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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아내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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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아내를 바꾸다.

서울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청담. 그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의 프라이빗 룸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색 원피스가 몸에 딱 달라붙어 굴곡진 몸매가 드러났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진한 화장과 야한 옷차림은 나이 든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왔니?”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 불편한 감정을 감추고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왔다.

“저희 장녀입니다. 인사드리지 않고 뭐 하니?”

여자는 숨을 천천히 뱉고는 고개를 숙였다.

“지영화라고 합니다.”

“지강석 총장님의 장녀? 소문대로 미인이군요.”

“네. 감사합니다.”

불편한 자리였다. 하지만 영화는 불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다만 차마 갈아입지 못한 옷차림 덕분에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심장이 저렸다.

이미 영화의 가족들은 자리를 다 채우고 있었다.

장녀라고는 하나 오늘의 자리는 차녀인 인하의 약혼식이었다. 그러니 영화의 자리는 가장 안쪽의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니 왔어? 좀 늦었네.”

인하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 미안.”

평상시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영화의 귀에는 그녀의 욕설이 들려오는 것처럼 몸이 전율했다.

인하는 은은하게 핑크빛이 도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이미지와 어울리는 귀여운 원피스는 조명에 따라서 굴곡을 만들며 반짝거렸다.

“예쁘네.”

“고마워, 언니.”

인하가 바라는 대로 영화는 다정한 가족을 흉내 냈다.

“이제, 우리 선우만 오면 될 텐데. 이런 애가 아닌데 늦네요.”

“아닙니다. 사돈. 사업하는 사람 시간약속 지키기 어려운 거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도 이런 날까지 늦는 건 예의가 아닌데. 부끄럽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선우가 들어왔다.

슈트 차림에도 가려지지 않는 단단한 가슴과 넓은 어깨, 조각상을 세워 놓은 것처럼 얼굴의 대칭이 완벽한 남자였다.

지독하게 오만한 표정은 상대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무슨 일이니? 연락이라도 하고 늦든가. 어른들 모셔놓고 행동이 그게 뭐야?”

선우는 그의 어머니인 황 여사의 말에 피식 웃었다.

“죄송합니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건가요?”

“아니, 저 녀석이!”

황 여사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지독하게도 무례한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도 그랬다.

지독하게 강압적인 시선을 보냈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열기는 두렵고 황홀했다.

영화는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선 양가 가족들이 다 모였으니 예물 교환부터 하죠. 아무리 간소화로 진행하는 약혼식이라고 해도 절차는 밟아야 하니 말입니다.”

선우의 아버지인 강석훈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뭐냐?”

선우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인하에게 닿았다.

인하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인하의 부모님들을 지나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영화였다.

“반려로 살아가게 될 여자와의 약혼식 아닙니까. 비록 이혼이 많아지는 추세라지만 말이죠.”

약혼식을 하는 날 이혼 운운하는 남자라니.

영화는 고개를 숙여 비웃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내를 바꿔야겠습니다.”

이내 프라이빗 룸은 정적에 휩싸였다.

“뭐라고?”

강 회장은 소리를 질렀고, 황 여사는 놀란 눈을 하고 이마를 짚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 가장 놀란 것은 인하였다.

토끼처럼 커다란 눈이 바닥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인하 씨가 아니라 지영화 씨로요.”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 자리의 누구도 쉽사리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니?”

강 회장은 기가 찬다는 듯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약혼의 상대를 인하 씨가 아니라 영화 씨로 바꾸겠다는 말입니다.”

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이블을 탕 소리가 나도록 쳤다.

“이 자식이! 약혼이 장난이야!”

기어이 참지 못한 분노가 터진 것이다.

“장난이 아니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평생 처형으로 모시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신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한숨.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영화도 두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이 아니라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잘못 걸렸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막 나가는 스타일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분명 실수고, 오산이었다.

저런 미친놈을 건드린 것은 말이다.

***

그날 영화는 의도적으로 선우가 자주 들르는 강남의 바를 찾았다.

이미 그의 얼굴과 성향까지 다 파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그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목표물을 확인한 영화는 그를 향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있는 그는 흥겹게 술과 노래에 취해 있었다.

“선우, 너 약혼한다며?”

으레 재벌가의 결혼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쉽게 들통이 나는 법이었다. 선우의 약혼 소식은 당사자보다 주변 인물들이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 부모님이 바라니 하긴 해야지. 내키진 않지만.”

“지강석 총장의 딸이라며?”

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그 집에 딸이 두 명 있던가?”

“에이, 지 총장의 친딸은 하나고, 나머지 한 명은 업둥이지. 유명하잖아.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고. 공식적으로 수양딸?”

“야, 더한 소문도 있어.”

선우의 친구들은 낯 뜨거운 가십에 열을 올렸다. 처가가 될 집안의 이야기임에도 선우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영화는 그의 쓰레기 같은 태도에 미소까지 지어졌다.

“더한 소문? 그게 뭔데?”

“사실은 그 딸이 지 총장의 이거라는 소문이지.”

남자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이 높은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우. 더러워.”

“더럽긴, 남자들은 다 똑같거든. 예쁘고 어린 여자 싫다는 남자 없다.”

바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비트의 음악이 사라지고 잔잔한 재즈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 바람 좀 쐬고 오련다.”

그리고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어디가?”

선우는 자신을 부르는 친구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영화는 움직이는 선우를 향했던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계속 뒤를 쫓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거북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아앗!”

손에 들고 있는 잔이 선우와 부딪히며 두 사람의 옷 위로 칵테일이 잔뜩 흘러넘쳤다.

“이런, 괜찮으세요?”

영화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기는 한데, 옷이 망가져 버렸네요.”

영화는 선우를 향해서 야릇한 시선을 보냈다. 바의 조명도 들려오는 노래도 모든 것이 적당하게 음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분위기에 더불어 영화는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의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 분명히 느꼈다.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었다. 단순히 사람 대 사람이 아닌 이성을 바라보는 느낌을 말이다.

“이대로 입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영화의 손이 선우의 재킷 위로 흐르는 칵테일을 털었다.

선우는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영화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군요.”

“옷이 망가졌어요.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아요.”

선우는 건강한 남자였다.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하기도 했다. 그러니 여자가 보내는 시그널을 모를 수 없었다.

영화는 다분하게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이대로 이곳에 있기는 힘들겠군요.”

“그렇겠죠?”

그는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여자가 보내는 시그널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실행해 옮기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니.

그리고 그의 팽팽한 활시위를 당기는 일은 영화가 했다.

“나갈까요?”

“하아-.”

선우의 입술이 벌어지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본능에 몸을 맡긴 짐승처럼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 벌어질 혼란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 같은 일일 것이다. 선우의 얼굴은 그런 기대감에 열이 오른 듯 붉어 보였다.

“그러죠. 나갑시다.”

분위기도, 두 사람이 눈빛으로 나눈 대화까지도 완벽했던 밤이었다.

***

약혼식은 엉망으로 끝나 버렸다.

그 자리에서 혼인의 당사자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니 서둘러 정리를 한 것이다.

“야, 너 돌았어!”

인하는 영화를 향해서 욕설을 내뱉었다.

“아얏!”

그리고 양손으로 영화의 머리를 쥐고는 흔들기 시작했다.

“인하, 그 손 못 놔.”

그나마도 인하를 말린 것은 강석이었다.

엄마라고 불리는 하재희는 그 상황을 보고서도 관망하고 있었다.

“이제 어쩔 거야? 내 결혼 어떻게 할 거냐고!”

인하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영화로 다시 약혼식 진행해야지.”

강석의 말에 인하가 멍한 눈을 들어 올렸다.

“아빠!”

“당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동생이랑 약혼까지 하려던 남자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강석의 말에 재희가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지금 어쩌자고? 우리 대학으로 강 회장이 보내는 연구비와 후원금만 얼만지나 알아? 그걸 포기해?”

인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석의 앞으로 갔다.

“싫어. 절대 싫어.”

인하가 악에 받쳐서 말했다.

“지금 약혼이 파투 난 것도 억울한데 저런 X한테 뺏기라고? 차라리 그냥 할게. 내가 결혼한다고. 그냥 한번 갖고 논거겠지. 저렇게 몸이나 막 굴리는 X이 몸으로 덤비는데 어느 남자가 안 넘어가? 저딴 싸구려가 탐이 나서 그랬겠어? 난 상관없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화는 웃음이 났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목매다는 그 남자가 나를 얼마나 찾아 댔는지 너는 알 리 없겠지.

‘약혼하고, 결혼도 이왕이면 해. 그러고 나서도 나는 선우를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영화는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살을 씹힌 것인지 입 안에서는 피 맛이 났다.

그러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사이다라도 마신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지금껏 자신이 받아왔던 수모가 고작 이런 걸로 시원해질 일이었다면 진작 이렇게 할걸. 그런 생각도 들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네가 한다고 해도 그 집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봐야 하고. 우선 내가 강 회장님부터 만나볼 테니 잠자코 있어.”

강석의 말에 인하가 화가 난 듯 눈을 흘기며 글썽였다.

그리고 방으로 가기 위해서 몸을 돌렸다.

“더러워 진짜.”

인하가 영화를 향해서 욕설을 뱉었다. 어깨를 치며 지나자, 다리에 힘이 풀린 영화는 휘청였다.

‘얼마든지 해. 더 처절하게 갚아줄 테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따라 들어와라.”

영화의 생각을 끊은 것은 강석이었다.

“네.”

당연히 부르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딸을 그런 자리에서 능욕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강석은 영화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너 돌았어?”

“아니요. 아주 멀쩡해요.”

“멀쩡한 X이 그렇게 몸을 굴리고 다녀? 그것도 상대가 누군지나 알고 그따위 짓을 해?”

강석의 눈이 돌아 있었다. 그런 눈을 보니 영화는 웃음이 나왔다.

“소리 지를까요?”

“뭐라고?”

“당신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인지 다 불어 버리기 전에 입 닥치라고요.”

강석이 당황하며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