뿐이고. 너를 도와줄 사람도 오직 나뿐이다.”
차가운 손길과는 달리, 여울을 바라보는 태의 눈동자는 불길을 머금고 있었다.
그 불길을 홀린 듯 바라보았을 때, 태가 여울의 귓가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곤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는 너의 유일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