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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혼인할 여인은 제가 고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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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혼인할 여인은 제가 고르겠습니다

“나는 너의 유일한 편이다.”

태의 밝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여울을 응시했다.

그 강렬한 시선에 여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태와의 거래는 도박이나 다름없었지만 여울에겐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 기회마저 끊어져 버린다면 여울은 끝없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버릴 것이다.

그런 추락이라면 더는 사양이었다.

태를 바라보던 여울은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보여 주십시오. 그럴 능력 있는 분이라는 거.”

태의 검붉은 입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갔다.

한없이 오만하면서도 열기를 돋우는 미소였다.

“내일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태가 옥사를 걸어 나갔다.

여울은 멀어져가는 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등이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거대해 보였다.

.

.

.

왕의 침전인 강녕전.

보료에는 왕 이광이, 옆에는 중전 희란이, 두 사람의 맞은편엔 태가 앉아 있었다.

이광이 시뻘게진 얼굴로 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살인이라니, 대체 무슨 정신인 게야?!”

태는 여울의 옥사에서 나온 후, 포도청에 살인을 자백했다.

태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이광의 귀에 들어갔고 이광은 태를 급히 궁으로 부른 참이었다.

이광의 노기로 편전의 분위기가 후끈거리는 와중에 태는 태연하게 답했다.

“눈앞에서 무고한 여인이 당하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여인을 해하려 했기에 죽였다는 태의 자백은 태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정적으로, 왕의 아들을 함부로 추포할 자는 없었으니. 이번 살인 사건은 이광의 권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네놈이 망나니더냐? 보통 사람 같았으면 관아에 끌려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바마마께 늘 뒤처리를 해 주시니 감사한 마음입니다.”

“네놈이 진짜……!”

급격하게 오르는 혈압에 이광은 제 목덜미를 붙잡았다.

태의 만행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혼인도 미루고 틈만 나면 사고를 치고 다니는 바람에 태는 이광의 오랜 골칫덩이였다.

“이뿐이더냐? 툭하면 시정잡배처럼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질 않나. 대체 언제 철이 들 것이야? 네놈 때문에 올라오는 상소에 낯이 뜨거워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이광의 옆자리에 앉은 희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붙여 감시한 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고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무 노여워 마세요. 전하의 혈기 왕성한 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중전, 난 저 정도는 아니었소!”

희란의 조곤조곤한 말투 때문일까. 세월의 풍파를 비껴간 고운 외모 때문일까.

이광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래도 노여움이 가시진 않았는지 이광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태를 바라보았다.

“정착하고 싶지 않다, 자유를 누리고 싶다, 언제까지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해댈 것이냐? 혼례를 치르면 철이 들려나 싶었는데 혼례는커녕 매번 저렇게 사고를 치니.”

“혼례 치르겠습니다.”

“그래, 혼례를…… 뭐?”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이광은 놀란 입을 떡 벌렸다.

옆에 있던 희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태가 다시 한번 제 의견을 말했다.

“혼례 치르겠단 말씀드립니다. 혼기를 넘은 지도 오래고. 저도 이제 한 사람 몫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바마마의 말씀처럼 언제까지 철없는 자식으로 살 순 없으니까요.”

갑작스러운 태의 변화에 이광은 입을 뻐끔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던 태가 아니었던가.

대체 무슨 변덕인가 싶었지만, 혼례를 치르겠다는 대답은 이광이 수년간 기다렸던 염원이었다.

매번 망신살만 뻗치는 태를 하루빨리 눈앞에서 치우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태는 종잡을 수 없는 아들이었다.

아들의 죽 끓는 변덕이 뒤집히지 않도록 서둘러 못을 박아 둬야 했다.

“잘 생각했다! 네가 드디어 이 아비의 말을 듣는 모양이구나.”

옆에 있던 희란이 나긋하게 말했다.

“이른 시일 안에 가례청을 설치해야겠습니다. 강성 대군에게 어울리는 규수는 제가 따로 알아보겠…….”

“대신 청이 있습니다.”

태가 희란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이광과 희란을 바라보며 이곳에 온 목적을 꺼냈다.

“혼인할 여인은 제가 직접 고르겠습니다.”

편전에 침묵이 흘렀다.

눈 하나 깜박하는 이가 없어 시간은 정지한 것 같았다.

그때, 희란이 차분한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전하. 왕자가 혼인할 여인을 직접 고르는 일은 다른 왕자들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

태가 삐딱하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이보다 우스운 일은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중전마마께서 형평성을 운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중전마마께서 알아볼 규수는 마마의 내정자가 아니었습니까? 형평성을 따지시려거든 거기서부터 따지셔야지요.”

희란의 속셈은 안 봐도 뻔했다.

간택에 어울리는 여인을 알아본다는 핑계로 자기 사람을 심을 것이다.

그래야 태를 감시하기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희란은 태의 말을 물 흐르듯 흘려버리곤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전하. 왕자의 배필은 전통성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가문에서 골라야 합니다. 더군다나 대군의 배필을 정하는 일 아닙니까? 어울리는 규수를 선점하는 일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닌 조정의 관례입니다.”

희란의 말에 이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이 맞다. 네 어미가 그간 알아본 여인들을 보니 가문도, 성정도, 외모도 곱더구나. 왜 그들은 싫다는 것이야?”

“제 취향이 아닙니다.”

이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 큰 아들의 철없음에 머리가 어질했다.

“간택은 형식일 뿐이다. 혼례는 관례에 맞춰 진행할 터이니 원하는 여인이 있다면 첩으로 들이거라.”

“아바마마께서도 결국 원하는 여인과 혼례를 치르셨잖습니까? 아바마마는 되고 저는 왜 안 됩니까?”

“뭣이?!”

참다못한 이광이 결국 언성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고 이마엔 핏대가 섰다.

“난 네 아비이기 전에 이 나라의 왕이다! 핏줄이라고 해서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놈을 봐주지 않을 것이야! 꼴도 보기 싫다! 나가거라!”

이 상황에서도 태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았다.

“장가를 보내야 볼 일도 줄 텐데요.”

“이태 네 이놈!”

이광이 벼루를 던지려 들자 희란이 급하게 다가와 이광의 손을 붙잡았다.

희란은 이광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강성대군이 처음 이러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부디 귀한 힘을 헛되이 쓰지 마세요.”

“하지만 중전, 저놈이……!”

“전하께서 노여워하시면 제 마음이 너무나 아프답니다. 제발 고정하셔요.”

희란의 위로가 효과적이었는지 이광의 분노는 제법 가라앉았다.

이광의 거친 호흡이 진정됐을 때쯤, 태가 말했다.

“혼인하지 않겠다는 말도, 간택을 치르지 않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아바마마께서도 간택은 형식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저 여인만 제가 고르게 해달라는 청입니다.”

이성을 되찾은 이광은 차분히 생각했다.

일전에 이광은 태를 강제로 장가보내려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태는 내정해 둔 규수의 집안에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간택을 강제로 진행한다면 태는 또 사고를 칠 것이다.

이태는 그렇게 만들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어지간한 양반집 규수들은 이태와의 혼례를 꺼리게 될 것이고 이태를 혼인시키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광은 태가 혼인 의사를 보인 이때를 놓칠 수 없었다.

언제 또 혼인하겠다고 할지 모르니 어르고 달래서라도 장가를 보내야만 했다.

이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고른 여인과 혼인하게 해 주겠다.”

“전하!”

희란이 애타는 목소리로 이광을 불렀다.

이광은 그런 희란을 모른 척하며 운을 뗐다.

“다만.”

태와 희란의 시선이 이광의 입술에 집중됐다.

“삼간택에 올라온 여인 중에서 골라야 한다.”

태는 이광을 조용히 바라보다 입술을 뗐다.

“셋 중의 한 명은 고를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혼인할 여인은 삼간택에 올라올 자격이 있어야 한다. 처녀 단자를 넣지도 못할 한미한 가문의 여식은 안 된다는 말이다. 알았느냐?”

일반적이진 않았지만 언제나 예외의 상황은 주어지는 법이었다.

간택에 입김을 불어 넣는 건 이광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관례를 그대로 지키자니 장가를 못 보내겠고.

그렇다고 관례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간택을 진행함으로써 형식은 지키되 삼간택에서 태가 고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이광의 최선이었다.

“말씀 받들겠습니다, 아바마마.”

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이광이 청을 그대로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여인을 삼간택에 오르게 하는 것.

쉽진 않겠지만 이 정도 조건이면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희란의 얼빠진 표정도 보았으니 의외의 수확도 얻었다.

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

.

.

이른 새벽. 옥사 문지기가 들어와 여울을 깨웠다.

옥사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던 여울은 부스스 눈을 떴다.

며칠 동안의 수감생활로 지칠 대로 지친 여울은 문지기를 비몽사몽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어나시오.”

문지기의 말에 여울은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울이 자꾸 주저앉자 문지기가 그녀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옥사 밖으로 나온 여울은 문지기를 멍하니 따라나섰다.

그러다 눈을 찌르는 햇빛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문지기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당최 감이 오지 않았다.

‘설마 형조로 가는 건가?’

어젯밤. 여울은 형조로 넘어가 심문을 받을 것이라 들었다.

물밀듯 밀려온 불안감에 여울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대답 대신 도착한 곳은 포도청의 출구였다.

“석방이오. 이만 돌아가 보시오.”

“석방이요?”

“그렇소. 대군 자가께서 무죄를 입증하셨소. 이만 돌아가도 좋소.”

상황을 이해할 틈 없이 여울은 포도청 밖으로 떠밀렸다.

포도청 문이 닫히고,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가마와 제헌이 보였다.

제헌이 여울에게 다가갔다.

“한여울 아씨 맞으시죠? 모시러 왔습니다.”

“……누구십니까?”

여울이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제헌은 아차 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앞으로 아가씨를 모시게 될 정제헌이라 합니다. 강성대군 자가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여울은 사람을 보내겠다는 태의 말을 떠올렸다.

전날 밤. 능력을 보여달라는 여울의 청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바로 그녀를 옥사에서 나오게 할 줄은 몰랐다.

보여달라는 능력은 제대로 보여 준 셈이었다.

여울은 서글서글하게 웃는 제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낸다는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제헌은 여울의 또래쯤 되어 보였다.

위험천만해 보이던 태와는 달리 제헌은 서글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제헌이 태의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경계가 한층 낮아진 여울을 보며 제헌은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타시지요. 자가께서 계시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제헌이 가마 문을 열자 여울은 조심스럽게 가마에 올랐다.

고급스러운 가마는 내부까지 안락했다.

‘가마는 본가에서도 타 본 적 없었는데…….’

가마 문이 닫히고 들어 올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안전해졌다는 생각에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이었다.

여울은 강성대군이 머무는 곳이 어딘지 생각한 겨를이 없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오랜만의 단잠이 여울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