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구겨진 삶
제 2화. 구겨진 삶
전쟁 같은 주말이 지나고 영화는 출근했다.
주말 내내 인하는 영화를 보며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는 통에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도 못했다.
종일 굶은 채로 출근하는 길에 겨우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할 정도였다.
하긴, 그런 상황이라면 착한 사람도 화를 낼 텐데. 인하는 더하면 더했지.
영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날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로 두꺼운 서류철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서류에 시선을 옮겼던 영화가 고개를 들자, 디자인실 인하의 얼굴이 보였다.
다소 수척해진 얼굴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컬러 복사. 지난번처럼 작업지시서 내용 잘라먹지 않도록 똑바로 해.”
영화는 서류철을 모니터 앞으로 끌어와 펼쳤다.
A4 용지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작업지시서에는 심플하게 그려진 여성복 그림 위에 여러 장식이 덧붙여져 있었다.
“포스트잇으로 겹친 내용은 어떻게 할까?”
영화는 공간이 부족해서 차마 다 적지 못한 내용을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은 종이를 떼었다가 붙였다.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해? 그런 건 사무 보조를 하는 네 몫이잖아. 복사해서 붙이든가, 아니면 직접 쓰든가. 고작 이런 업무도 내가 지시해?”
“그래…… 알았다.”
영화는 귀찮다는 듯이 서류를 덮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여기는 사무실이야. 호칭 정확히 해줘. 팀장님! 이라고. 알았어?”
인하가 휙 돌아서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영화는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래,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떨어져 내릴 때 더욱 아픈 법이지.
목덜미까지 달아오른 열을 식혀 내렸다. 노골적인 무시에 달아오른 붉은 기운이 서서히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다가 사라졌다.
영화는 유앤아이 패션의 디자인실 사무보조로 일하기 시작한 지 칠 년이 넘어가고 되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를 한 덕분에 경력은 차고 넘쳤지만, 진급은 어려웠다.
게다가 삼 년 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팀장으로 들어온 동생, 지인하는 대놓고 영화를 무시했다.
동생이라고 해봤자 영화와 인하는 동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앤아이에서는 그 둘을 누구도 자매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뭐, 자매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영화도 그랬지만.
영화에게 인정할 수 있는 언니는 단 한 명뿐이었다.
상화 언니.
꽃처럼 예뻤던 내 언니.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고 있을 즈음 전화가 걸려 왔다.
평상시에는 휴대전화를 켜놓은 경우가 없었다. 연락이 올 친구도 없었다. 다만 회사에서는 자리 번호를 휴대전화로 연결해 놓아야 했다.
업무의 대부분은 서류 전달과 복사, 그리고 신상품이 나올 시기에 해야 하는 피팅이었다.
그러니 휴대전화가 필수였다.
“네.”
-출근했어?
선우였다.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은 없었지만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주말 내내 걸어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네. 했어요.”
-점심때 나와. 회사 앞에서 기다리지.
막무가내.
독단, 독선, 독재.
선우를 떠올리면 그런 단어들만 줄기차게 생각났다.
필요한 인물이지만 위험하기도 한 인물.
어쩐지 선우는 첫 만남에서부터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지독하게 갑의 입장에서 살아온 인물이 보이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했다.
“월요일이라 일이 바빠요.”
-하아.
낮은 한숨이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보조도 일인가? 시다바리 일 관두게 해줄까?
참을성이 없었다면 그 순간에 욕을 뱉었을 것 같았다.
비록 그런 일이었지만 영화는 회사가 좋았다. 적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인하가 행동을 조심하기도 했고, 그 일은 영화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
언니와의 꿈.
“영화야, 이 옷 어때?”
상화는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일을 하면서 공부해야 했기에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에 갔다.
패션의류학과. 늘 꿈꿔오던 일에 한발 다가가선 상화는 보는 것만으로 예뻤다.
“와. 특이하다.”
동대문과 재래시장을 돌며 상화는 값싼 옷을 사서 입었다. 하지만 눈썰미가 좋으니 아무리 싼 옷이라도 상화가 입으면 명품처럼 보였다.
“그렇지? 오늘 완전 득템했어. 너도 주말에 친구들 만날 때 입어. 알았지?”
자신보다 동생을 더 위하던 상화. 언제나 좋은 것은 영화가 먼저였다.
그러니 영화는 비록 연필 한번 잡아 볼 수 없는 위치라고 해도 일을 열심히 했다.
그렇게라도 일을 하고 있을 때면 언니와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나갈게요. 어디로 갈까요?”
-진작 그렇게 나오지. 정각에 로비 앞. 정거장 뒤편으로 차 세워 놓을게. 늦지 말고 와. 기다리는 거 딱 질색이거든.
“알았어요.”
꽤 잘 짜인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독하게 오만한 남자는 그 계획에 없었다.
아니, 그런 쓰레기니, 작업에 걸려 온 것이겠지만.
영화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생각하며 인하가 그려온 작업지시서를 들고 복사기 앞으로 향했다.
포스트잇을 다 떼어버리니 가을 신상품으로 만들어진 원피스가 그려져 있었다.
“아. 이 X이 또…….”
영화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바짝 물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연습장에 그려 놓았던 원피스와 거의 흡사한 옷이 그려져 있었다.
플라워 프린트를 아랫단으로 늘어져 언뜻 보기에 한복의 모습처럼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티브까지 똑같았다.
“쌍……. X이 말이야.”
이제는 기가 차지도 않는 듯이 욕설만 나왔다.
***
영화가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오니 선우가 말한 장소에는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고급 외제 승용차는 선팅이 다소 짙은 컬러로 되어 있었다.
차량의 창문을 두드리자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시간 맞춰 왔네.”
“기다리는 거 싫어하신다면서요.”
“우선 타.”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영화가 보조석에 올랐다.
“배고파?”
주말을 지나고 먹은 거라곤 거의 없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리 없었다.
“조금요.”
“룸서비스 시키자. 내가 좀 급해서.”
노골적인 말에 영화가 눈을 흘기며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요?”
치렁한 머리를 바짝 올려 묶은 영화의 얼굴은 유독 작아 보였다.
“맞은 건가?”
영화가 오른쪽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약혼식을 망치고 들어와서 인하와의 다툼에서 생긴 멍이었다.
당시엔 아프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검푸른 멍이 생겼다.
진한 화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침에 했던 화장도 밀려나면서 멍이 드러난 것이다.
“누구 덕분이죠. 그런 자리에서 그 난리를 피운 게 누군데요.”
하지만 영화도 지지 않고 말했다.
“뭐, 좋은 상황을 만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족 간에 손을 올리기도 하나? 그건 좀 이해가 안 가네.”
물론, 정상적인 가족이라면 선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시잖아요. 그 집에서 내가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건.”
“맞고 지내?”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질문인가.
이런 질문을 이렇게 쉽게 하는 사람도 있긴 하구나.
“답해야 하나요?”
“그거 알아?”
“뭐요?”
“지금까지 당신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거. 내 질문에 답을 한 적도 없고, 누군지 말하지도 않았고, 왜 이런 짓을 벌인지도 나는 몰라.”
그럴 작정이 아니었으니까. 선우가 자신을 찾아낸 것도, 이렇게 집착을 보일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영화의 계획은 인하가 무사히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자신과 불륜을 저지르는 선우를 알게 되는 것.
처참하게 망가지는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실수였어요. 당신이 인하의 약혼자인 줄 몰랐죠.”
“그래?”
운전하다가 잠시 신호에서 멈춘 선우가 싸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그러니 인하랑 다시 약혼하세요.”
그래야 자신이 다시 선우를 유혹하는 의미가 생길 테니.
“네가 뭔데?”
“네?”
선우는 비웃음을 던지고는 다시 출발했다.
회사에서 가까운 호텔에 도착한 그는 거침없이 예약한 룸 앞으로 걸었다.
카드키를 대니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영화를 막아선 것은 선우였다.
“선택해.”
“네? 뭐를요.”
“지금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난 너한테 이용당해 줄 용의가 있어.”
선우의 미소가 잔인했다.
“되돌아가도 좋아. 하지만 그때는 난 너의 장단에 맞춰줄 용의가 없어.”
머리가 나쁜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영화가 그를 이용하려고 접근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했겠지.
“왜죠?”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문이 열리며 선우는 큰 키로 영화의 머리를 감싸고는 흐르듯이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달아오른 그의 목덜미가 붉고 뜨겁게 느껴졌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짐승처럼 울렸다.
“제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걸 알았다는 건가요?”
귀찮다는 듯이 남자다운 손가락이 영화의 입술을 막아왔다.
“물론.”
“어떻게요?”
하지만 그 사이로 영화는 궁금한 질문들을 던졌다.
얇은 티셔츠를 밀어 올리던 선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맑은 갈색의 눈동자가 가늘게 늘려 떠졌다.
“너 나 처음이잖아?”
“아.”
“그렇게 유혹하는 여자가 밤새도록 떠는데 누가 몰라?”
오만함을 넘어선 독선. 상대를 가지고 노는 우월함.
“나도 너 좀 이용하려고. 마음에 들었거든. 네 몸.”
그의 손안에서 흔들리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 같았다.
혼미하게 미끄러지는 숨결이 익숙한 손놀림에 당황했다.
“인하와 약혼하세요.”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뭐?”
“약혼해요. 인하와.”
선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으로 웃었다.
“그래.”
구겨진 옷더미 위에서 영화의 삶이 그렇게 구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