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귀농은 반역이다
4. 귀농은 반역이다
"저기…… 유산 정산 좀 하러 왔는데요."금발의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아, 소개가 늦었네요. 아이손의 아들입니다. 그, 제가 사실 안 죽었거든요. 아무튼 유산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그리고 샌들도 한 짝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다가 강에 빠뜨려서요."광장에 수군거림이 번져나갔다."아이손의 아들?""죽은 왕자가 살아 있었다고?""외짝 샌들! 신탁이 이루어졌다!!"펠리아스는 얼굴에서 동요를 지웠다.'……영악하구나.'칼을 들고 왔다면 차라리 편했을 터. 반역자로 몰아 그 자리에서 목을 치면 그만이니까.그러나 저놈은 만인 앞에서 유산을 언급했다.핏줄을 밝히고, 상속을 논하고, 심지어 신발을 청하며 신탁을 상기시키기까지.'좋다. 그렇다면 나 또한 왕의 자애로움을 보여주리라.'"오오, 조카야! 네가 살아 있었구나!! 아이손의 아들이 살아 돌아오다니, 이는 필시 신들의 가호로다!"와아아아-펠리아스는 사내를 와락 끌어안았다.코앞에서 공작 깃털 문양이 푸르게 타올랐다."디오메데스라 들었다만. 참으로 장성했구나.""아, 그 이름은 버렸습니다. 스승님이 새로 지어주셨거든요. 이제 이아손입니다."펠리아스의 웃는 낯이 미세하게 굳었다.'이름을 바꿨다?'이아손. 치유하는 자.'대체 무엇을 치유한단 말이냐?'왕은 금세 답에 도달했다.'찬탈로 병든 이올코스를 정상화하겠다는 뜻이구나! 이름에 칼날을 새겼어……!'"하, 하하……! 그래, 이아손이라! 참으로 복된 이름이군! 자, 자! 이리 귀한 손님을 어찌 흙먼지 날리는 돌바닥에 세워두겠느냐! 궁으로 들자꾸나!"이올코스의 알현실.쿵.문이 닫히자, 병사들의 손이 일제히 칼자루로 향했다. 펠리아스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멍청한 것들. 온 도시가 외짝 샌들의 사내를 보았다.'남은 것은 협상뿐.왕은 옥좌에 앉아 위엄을 그러모았다."그래, 조카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왕위를 되찾으러 왔느냐."사내가 손사래를 쳤다."아뇨, 왕관은 됐고요.""……됐다고?""전 권력 같은 거 관심 없거든요. 그거 말고, 할아버지 유산에서 아버지 몫이요. 다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시골에 땅뙈기 하나 사서 평생 세나 받으며 먹고살 만큼만 떼어 주시면 돼요."펠리아스의 동공이 흔들렸다.'함정이다.'크레테우스 왕의 유산이란 곧 이올코스. 왕국은 떼어 나눌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늘.그런데 저놈은 상속을 전제로 깔아두고, 선심 쓰듯 '일부만' 받겠다며 흥정을 걸었다.여기에 넘어가 황금 한 조각이라도 건네는 순간, 아이손의 몫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제 입으로 찬탈을 자백하는 셈!'저 순박하게 웃는 낯짝. 물에 젖은 생쥐 꼴. 전부 연출이다!'이미 왕관이 제 손아귀에 들어온 것처럼 구는 저 여유를 보라!펠리아스는 옥좌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승부다."들어라, 이아손! 나는 티로의 장남이며, 위대한 포세이돈의 아들이다! 네 아비 아이손은 병약하여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시대에 이올코스에 필요한 것은 강한 손이었지! 내가 칼을 쥐고 백성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이올코스는 진작에 흔적도 없이 불타 사라졌을 것이다! 내가 이 나라를 짊어졌다는 말이다!"혼신의 연설이 한참이나 이어졌다.신하들이 감읍하여 고개를 조아렸다.'어디 반박해 보아라. 네가 무슨 명분으로 내 통치를 부정할 수 있겠느냐!'이아손이 하품을 쩍 하더니,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훅 불었다."아, 네네. 그러시구나. 그래서 제 몫은요?"신하들이 경악하여 사내를 쳐다보았다.펠리아스의 손끝이 파르르."……돈을 받아서, 대체 무엇을 할 셈이냐.""아테네 가서 올리브 농사나 지으려고요."펠리아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아테네? 올리브?'아테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다스리는 도시.그리고 올리브. 그 여신이 도시를 걸고 포세이돈과 겨룰 때 손수 대지에 심은 신성한 나무.즉, 저놈이 아테나의 도시로 가서 아테나의 나무를 기르겠다는 것은──'전쟁의 여신 비호 아래 군사를 기르겠다는 뜻……!'목에는 헤라의 표식. 손에는 아테나의 올리브.올림포스의 두 여신을 등에 업은 놈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는 날, 자신의 목은 성벽에 걸린다.'보내면 안 된다. 아테네만은 절대로 안 돼!!'펠리아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여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 절대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곳.'……흑해.'"이아손! 황금양털이다!""네?""콜키스의 황금양털! 우리 가문의 잃어버린 보물! 그것을 가져온다면…… 그래, 이올코스의 왕위를 물려주겠노라!""아뇨, 왕좌는 됐다니까요. 그리고 방금 아버지가 병약하시다면서요. 자식이 옆에 있어야죠."펠리아스는 숨을 삼켰다.'신하들이 듣는 앞에서 인질 문제를 꺼내다니.'풀이하면 이렇다. 내가 떠난 사이 내 가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알지?"염려 말거라!"왕은 즉시 가슴을 쳤다."네가 항해하는 동안 네 가족은 이 펠리아스가 목숨 걸고 지키겠노라! 궁정 최고의 어의를 보내고, 산해진미를 대접하겠다! 온 백성이 증인이다! 왕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진짜요? 헤라님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어요?""……헤, 헤라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라. 아이손과 그의 가족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겠노라고.""근데 저 배가 없는데요. 돈도 없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유산 정산이 아직…….""배도 내가 주마!!"펠리아스가 애원했다."최고의 조선공을 붙여주겠다! 선원도, 물자도, 항해에 필요한 전부를 왕실이 부담하겠다! 부족함 없이 채워주마!""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뭘 그렇게까지.""받아다오!""아뇨, 진짜 괜찮은데…….""제발 받아다오, 조카야!!"'큭! 이런 굴욕이!'왕좌를 노리는 자에게 오히려 배를 바치며 받아달라 비는 꼴이라니.물정 모르는 신하 몇몇은 조카를 향한 왕의 지극한 애정에 눈시울까지 붉혔다.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다. 일단 이아손을 쫓아내는 게 우선.'가라, 가서 죽어라…… 제발 흑해에서 죽어라!!'***알현실을 나왔다.복도를 몇 걸음 걷다가, 벽을 짚고 멈춰 섰다."뭐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나는 분명 약간의 유산을 정산받으러 왔다.목표는 소박했지. 돈 좀 챙겨서 아테네 가서 올리브 농사. 끝.그런데 왜 이렇게 일이 커진 거야?'아니, 잠깐. 침착하자. 그냥 안 가면 되잖아? 출항 전에 야반도주하면──'[불가능합니다.]'왜.'[사용자는 만인이 지켜보는 대제전에서 아이손의 아들이자 신탁의 사내로 공인되었고, 방금 신하들 앞에서 황금양털 원정을 수락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지금 도망치면 '신탁의 사내가 겁먹고 줄행랑쳤다'는 소문이 그리스 전역에 퍼집니다. 유산을 요구할 명분은 그 순간 소멸합니다.]'명분이야 없어도 되지. 목숨이 우선인데.'[현재 사용자가 무사한 이유는 단 하나, 만인 앞에 공개된 '여신의 사도'라서입니다. 도주하는 순간 사용자는 사도에서 사기꾼으로 격하됩니다. 사기꾼은 아무 데서나 죽여도 됩니다.]'……뭐?'[도주 시 암살자 파견 확률 99.2%.]배 타면 흑해에서 죽고.안 가면 자객한테 죽고.유산은 어느 쪽이든 구경도 못 한다.'망했어! 내 인생 망했다고!'[협상 결과: 헤라의 이름을 건 서약, 가족 신변 보장, 함선 1척 전액 지원, 선원 및 물자 일체, 조건부 왕위 계승권. 그리고 흑해행 티켓.]분홍색 텍스트가 눈앞에서 깜빡거리며 약을 올렸다.'내가 원한 것. 은퇴 자금과 올리브 밭.'[일치율 0%입니다. 축하드립니다.][운명 변동 내역 중간 결산][사용자 이아손 생존 확률: 0.1% 미만 → 1.4%]"야, 잠깐. 고작 1퍼센트라고? 내 목숨이 아직도 1퍼따리야?"[컵에 물이 1.4%나 차 있다고 생각하십시오.]"그건 그냥 물방울이야!"[긍정적 사고는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부디 남은 수명 동안만이라도.]"다 네 탓이야! 옆에서 훈수를 뒀어야지! '사용자, 그 발언은 흑해행 지름길입니다' 이런 거 해줬어야 할 거 아냐!"[저번에는 훈수를 둬서 펠리온 산에서 쫓겨났다고 하지 않으셨나요?][게다가 제가 개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얄미운 언변이었습니다.][펠리아스의 심박수가 분당 190회까지 치솟더군요.]"그건 그냥…… 문신값이라도 뽑자 싶어서……."목덜미의 공작 깃털을 문질렀다. 조폭 문신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조폭 문신처럼 먹혔잖아!"나는 그냥 올리브 농사나 짓고 싶었다고……."[참고로 올리브는 아테나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그게 뭔 상관인데!"*시종의 안내를 받아 궁전 별채로 향했다.아버지 아이손이 유폐 아닌 유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곳.문을 열자 약 냄새가 훅 끼쳤다.침상에는 백발이 성성한 남자가 반쯤 몸을 일으킨 채 앉아 있었다."콜록, 콜록…… 오오…… 디오메데스…… 아니, 이아손이라 하였느냐. 살아서…… 이렇게 당당한 사내가 되어 돌아왔구나. 아비가 못나서 너를 펠리온 산의 짐승들 틈에 버려두었는데…….""……."솔직히 말하면, 별 감정은 없었다.당연하지 않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다.전생 기준으로 따지면 아예 남이고. 가족이라는 실감이 날 리가.나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케이론 스쿨에서 챙겨온 약초 주머니가 용케 붙어 있었다."이거, 펠리온 산에서 캔 겁니다. 기침에는 이 마른 잎을 달여 드시고요, 이건 잠 안 올 때. 아, 이건 향이 좀 독한데 가슴이 답답할 때 태우면 좋습니다.""……이아손?""유산이니 왕위니 그런 건 나중 문제고요. 일단 사람이 살아야죠. 삼촌이 이제 밥도 잘 주고 의사도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괜히 속 끓이지 마시고요."아이손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흐흑…… 훌륭하게 자랐구나…… 정말로, 훌륭하게…… 케이론 님께 큰절을 올려야겠어…… 콜록!""큰절은 무슨. 그 축생은…… 아니, 스승님은 절 발로 차서 배웅하신 분입니다. 푹 쉬세요. 전 바빠서 이만 가봅니다."방을 나설 무렵, 시종들이 아이손의 침구를 새것으로 갈고 있었다. 주방 쪽에서는 죽 쑤는 냄새. 복도 저편에서는 의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참고로, 원전에서 아이손은 사용자가 항해하는 동안 황소 피를 마시고 자결합니다.][방금 헤라의 이름을 건 서약으로 해당 루트가 봉쇄되었습니다.]"……아, 그래?"
d3kza0VLSVdxajZ6L09aWC8xUnR2SEJUemoxZS92ZDNqZTdBYzBoVW1UcWQ4dk43RlRpRnJ1aUVpZHhCUjJqeg
열린 문틈으로 아이손이 보였다."잘됐네."[혈육치고는 반응이 담백하군요.]"처음 본 사람이라니까. 근데 뭐, 사람이 안 죽는 건 좋은 거지."[……기록해 두겠습니다.]숙소로 가려는데, 복도 끝 기둥에 웬 청년 하나가 기대 서 있었다.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복장.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쯤 위로 보였다."이아손! 기다렸어! 야, 너 진짜 굉장하다!""어…… 누구세요?""나? 아카스토스! 펠리아스 왕의 맏아들! 그러니까 네 사촌이야!"'메티스. 정보.'[개체 식별: 아카스토스][인물 정보: 펠리아스의 장남. 사용자의 사촌형][원전: 부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르고 호에 몰래 승선]찬탈자의 아들.정치적으로는 내 최대 경쟁자고, 나를 죽이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 중 하나.경계 태세로 반걸음 물러섰다."알현실 얘기 다 들었어! 아버지를 말로 이긴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아카스토스가 성큼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눈이 소년처럼 반짝거렸다."그 연설 있잖아, 포세이돈의 아들 어쩌고 하는 거. 그거 시작하면 신하들도 반나절은 각오하거든? 근데 너는 한마디로 끝냈다며! 크으,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아니, 그건 그냥 얘기가 길어서…….""게다가 왕좌를 준다는데 됐다고 했다며? 보통 배포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진짜로 필요 없어서 그런 건데요.""심지어 겸손하기까지! 너 진짜 대단한 녀석이구나? 지혜가 올림포스 꼭대기까지 닿아 있어!"말이 안 통한다."그래서 말인데! 출항 준비, 내가 맡을게! 배 건조 감독, 물자 조달, 선원 모집까지 전부!!""아니, 왕자님이 왜요?""나도 영웅적인 모험을 해보고 싶었거든! 어릴 때부터 궁전에만 있었단 말이야. 근데 음유시인들이 대대로 노래할 원정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얘는 또 왜 이렇게 신났어."아, 식량이랑 무기도 챙겨야 하지? 돈이 많이 들 거야. 그래도 걱정 마! 내가 아버지 금고 열쇠 위치도 다 알고 있거든!"아카스토스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선소 방향으로 쏜살같이 뛰어가 버렸다.복도를 오가는 전령들, 항구로 달려가는 관리들.창밖 저 멀리 조선소 쪽에서는 벌써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원치 않는 항해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중."나 진짜로 배 타야 되는 거야?"[걱정 마십시오. 출항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합니다.]"오, 그래?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그러니 그동안 수영을 배워두시길 권장합니다.]"전혀 위로가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