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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둥서방 지망생

하남자 이아손이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3. 기둥서방 지망생

시선을 내리깔았다.강가의 조약돌이 둥글었다. 참 모난 데 없이 매끄럽네.하나, 둘, 셋, 넷.조약돌 개수를 세는 일은 언제나 평화로운 법이다."아이고……."곡소리가 귓전을 찔렀다.바람 소리라고 믿기로 했다. 강이 빚어내는 자연의 휘파람."요즘 것들은 어른을 보고도 본척만척이니. 늙은 게 죄지, 죄야……."여기는 그리스 월드.예의염치를 따지는 동방의 반도랑은 민도가 다르다.제 아비를 낫으로 거세하고 옥좌를 빼앗은 걸, 그 아들이 또 벼락으로 지져 쫓아내는 게 이 동네의 표준 규범이라고.패륜이 국가 공인 스포츠인 세계관에서 무슨 어른 공경을 바란단 말인가."저기요, 할머니.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좋은 하루 되세요!"빠른 걸음으로 도주 개시.'메티스, 아까 그 여울목. 상류 400미터.'[89% 확률로 도하 가능합니다. 현재 속도 유지 시 2분.]가쁜 숨을 내쉬며 상류에 도착했다. 수심이 얕고 바위가 드러난 지점이었다.그런데."왔누?"노파가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입이 떡 벌어졌다."어, 어떻게?""뭐가 어떻게여, 다리 달린 것들은 다 걸어 다니는 법이지.""방금 저 밑에 계셨잖아요! 제가 전력 질주로 왔는데 왜 먼저 와 계시는데요?""젊은 놈이 걸음이 굼뜨니 늙은이한테 앞질리지. 어른을 보고도 도망이나 치고. 쯧쯧, 아주 가정 교육을 마구간에서 받았나 보구나!""……."어떻게 알았지. 정곡을 찔렸다."아니, 그렇게 축지법 쓸 수 있으면 그냥 혼자서 건너시면 되잖아요!""무슨 소릴 하는 게냐! 이 불쌍한 늙은이더러 저 흙탕물에 빠져 죽으라는 소리냐?"노파의 눈가에 주름이 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아이고, 내가 더 살아서 무엇하리! 짐짝 취급이나 당하고! 늙은이가 주책맞게 목숨 부지해서 뭐 해!"노파가 그대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풍덩.급류가 노파의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몸이 휘청거리더니 중심을 잃고 하류로 휩쓸려 내려가기 시작했다."야, 아니, 할머니 미쳤어요!?"도망치자고, 엮이지 말자고 머리는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몸이 먼저 흙탕물로 뛰어들었다. 퇴근길에 지하철 선로로 떨어지는 취객을 보면 손을 뻗던, 그 소시민적 반사 신경이었다.첨벙!꼬꾸라지려는 노파의 누더기 뒷덜미를 낚아채 물 밖으로 끌어올렸다."잡았어요! 업히세요! 빨리!""오냐."방금까지 죽어가던 목소리가 아주 낭랑했다.노파를 거칠게 등 뒤로 둘러업었다.우두둑."컥! 할머니, 뭔 몸이 이렇게 무거워요!? 납덩어리 삼켰어요!?"겉보기엔 뼈마디만 앙상한 노인이었는데, 등에 얹히는 무게는 흡사 바위를 짊어진 것 같았다."젊은 놈이 엄살은. 어디, 단단히 업어 보거라."노파의 앙상한 팔이 내 목을 휘감았다."총각, 참으로 늠름하구먼. 골격이 제법이야. 장차 큰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아름다운 여인들을 전리품으로 잔뜩 거느릴 상이야. 영웅의 상이지.""숨넘어가겠는데 헛소리하지 마세요. 사람이 무슨 물건입니까? 전리품은 무슨……."등 뒤의 무게가 미세하게 늘었다."그럼 여인을 어찌 취한다는 말이냐?""취하긴 뭘 취해요! 물어봐야죠! 요즘 세상에 동의 안 받으면 큰일 나요!""동의?"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합의를 한단 말이냐?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겨 빼앗거나, 처녀를 납치해 씨를 뿌리는 것이 사내의 영광이거늘.""영광은 무슨! 그러다 고소당하지! 바로 직장 잘리고, 얼굴 팔리고, 인생 끝이라고요! 나중에 무죄 받아도 소용없어요! 허억, 허억……."발바닥에 날카로운 자갈이 밟혔다.중심을 잡으려 양팔로 노파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그럼 하나 더 묻자꾸나. 만약 지아비가 다른 계집을 탐해 궁전 뒤뜰에 숨겨두고 아이를 낳게 한다면, 본처는 그 숨겨둔 계집을 어찌 처단해야 하느냐? 찢어 죽여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그걸 왜 저한테 묻는데요??""답하거라."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물살은 거세고, 등은 무거워 죽겠는데, 지나가던 노인네가 뭔 부부 클리닉 상담을 요구하고 있다."속인 남편 놈이 백 퍼센트 쓰레기지! 딴 여자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남편 거시기를 낫으로 자르든가 하세요! 왜 애먼 사람을 잡아요!""뭐라?""그 여자가 유부남인 거 알고 꼬신 게 아니면, 그 여자 잘못은 아니잖아요?"전생에 막장 드라마를 볼 때마다 복장이 터지던 대목이었다. 바람피운 남편 놈은 쏙 빠지고 여자들끼리 머리채를 잡는 꼴이란."……."등 뒤가 조용해지고, 갑자기 무게감이 사라졌다."마지막으로 묻겠다. 만약 아내가 남편보다 훨씬 위대하여, 남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모든 것을 휘두르려 든다면 사내는 어찌해야 하느냐? 사내의 자존심을 짓밟는 요망한 계집을 어떻게 하겠느냐?""잘난 마누라가 있으면 모시고 살아야죠. 기둥서방,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크큭."꽈아아악!"오냐, 오냐!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노파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 목을 흔들어댔다."커헉…… 노망난…… 할망구…… 힘이……! 캑! 목, 목 졸려요……!"기도가 막혔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살기 위해 기를 쓰고 다리를 움직였다.이 미친 노인네 손에 목이 졸려 익사하는 꼴만은 면해야 했다.나는 열심히 바둥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강 한가운데. 가장 깊은 곳으로.쩍.진흙 바닥에 발이 깊게 박혔다.끌어올리려는데, 발목을 조이던 가죽 끈이 툭 끊어졌다.카리클로 사모님이 곱게 묶어준 샌들 한 짝이 강바닥 뻘 속으로 통째로 빨려 들어갔다."아! 내 신발!!"더듬거리며 발을 뻗어보았지만, 거센 물살이 진흙을 덮어버렸다.건져내려다간 그대로 뒤집혀 수장될 판이었다."아오, 새 신발인데……!"피눈물을 삼키며 맨발로 자갈을 디뎠다.반대편 강둑으로 기어 올라갔다.털썩!무릎을 꿇으며 노파를 바닥에 내려놓았다."콜록! 쿨럭…… 살았다……. 할머니, 그래도 무사히 건너서 다행이……네요……?"없다. 심지어 흙바닥에 젖은 자국조차 없었다."뭐야. 어디 갔어?"물에 젖은 꼴로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그냥 가? 이래서 사회가 삭막해지는 거야.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알아요, 아주. 내 샌들 물어내!!"[신격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데이터 수신 완료. 인물 정보를 출력합니다.]쥐 죽은 듯 잠잠했던 분홍색 텍스트가 쏟아져 나왔다.[개체 식별: 헤라][인물 정보: 올림포스의 왕비. 결혼과 가정의 여신][위협 등급: 신격 - 산정 대상 외]"……누구라고? 내가 방금 뭘 업고 강을 건넜다고?"[신들의 여왕 헤라입니다.][사용자가 방금 '남편 거시기를 낫으로 자르라'고 권유한 바람둥이 최고신의 정실부인이죠.][참고로 해당 발언은 영구 보존하겠습니다]학습만화의 페이지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나 소 되는 거야!?"[부정확합니다. 이오를 소로 만든 것은 제우스입니다.]휴, 다행이다.[헤라의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소로 변하진 않지만, 자신이 소라고 믿게 됩니다.]"그것도 무서워!"[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용자의 지능은 원래부터 소와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요.]"야!!"[다만 목덜미를 확인하십시오.]목을 매만졌다.화끈-손끝에 열감이 잡혔다.강가 웅덩이에 모습을 비춰 보았다.화려하게 펼쳐진 백 개의 눈동자. 공작의 깃털 무늬.아까 그 할망구가 매달려 조르던 자리에 푸르스름한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이거 뭐야? 도축 예정 낙인?"[헤라의 각인: '가정의 수호자' 고유 가호 부여됨.][헤라가 필멸자에게 직접 내리는 최상위 축복입니다. 기록상 전례가 거의 없습니다.][현재 호칭: 헤라의 챔피언.]"챔피언이고 나발이고 내 샌들이나 물어내라 그래!!"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신이면 다야? 사람 목 조르고, 인사도 없이 튀고! 최소한의 매너도 없어! 그러니까 남편이 바람을……."[사용자. 그 발언은 정말로 소가 되는 지름길입니다.]"……피우는 게 아닐까, 저는 감히 생각도 못 하겠고요. 아무튼 위대하신 여왕님께서 통이 크시면 신발 한 짝 정도는 새로 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경이로운 비굴함. 훌륭한 생존 본능이군요.]"아무튼 델포이 신전에 민원 넣을 거야! 고발할 거라고!!"[추천하지 않습니다. 벼락에 맞을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신발 한 짝 잃어버리고 얻은 게 조폭 문신이다. 이제 공중목욕탕은 다 갔네.툴툴거리며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왼발에는 질긴 가죽 샌들, 오른발은 진흙 범벅인 맨발.어깨에는 물에 젖어 축축하게 늘어진 표범 가죽.목덜미에는 시퍼런 공작 깃털 문신까지. 영락없는 부랑자 꼴이었다."협상이고 자시고, 구걸부터 해야 할 판이네."투덜거리며 흙길을 걸었다.언덕 너머로 백색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이올코스였다.*성문 안 광장에는 인파가 붐볐다.흰 키톤을 걸친 시민들, 기름 바른 제물용 황소들, 향로의 짙은 연기.바다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오늘 무슨 날이야? 장날인가?"[일자 확인 중.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리는 대제전 당일입니다. 이올코스의 통치자 펠리아스가 주관하는 최대 규모의 국가 제사죠.]'아, 그래? 그럼 삼촌도 광장에 나와 있겠네. 잘됐다. 예약 잡고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면담 가능이잖아.'절뚝이며 인파 속으로 들어섰다.사람들이 나를 보았다.처음에는 그저 웬 거지새끼인가 하는 눈빛이었다.그러나 시선이 내 발끝에 머무는 순간, 술렁임이 번져나갔다."저자를 보게…….""표범 가죽을 두르고, 머리칼은 펠리온 산의 이슬에 젖어 있구나.""발을 봐, 발을!""……응? 내 발이 왜?"나는 어색하게 목을 긁적였다.'메티스.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여? 왜 다들 슬금슬금 피해?'[대중의 인식을 조회합니다.][인식 코드: 모노산달로스 신탁의 사내.]'신탁? 뭔 신탁?'사람들이 좌우로 물러서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그 길의 끝, 성문 안쪽 높다란 단상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황금 왕관을 쓰고, 자주색 망토를 걸친 노년의 왕이.***단상 위.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에게는 묵은 악몽이 두 개 있었다.첫째는 신탁.'외짝 샌들을 신은 사내를 경계하라. 그가 네 옥좌를 앗아가리라.'왕위에 오른 해에 받은 예언이었다.그래서 왕은 성문을 지나는 모든 사내의 발을 감시했다.신발이 헐어 벗겨진 거지. 한 짝을 잃은 취객.매일 모조리 끌고 와 발을 확인하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둘째는 죄.어머니 티로를 핍박했던 계모, 시데로.헤라의 신전으로 도망쳐 자비를 구하던 그녀를 펠리아스는 제단 위에서 베어버렸다.피로 물든 여신의 석상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시선.왕은 그 시선을 단 하룻밤도 잊은 적이 없었다.그래서 모든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도 오직 헤라의 제단에만은 기름 한 방울 바치지 않았다.바칠 수 없었다. 어차피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그런데."폐하…… 저기를……."갈라진 군중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표범 가죽을 걸치고,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여유롭게 걸어오는 청년.그의 발끝에 펠리아스의 시선이 꽂혔다.왼발에는 가죽 샌들.오른발은 맨발.'외짝 샌들……!'왕은 황금 잔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잔 속의 붉은 포도주가 넘쳐흘렀다.자신을 악몽에 가두었던 신탁이 육신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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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아스의 손이 허리춤의 검자루로 향했다.'죽여야 한다. 지금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 성벽에 걸어야…….'그 찰나, 사내가 손을 들어 보란듯이 제 목덜미를 쓸었다.햇살이 그 손끝 아래를 비추었다.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위에 푸른빛 문양이 박혀 있었다.백 개의 눈동자를 가진 공작 깃털.여신 헤라의 상징.'헤라…… 기어코! 그것도 하필 오늘!'오늘이 어떤 날인가?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리는 대제전.이올코스의 모든 귀족과 백성, 그리고 제사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날.만인이 지켜보는 대제전 한복판에서 여신의 사도를 벤다?백성들의 반란은 둘째 치고, 올림포스의 벼락이 즉시 이올코스를 잿더미로 만들 터였다.'죽일 수 없는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골라 들어왔다!!'치밀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포진.'아이손의 핏줄…… 디오메데스라 했던가?'제우스의 지략. 과연 그 이름값에 어울리는 행보였다.소문으로는 여리고 나약한 청년이라 들었거늘, 이토록 뛰어난 지략가였단 말인가.펠리아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오오…… 이 무슨 기이한 운명의 만남인가. 신탁의 사내여, 펠리온의 영웅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한쪽 신발만을 신은 채, 바다의 신을 기리는 이 거룩한 날에 짐의 도성으로 걸어 들어왔는가!"온 광장에 왕의 과장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펠리아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사내의 앞에 섰다.가까이서 마주한 사내의 눈빛은 기묘할 정도로 담담했다.그 초연함이 펠리아스의 심장을 더욱 조여왔다.'무엇을 요구할 셈이냐? 옥좌를 내놓으라 소리칠 셈인가? 내 죄를 만천하에 고발하여 나를 끌어내릴 작정인가!?'"저기요?"마침내 사내가 입을 열었다."유산 정산 좀 하러 왔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