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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기보다 엉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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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기보다 엉큼한

똑똑똑.

가마를 두드리는 소리에 여울은 잠에서 깼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입가에는 침까지 흘렸다.

입 주변을 황급히 소매로 닦아냈을 때, 가마 벽 너머로 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가마에서 내리자 자그마한 기와로 만들어진 사택이 보였다.

도성에서 떨어진 사택은 녹음이 우거진 숲과 조화를 이루어 경관을 이루었다.

하여 규모가 크진 않아도 고급스럽고 단아한 분위기를 내었다.

여울은 제헌을 따라 사택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복도를 지나자 큼지막한 문이 보였다.

여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문 너머로 강성대군 이태가 있으리라.

문턱을 넘어선다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자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여울의 시야로 은은한 편백 나무 향과 함께 하얀 수증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흐릿한 수증기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씩 발걸음을 떼어내며 안에 들어섰을 때.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동굴처럼 퍼졌다.

“드디어 정식으로 만나는군.”

여울은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흐릿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아마도 앉아 있는 듯싶었다.

“조금 더 들어오는 게 좋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안개처럼 뿌옇던 수증기가 거두어졌다.

흐릿했던 형체는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고 형상은 금방 제 주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여울의 시야에 반라의 모습으로 반신욕을 즐기는 태가 들어왔다.

틀어 올린 상투. 피부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도드라진 목울대와 널따란 어깨는 남성성을 과시했다.

수증기로 맺힌 물방울은 태의 날렵한 턱선을 타고 또르르 떨어졌다.

그러다 이내 무예로 다져진 탄탄한 맨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태의 검붉은 입술이 여유롭게 말려 올라갔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그대의 지아비가 될 강성대군 이태다.”

욕탕을 가득 메운 수증기 때문일까. 처음 보는 사내의 몸 때문일까.

혼미해진 여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빨리 꺼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내 능력을 믿나 보군.”

여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해결할 수 없던 일을 이렇게 쉽게 해결해버리다니.

태가 가진 힘의 차이가 뼛속까지 느껴졌다.

태를 적으로 두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잡아 주신다고 하셨죠.”

“그래.”

저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여울은 말을 이었다.

“범인을 아시는 겁니까?”

“내가 점쟁이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여울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범인을 잡아 응징까지 해주겠다는 태의 호언장담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단 말인가?

태는 여울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기라도 한 듯 키득거렸다.

“그대와 사통했다는 천놈. 기억나나?”

여울은 자기와 뒹굴었다고 주장하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색이 지저분한 걸인으로 여울은 본 적 없던 사내였다.

“네. 기억합니다.”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지. 그 천놈. 그대가 누명을 쓴 날 이후 개명도 하고 신분도 양민으로 세탁했더군. 하루아침에 집도 생겼던데.”

“……!”

“수상한 냄새가 나지?”

여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분을 세탁하고 좋은 집을 얻는다는 것은 걸인이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에게 뒷돈을 내어줬을 터. 누군가 작정하고 여울을 모함한 게 분명했다.

“누가 그놈을 어떤 목적으로 사주했는지는 조사망을 좁혀가는 중이다.”

여울은 소름이 돋았다.

“누가……? 대체 왜……?”

여울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았었다.

본가 안채에 틀어박혀 살았으니 그녀에게 앙갚음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그녀에게 누명을 씌었단 말인가?

그것 못지않게 무서운 것은 태의 정보력이었다.

무슨 수로 이런 이야기를 알아냈는지, 애초부터 어떻게 여울을 찾아왔는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의문들이 여울의 머릿속에 자리했다.

그런 여울을 보며 태는 목간통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물어볼 게 많은 표정이지만 그건 차차 풀어가고.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주지.”

물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찰방거렸다.

보기 좋게 다져진 상체 근육이 더욱 도드라졌다.

“조만간 내 부부인을 뽑을 가례청이 열릴 거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삼간택까지 오르는 일이다.”

여울이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태와의 거래에 큰 대가가 따르리라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부부인을 뽑는 자리면 많은 명문가 규수들이 모일 터.

경쟁률을 뚫고 부부인 자리에 오르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울이 걱정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자가께서 간과하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저는 가문에서 쫓겨난 몸입니다. 아버지께서 처녀 단자를 올려 주실 리 없어요.”

한 씨와 부모 자식의 연은 끊긴 지 오래였다.

처녀 단자를 올려 줄 사람이 없으니 여울은 간택에 오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울의 걱정과는 달리 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대의 아버지는 미리 만날 계획이니까.”

“아버지께서 그렇게 쉽게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대야말로 간과하는 게 있군.”

태는 특유의 오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강성대군 이태다. 선비 하나 회유하는 것도 못 할 것 같나?”

저 자신감은 고귀한 핏줄에서 나오는 여유이리라.

천애 고아인 여울과는 태생부터 다른 태였다.

여울은 태의 거만한 태도가 조금 거북했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여울을 옥사에서 꺼냈으니 능력도 인증한 셈이었다.

여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삼간택에 오르고 나서는요?”

“그 후로는 내게 맡겨라. 그대는 최종 간택에만 오는 일만 신경 쓰면 돼.”

태의 새까만 눈동자가 여울을 응시했다.

“오를 수 있겠지?”

여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십여 년을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딸로, 지아비 될 사람을 위해 절제하는 여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고 겪지 않아도 좋았을 일들을 겪었다.

그 과정에 강성대군 이태를 제외하고 여울의 손을 잡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게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리라.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여울은 독해져야만 했다.

이제 퇴로란 없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생존하는 것.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하리라.

여울은 제게 주어진 마지막 동아줄을 젖 먹던 힘까지 보태서 움켜쥐기로 했다.

“……오를 겁니다.”

여울은 태를 또렷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를 수 없다면 오르게 만들어야지요.”

“좋아. 마음에 드는군.”

여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태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사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에 젖은 태의 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속적삼을 입었다고 해도 흰 천 너머로는 살갗이 비쳤다.

여울이 황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옷을 벗은 모습보다 입은 모습이 외설스럽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고개 너머로 태의 키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태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도 편히 씻지.”

태와 같이 씻을 생각을 하자 여울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욕탕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여울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답했다.

“생각 없습니다.”

“그 꼴로 내 부부인이 되겠다고?”

며칠 간의 옥살이로 여울의 몰골은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그뿐인가? 초가집에서 사내의 피를 뒤집어쓴 이후로 씻질 못해 여울의 머리와 옷에는 피떡이 지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내와 같은 목간통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남녀칠세부동석입니다. 혼인도 안 한 남녀가 어찌 함께 씻을 수 있습니까?”

“같이 씻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아……!”

여울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를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터질 듯 붉었다.

엄한 생각을 한 건 여울뿐이었나보다.

벙찐 여울의 얼굴이 재밌었는지 태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보다 엉큼한 구석이 있군.”

태가 물기를 닦아내고 목간통에서 걸어 나왔다.

묵직한 목단 향이 여울 쪽으로 일렁일렁 가까워졌다.

여울에게 닿은 태의 시선은 목간을 채운 온기만큼 뜨거웠다.

태가 검붉은 입술을 짓궂게 말아 올렸다.

“그대가 원하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당황한 여울이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다 씻으시고 나서 씻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태는 여전히 능글맞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든가.”

여울은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손부채질만 했다.

태가 씻을 때까지 나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렇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태의 제안을 두 번 받아들였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

.

.

목욕을 마친 여울은 물기를 닦아냈다.

간만의 목욕으로 오랜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여울은 제헌이 미리 준비해놓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 목간을 나왔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제헌이 여울에게 다가왔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여울은 제헌을 따라가며 사택 내부를 훑어보았다.

사택의 규모는 작았지만, 내부는 고급 목재로 꾸며져 있었다.

온천까지 딸려있으니 보통 귀인이 묵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는 여울을 보며 제헌이 웃었다.

“규모가 작아도 멋지지요?”

“아…….”

“자가께서 어렸을 적부터 다니시던 행궁입니다.”

행궁은 왕이 나들이 때 쓰는 별궁이었다.

왕족이 쓰는 장소라면 고급스러운 내부도 이해가 갔다.

행궁 내부를 구경하며 제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자그마한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서겠습니다.”

방은 작은 평수에도 불구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로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여울은 방을 쓱 둘러보다가 모란이 그려진 병풍 앞에 섰다.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방 안에서 묵직한 목단 향이 나기 시작했다.

“그림이 마음에 드나?”

“꺅!”

불쑥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여울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여울의 뒤에 바짝 붙은 태가 보였다.

여울은 숨을 고르며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어, 언제부터…….”

태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고 여울의 몸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여울은 움찔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뿐인데. 태의 시선이 스치는 곳마다 살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여울을 보며 태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볼 만 하네.”

이게 뭐라고 긴장했는지.

여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태에게 물었다.

“이제 뭘 해야 합니까?”

그저 목욕만 시키려고 이곳으로 데려온 것 같지는 않았다.

여울의 물음에 태가 역으로 질문을 던지며 다가왔다.

“글쎄. 이제 뭘 해야 할 것 같나?”

간격은 더욱 좁혀졌고 목단 향은 더욱 농밀해졌다.

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볼일이 있는데 말이지.”

간격이 또 한 번 좁혀졌다.

주변 공기가 묘하게 팽팽해지자 여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태의 뻗은 손이 여울의 턱을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낯 뜨거운 열기가 여울의 전신에 감돌았다.

온몸을 침식하는 열기가 저를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 때문인지, 맞닿은 살갗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나 태가 설치한 덫에 걸려들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화한 열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태의 검붉은 입술이 야릇한 호선을 그렸다.

태는 여울의 턱을 감아쥐고선 검은 눈동자를 그녀에게 고정했다.

그 시선에 여울은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의 낮고 농밀한 목소리가 여울의 귓가에 끈적하게 감겼다.

“생각해 보거라. 너를 여기까지 데려와서 씻긴 이유가 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