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제 3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선우가 선을 보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던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선우에게 결혼은 급하다거나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찮은 과정이니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지강석 총장은 딸을 내세워 자신의 회사인 유앤아이 패션을 키울 목적으로 선을 본 것이고, 자신은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결혼이라도 시키려는 부모님에게 등을 떠밀린 것뿐이다.
“선우야?”
서른다섯.
많은 나이라고, 생각지 않았지만, 부모는 다른 모양이었다.
주말 아침 거실 소파에 누워서 태블릿으로 뉴스를 보던 선우에게 황 여사는 어려운 말이라도 하려는 듯이 다가왔다.
“왜요?”
황 여사는 선우의 앞으로 참하고 귀여운 여자의 사진을 내밀었다.
“어떠니? 예쁘지?”
선우는 한숨부터 내뱉었고, 황 여사는 그 숨에 눈치를 살폈다.
“몇 살이에요?”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 결혼해버리면 더 이상 이 일로 귀찮지는 않겠지.
몇 살이냐는 질문에 황 여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관심이라도 있다는 줄 아셨을 테다.
단순히 너무 어려 보이기에 물은 건데.
“지강석 총장님의 딸이야. 지인하라고. 스물여덟이다.”
“아아. 좀 더 어려 보였는데.”
이십 대 초반을 생각했다.
뽀얀 피부도 그렇고, 젖살도 빠지지 않은 듯 보이는 앳된 얼굴이 더 그랬다.
그리고 나이가 어리다면 그 핑계로 거절을 할 생각도 있었다.
“언제 볼까요?”
“날 잡아 볼까?”
“예식장도 잡으세요. 선보면서 프러포즈도 해버리게.”
선우는 황 여사를 향해서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길로 황 여사는 날을 잡았고, 선우는 더케이 유통의 총무팀에서 근무하는 친구 재석에게 인하에 대해서 조사를 부탁했다.
결혼할 여잔데 어떤지는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강석 총장에게 딸이 둘이 있어. 네가 만날 여자는 차녀. 지인하. 지금 유앤아이 패션이 자금 사정이 좋지 않네. 뭐, 너희 쪽으로 선을 넣은 이유는 보인다. 너희 아버지께서 한국대에 장학금도 넉넉히 주시잖냐.”
재석은 선우에게 가볍게 내용을 읊었다.
“차녀? 장녀가 아니고? 왜? 첫째는 결혼했나?”
재석이 손을 들어 자기 턱을 쓸었다.
“그게 장녀는 친딸이 아니야. 법적으로 남이지. 수양딸. 그래도 더케이 유통에 선을 보는데 수양딸로 보낼 수는 없지 않냐.”
재석을 향해서 선우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듯하신 분들이네. 남의 자식도 다 키워 주시고.”
“비아냥거리지 말고. 지강석 총장 인품은 이쪽에서 소문이 자자해. 너 괜히 가서 더케이 먹칠하지 말고 와.”
그렇게 나간 선이었다.
실제로 인하는 참하고 바르게 보였다.
갓 대학을 졸업한 것처럼 앳된 인상. 풋풋한 웃음을 가진 여자.
가볍게 미소 짓던 얼굴도 조용한 몸가짐도 나쁘지 않았다.
“결혼합시다.”
물론, 그 과정이 귀찮았던 선우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은 채로 대뜸 그렇게 말했다.
“네?”
“그러려고 나온 자리 아닙니까?”
“아니, 그렇기는 하지만. 갑자기 그러시면 당황스러워서요.”
인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뭐, 선우는 그 모습이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합의된 걸로 알고 일어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이제 방황하는 삶도 끝인가? 더 이상 엉망으로 살기는 글렀나? 아직 덜 논 거 같은데.
그 순간에 호텔 카페를 나오며 그런 생각을 좀 한 것도 같았다.
오히려 엉망진창이었던 그 시절보다 더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이유가 다른 사람도 아니라 약혼 상대의 언니라니.
아니, 수양딸이니 언니라고 하면 안 되나?
어쨌든 그 사람의 언니라는 사실은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던 선우에게도 충격이었다.
***
하지만 영화는 뜨거운 밤을 치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선우는 알지 못했다.
아직도 선우의 온몸에는 그녀의 흔적이 남아서 움직일 때마다 저릿한 느낌을 주는데.
없어졌다.
그 사실이 꼭 희롱이라도 당한 것처럼 사람을 돌게 했다.
‘뭐지?’
그저 하룻밤의 사고라고 치부하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았다.
바에서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 느껴지던 위태로움이었다. 유혹을 하는 영화에게서 보이던 불안함과 간절함. 절벽에 서 있는 여자가 구해 달라며 손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여자는 대체 뭘까?’
그 궁금증과 불안함이 영화의 손을 잡게 했다.
게다가 영화의 행동은 이후에도 선우에게 궁금증만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유혹을 당한 건 선우 쪽인데 영화는 그 상황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어깨를 짚은 손에서는 그녀의 떨림이 전해졌다. 두려움, 긴장도 느껴졌다.
어색한 동작과 눈빛으로 남자가 없었음을 말하면서도 농익은 여자를 처절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하마터면 여자를 향해서 대놓고 바라는 게 뭐냐고 질문을 던질 뻔했다.
그게 얼마나 또 웃기던지.
슬랩스틱 개그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던 하룻밤을 영화에게 선사했다.
그런데 사라져 버렸지.
아침에 눈을 뜨니 신기루처럼 여자는 없었다.
텅 빈 침대의 옆자리가 시렸다. 심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욱신거릴 정도였다. 화가 나다가도 웃음이 터졌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쥔 것인지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생겼다.
이럴 줄 알았다면 누군지부터 물었어야 하나?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하. 돌아버리는 줄 알았지. 여자를 만났던 바에 찾아가 다시 영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곳은 선우와 친구들이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다. 그러니 그날 출근을 했던 직원을 찾아 지난 CCTV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선우는 정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영화를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아- 이분이요.”
“알아? 얘 누군데?”
“모르죠. 저희도 이런 분들이 자주 와줘야 장사가 되니 명함이라도 받으려고 몇 명이나 보냈는데 못 받았어요. 서비스도 싫다고 하고, 어찌나 도도하던지.”
“아는 거 뭐 없어?”
“없죠. 이날 처음 온 손님인데.”
선우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뭐냐, 이 여자.”
그렇게 여자를 찾을 방법은 사라졌다. 덕분에 미친놈이라도 된 것처럼 헤맸지. 어디 여자가 그뿐이야 싶은 마음으로 다녔지만 진짜 그 여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스치며 느껴지던 전율과 함께 숨결, 목소리, 흔들리는 속눈썹 하나까지 모두 떠올랐다.
더 미치겠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기억은 또렷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미쳐버리기 딱 하루 전.
아마, 한 달이 지날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바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안녕하세요.”
하.
꼭, 어제 만나고 오늘 만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 왔다.
“하- 미치겠네, 뭐 이렇게 당당해.”
여자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선우를 비웃었다.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건가요?”
당돌하기는 국가대표로 금메달 가져가시고. 선우는 영화를 보는 순간에 온몸이 예민해지는 것만 같았다.
견딜 수 없었고,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지체할 수 없었다.
선우는 인하의 손목을 잡고는 바에서 뛰쳐나갔다.
“이게 뭐 하시는 거예요?”
“한마디만 더 해.”
멈춰 선 선우의 눈빛은 거의 반쯤 돌아 있었다.
“네?”
하지만 영화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나 지금 딱 돌기 직전이거든. 그냥 조용히 따라올래?”
알아야 했다.
그녀가 누군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그리고 왜 이제야 다시 나타난 것인지 말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물음표였던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뭐, 협박이나 다름없긴 했다. 문제는 그런 협박이 그 여자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렇지.
“아. 그런 거예요. 말씀하시지. 어디로 갈 건데요?”
싸구려 클러치.
그럼에도 여자와 잘 어울리는 컬러와 분위기였다. 역시나 브랜드는 없는 원피스. 어울리지는 않았음에도 적당하게 상대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히 노골적인 옷이었다.
“하. 진짜 재미있네. 너 사람 갖고 노는 게 취미야?”
선우는 적당하게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지난번처럼은 안 된다. 다시 놓치게 된다면 그때는 진짜 미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두 번째 날이 지났다.
선우는 두 번째 만남에서 영화가 자신이 약혼을 하기로 한 인하의 언니, 지강석 총장의 수양딸인 ‘지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강선우라는 것을 모르고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영화가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을 했다는 뜻이 된다.
말해주지 않으니 그녀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는 영화를 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결혼은 인하가 아닌 영화와 해야 맞는 것이겠지.
그렇게 선우는 약혼식이 있던 날 인하가 아닌 영화와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
룸서비스로 들어온 식사를 영화는 맛있게 먹었다. 고급 호텔의 식사니 맛도 당연히 좋았다.
“잘 먹네.”
선우는 여전히 불쾌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에 날이 서 있었다.
하긴 자신이라도 기분이 좋을 리 없지.
확신은 없었다. 선우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올 것이라고는.
그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사고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가장 완벽한 것은 그의 아이를 갖는 일. 강석과 인하를 지옥으로 끌어 내리면 아이와 함께 떠날 작정이었다.
“맛있네요.”
“왜 한 달 만에 다시 찾아온 거지?”
선우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영화의 배는 충분히 빵빵한데도 입맛이 돌았다. 그러니 선우의 음식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냥요.”
이미지랄 것도 없지만 영화는 입술을 닦으며 아쉬운 식사를 끝내야 했다.
“진짜 아무것도 말을 안 해주네.”
위험한 날만 잡아서 찾아온 거라고 어떻게 말을 해. 영화는 선우의 시선을 피했다.
선우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제 앞에 접시를 영화의 앞으로 놓았다.
“더 먹어.”
“네에?”
“많이 먹어서 살 좀 찌워. 할 때 아파.”
영화는 눈을 찡그렸다.
“뭐라고요?”
“나 마른 여자 취향 아니야. 그러니까 살 좀 찌우라고.”
불쾌한데 핏기가 가득한 고기는 참 탐스럽게 맛있어 보였다.
그러니 죽을 결심을 하면서도 배가 고프단 생각을 했던 거겠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어쩌면 어른들 말은 틀린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숨길 것도 없는 사이에 뭘 따지냐.
영화는 포크를 들어 고기를 찔렀다.
그 모습을 보고 선우가 피식 웃었다.
“오늘 가서 말하지. 인하랑 약혼 다시 진행하겠다고.”
“네.”
“단, 너도 약속해.”
“뭐를요?”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그 장단에 맞춰주면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않겠다고.”
영화가 숨는다고 한들 선우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선우의 제안은 영화 스스로 선우에게 붙어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게요.”
건방지고, 무례한데. 영화는 그의 태도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 모습이 귀엽게까지도 보이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됐다.
적어도 화가 나는 상황에도 선우는 잘 참았다.
그가 다시 두 눈을 감고는 한숨을 뱉어냈다.
“너 근데 괜찮냐?”
영화의 붉은 입술 사이에는 포크가 물려 있었다.
“뭐가요?”
그 이상한 포즈에도 퍽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선우는 외면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인하랑 약혼해도 상관없냐고?”
영화 자신이 하라고 했던 일이다. 이상할 게 없지.
“네.”
영화는 짧게 대답했다.
“하아.”
선우의 입에서 긴 숨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열 받네. 진짜.”
영화는 휴대전화를 터치해서 점심시간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