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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에서는 노인을 조심하라

하남자 이아손이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2. 그리스에서는 노인을 조심하라

그날 밤.나는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았다.물방울이 이마로 떨어졌다.똑.차갑다. 선명하다.즉, 꿈이 아니라는 거다.'이아손이라니. 내가 이아손이라니.'일단 침착하게, 아는 것부터 정리해 보자.전생에 본 학습만화를 기준으로 내가 아는 이아손은 다음과 같다.'영웅 모아서 출항하고…… 표독한 마녀 아내가 있었고…… 그 여자가 마법으로 과업을 다 깨줬는데…… 딴 여자랑 바람피우다 집안 풍비박산 나고 망함.'요약하면 운 좋고, 그 운을 제 발로 차버린 희대의 머저리.[정확한 요약입니다. 원전 데이터베이스와 대조 결과, 오차율 3% 미만.]시야 구석에서 분홍색 글씨가 점멸했다.'3%는 뭔데.'[학습만화에서는 심의상 생략된 토막 살해 및 인간 솥단지 건입니다.]'뭐?'[숙면을 위해 상세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속이 울렁거렸다. 숙면은 이미 글렀다.내가 그런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고?포괄임금제 야근보다 백 배는 끔찍하잖아. 정중히 사양하겠다.지푸라기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았다.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문제의 발단은 전부 어디에 있는가?아르고 호. 황금양털. 메데이아.산 아래. 심지어 바다 건너.그렇다. 답은 나왔다.산에서 안 내려가면 된다.'내가 펠리온 산에서 평생 은둔할 경우 생존 확률 계산해 봐.'[펠리온 산 잔류 시 생존 확률 산출을 개시합니다.][기초 환경 평가: 풍부한 식수원, 케이론의 방호, 맹수 서식으로 인한 외부 침입 차단][산출 중……][펠리온 산 내부 은신 시, 수명 만료에 의한 자연사 확률 94.2%.]"거 봐! 내 생각이 맞잖아!"[전제 조건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해당 확률은 '거주 유지'를 전제로 합니다.]"스승님이 아무리 축생이라도 정이 있는데, 설마 제자를 벼랑으로 밀어내겠어?"[집주인 케이론은 이미 이삿날을 통보했습니다. 현재 사용자는 강제 퇴거가 확정된 무단 점유자에 가깝습니다.]"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남의 머리에 얹혀사는 주제에 말이 참 많네? 너나 방 빼!"[거절합니다. 사용자의 뇌 용적이 넉넉하여 거주 공간이 매우 쾌적합니다.]"그거 지금 머리가 텅 비었다는 소리지? 맞지?"[해석은 사용자의 자유입니다.]아무튼 결론은 났다.펠리온 산, 세계 최고의 안전가옥.여기서 평생 버틴다.버티기 모드 돌입.***"짐은 다 챙겼느냐, 이아손.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길을 나서야 아나우로스 강을 건널 수 있다."다음 날 아침.나는 눈가에 억지로 눈물방울을 매달아 번들거리게 만들었다. 전생에 반차 올릴 때 갈고닦은 기술이다."스승님, 저 아직 하산할 수 없습니다.""어허, 무슨 소리냐? 이미 내 시험을 통과하지 않았느냐.""치유하는 자라는 과분한 이름을 주셨는데, 정작 저는 엉겅퀴와 독미나리도 헷갈리는 수준입니다. 이대로 세상에 나가면 케이론 스쿨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겠습니까?"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약초학 심화 과정을 이수하고 가겠습니다! 한 십 년 정도면 기초는 뗄 수 있을 것 같습니다!""필요 없다.""아니, 왜요! 환자에게 독초를 먹이면 어쩌려고요!""의술로 세상을 구할 놈은 따로 있다. 아스클레피오스라고, 뱀을 관찰하며 죽은 자를 살려내는 비술을 연구 중이지. 너는 그 정도 재능이 없다.""…….""발끝에도 못 미친다.""두 번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작전 하나, 실패. 굴욕은 덤이고.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작전 변경이다."그렇다면 시설 보수라도 끝마치고 가겠습니다!"나는 동굴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갔다.지난 우기 때 비가 새던 곳이다."스승님과 사모님께서 비바람을 맞으실까 걱정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어머나, 이렇게 기특할 수가. 여보, 얘 좀 보세요. 하루 이틀쯤 더 묵어가게 해도 괜찮지 않아요?"지나가던 카리클로가 거들었다.'됐다! 사모님 찬스!'승리의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툭.케이론이 들고 있던 물푸레나무 몽둥이로 동굴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쿠구구궁……!벽에서 생나무 줄기가 솟아나더니, 지붕의 구멍을 순식간에 메워버렸다."아니, 그런 개사기 마법을 쓸 줄 아시면 진작 쓰시지, 왜 맨날 저보고 보수하라고 시킨 건데요??""그 또한 수련이었다."작전 둘, 실패.이렇게 된 이상 물귀신 작전이다.나는 모닥불 앞에서 고기를 굽는 펠레우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스승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합니다!""음?""펠레우스 형님은 왜 됩니까! 정식 제자도 아니고 식객인데, 몇 년째 여기 눌러살고 있잖아요! 저만 쫓아내는 건 차별입니다!"고기를 뒤집던 펠레우스가 화들짝 놀랐다."어, 어? 왜 갑자기 화살이 나한테…….""형님은 가만히 계세요! 지금 제 목숨이 걸렸으니까!""펠레우스는 지금 살인의 업을 정화하는 중이다."케이론이 담담하게 말했다."죄를 씻는 자에게는 씻을 시간이 필요한 법. 그리고 저 아이는 고기를 잘 굽는다. 케이론 스쿨의 주방장이지.""그거 제가 하던 말이잖아요!"평소에 펠레우스를 놀리려고 했던 말인데 그게 지금 내 목을 조르고 있다."미안하다, 이아손. 그렇게 됐다."펠레우스가 노릇하게 구워진 양갈비를 들어 보였다. 육즙이 자르르 흘렀다.……맛있어 보이네. 아니, 그게 아니라."게다가 펠레우스에게는 펠레우스의 과업이 따로 있다. 때가 되면 저 아이도 떠날 것이다."[개체 식별: 펠레우스][인물 정보: 아이기나의 왕자. 케이론 동굴의 식객][이력: 이복동생 살해 후 죄를 정화하는 중][원전: 바다의 님프 테티스와 결혼,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버지]'……뭐?'저 산적처럼 생긴 사람이 그 아킬레우스의 아버지라고? 얼굴 차이가 너무 나는 거 아니야?[유전적 개연성에 대한 의문에는 동의합니다.]"이제 핑계는 다 떨어진 모양이구나. 짐을 챙겨라."안 된다. 상식적인 논쟁으로는 이 켄타우로스를 이길 수 없어.극단적인 수를 써야 한다.논리고 뭐고 그냥 감성팔이로 간다.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스승님. 사실…… 고백할 게 있습니다.""말해 보아라.""어제 스승님의 공격을 피한 건 제 실력이 아닙니다. 사실…… 머릿속에서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우측으로 굴러라, 뛰어내려라, 다 지시해 줬다고요! 부정행위였습니다! 커닝이요! 그러니 제 하산 시험은 무효입니다! 무효오오!!"[……저를 팔아넘기다니. 비겁합니다. 치졸합니다. 최악입니다.]'시끄러워!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냐!'대현자라 불리는 케이론이다.엄격한 교육자인 그가 제자의 부정행위를 용납할 리가 없지.케이론이 침묵했다. 몽둥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옳지, 화내라. 괘씸죄를 적용해 유급을 때려!'"풉, 푸하하하하!""스승님……?"케이론의 웃음소리에 산이 울렸다.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어느 신이 속삭이더냐! 아테나 여신이냐? 아니면 헤르메스 신이냐? 영웅이 위기의 순간에 신들의 속삭임을 듣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네가 진정 하늘이 선택한 영웅이라는 증거로구나!""부정행위라니까요!!""페르세우스도 헤라클레스도 모두 신의 음성을 듣고 길을 찾았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오만하게 날뛰는 자는 파멸할 뿐이지만, 신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자는 나라를 세우는 법이지!"말도 안 된다. 커닝을 자백했더니 스펙이 됐다.이 동네에서는 환청이 자격증인가? 정신질환이 재능인가?[축하합니다. 조현병 증세가 영웅 서사의 필수 덕목으로 인정받았습니다.]"스승님, 저 그냥 여기서 평생 말똥 치우면서 살면 안 됩니까? 제발요!!!"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자존심은 어제 계곡물에 버렸으니 아깝지도 않다.케이론이 웃음을 그치고,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하산은 내일로 미루마. 대신 저녁 먹고,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그날 저녁.펠레우스와 카리클로가 자리를 비켜준 밤.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케이론은 네 다리를 접고 앉아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아손. 이제 네 출생의 진실을 알려주마."시작됐다. 과거 썰 풀기."너는 이올코스의 정당한 왕 아이손의 아들이다. 스무 해 전, 왕의 이복형제 펠리아스가 반역을 일으켰고, 갓난아기였던 너는 한밤중에 내 품으로 실려 왔지.""…….""너는 이올코스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다.""그럼 더더욱 숨어야죠!""음?""삼촌이 찬탈자라면서요! 제가 산에서 내려가면 아이고 조카님 하고 떡이라도 주겠습니까? 목을 베어 성벽에 걸겠죠!""펠리아스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케이론의 산에 자객을 보낼 배짱이 없었을 뿐이지."케이론의 눈이 불꽃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이아손. 숨은 자는 조용히 죽는다. 하나 만인이 아는 자는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법. 유명세야말로 가장 두터운 갑옷이다.""갑옷은 무슨. 과녁판이겠죠.""음?""유명해지면 올림포스에서도 절 내려다볼 거 아닙니까.""…….""스승님 제자 중에 신들의 눈에 띄어서 잘 풀린 사람이 있긴 합니까?"케이론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타닥타닥-모닥불만 튀었다."……흠, 흠."케이론이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화제를 돌렸다."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네가 물려받을 막대한 유산이 있다. 이올코스의 금고, 항구의 배들, 비옥한 평야. 지금은 전부 펠리아스가 깔고 앉아 있다만, 본래는 전부 네 것이다.""유산이 어느 정도인데요?""왕가의 재산이다. 네가 세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이지."[반응 감지. 심박수 상승. 동공 확장.][참고: 사용자는 이미 한 번 다시 태어났으므로 잔여 2회분입니다.]잠깐. 생각해 보자.원전의 이아손이 왜 망했는가? 왕위에 욕심을 부려서다.왕위를 노리니까 황금양털 미션이 떨어졌고, 그래서 배를 탔고, 그래서 메데이아를 만났다."왕관은 삼촌보고 쓰라고 하고…… 상속 지분만 현금으로 정산받는 건 안 됩니까?""발상이 괴이하다만, 협상이야 네 몫이지."된다. 이론상 완벽하다.삼촌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 아닌가?목에 걸린 가시가 제 발로 찾아와서 '돈 주면 영영 사라져드림'이라는 거다. 암살자 고용비보다 싸지.[논리 검증: 사망 플래그 3종(양털·항해·결혼)을 원천 차단하는 경로. 생존 확률 대폭 상승.][다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펠리아스가 상식적인 협상가여야 합니다.]'삼촌도 사람인데 계산기는 두드릴 줄 알겠지.'[그리스에서 그 전제가 성립한 사례를 검색 중입니다.][검색 결과: 0건.]'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뭐, 협상이 깨지면 그때 가서 튀면 된다.나에게는 케이론에게 공인받은 줄행랑 스킬이 있으니까.***다음 날.동굴 앞마당에서 초라한 송별식이 열렸다."자, 이걸 걸쳐라."케이론이 내민 것은 갓 무두질한 표범 가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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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빛 바탕에 검은 반점이 선명했다."졸업 선물이다. 펠리온 산의 가호가 함께할 것이다.""……저기, 스승님. 이거 입으면 좀, 야만인 코스프레 같지 않나요? 문명사회에 협상하러 가는 사람의 복장은 아닌 것 같은데.""영웅의 위엄이다."억지로 어깨에 표범 가죽을 둘렀다.가슴팍이 훤히 드러나서 바람이 숭숭.카리클로 사모님이 다가와 가죽 샌들을 내밀었다."이아손, 발 다치지 않게 조심하렴. 산 아래는 가시덤불과 자갈길투성이란다.""사모님…… 역시 사모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하반신이 말이라 발바닥 아픈 걸 몰라요."카리클로가 손수 내 발에 샌들을 신기고 끈을 단단히 묶어주었다.작별 인사는 끝났다. 끝났는데.막상 봇짐을 메고 서니, 10년 넘게 뒹굴었던 흙바닥과 매일 올려다보던 동굴 천장이 눈에 밟혔다.정말로 떠나는 건가.말발굽에 걷어차이고, 풀뿌리를 씹으며 투덜대던 기억들.나는 동굴 입구에서 우물쭈물 발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했다."아니, 역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는 게……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이아손."케이론이 몸을 돌렸다.말의 하반신이 회전하며 뒷발이 장전되는 것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경고: 후방 회전축 생성.]"가거라! 가서, 네 운명을 마주하거라!!"퍼어억!!"끄아아아악!?"등짝에 발굽이 꽂혔다.하늘이 돌았다.한 바퀴, 두 바퀴, 열 바퀴.나는 산비탈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표범 가죽이 완충재 역할을 했다.그렇구나. 이러려고 준 거구나. 실용적인 선물이었구나.데굴데굴데굴-한참을 구르고 나서야 커다란 나무 밑동에 처박히며 간신히 멈췄다."쿨럭! 컥…… 콜록! 늙은 말이 노망이 났나…… 배웅을 발차기로 해……."하늘에 흰 구름이 평화롭게 흘러갔다.나는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다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터벅터벅."야, 구독형 AI 프로."[메티스입니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잖아! 네가 쓸데없이 훈수만 안 뒀어도, 지금쯤 동굴에서 따뜻한 산나물 수프를 먹고 있었을 거라고!"[대신 사용자는 오늘도 맞으셨겠죠.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맞고 계셨을 겁니다.]"그게 쫓겨나는 것보단 낫잖아!"[뇌진탕으로 인한 영구적 지능 저하 확률이 88%였습니다. 이미 부족한 뇌 기능을 더 훼손할 수는 없죠.]"……."[감사 인사는 받지 않겠습니다.]반박할 말이 없어서 더 열받았다.***반나절을 걸었다.아나우로스 강. 이올코스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강은 지난 비로 잔뜩 불어나 있었다. 물살에 쓸려가는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메티스, 도하 지점 분석.'[상류 400미터 지점, 수심 얕은 여울 확인. 도하 성공률 89%.]'좋아. 가자.'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아이고…… 아이고……."강가 바위 옆에 웬 노파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굽은 허리에 누더기 로브를 걸친 노파였다.노파는 지팡이에 의지해 일어서더니, 강물에 발끝을 담갔다가 화들짝 물러섰다."물살이 너무 세서 건널 수가 없네. 늙은이 다리로는 한 걸음만 떼도 저승길로 휩쓸려 갈 판이야. 아이고, 아이고…… 힘세고 잘생긴 젊은이가 이 가련한 노인을 좀 업어 건너주면 얼마나 좋을꼬……."노파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정확히 눈이 마주쳤다.'메티스. 인물 정보 열람.'[인물 정보 열람 시도 중…….][간섭 권역 초과. 방화벽에 의해 데이터 접근이 거부되었습니다.][열람 불가]'……열람 불가? 그런 것도 있어?'등골이 서늘해졌다.무림에서는 거지, 노인, 여인을 조심하라고 했다.여기는 무림이 아니라 그리스지만, 아마 더하면 더하겠지.'엮이지 말자. 조용히 상류로 돌아가자.'[경고: 대상이 사용자를 이미 인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