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상 클라이언트
5. 진상 클라이언트
다음 날 아침.천장은 오늘도 그리스 양식이었다."메티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전부입니다. 굳이 최초의 분기점을 짚자면, 학습만화만 대충 넘겨보고 원전은 펼쳐본 적도 없는 사용자의 나태함입니다.]"그리스 신화 원전을 정독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이불을 뒤집어썼다.전생부터 연마해 온 유서 깊은 현실 도피 기술.월요일 아침, 이불 속에서 '오늘 회사가 불타 없어졌으면' 하고 빌던 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조선소가 불타 없어지게 해주세요!'쾅쾅쾅!"이아손! 이아손, 일어났어?? 해가 중천이야!"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아카스토스가 문짝을 두들겨 팼다.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조선소 섭외 끝났어! 국고에서 황금도 잔뜩 빼 왔다고! 아버지가 뒤늦게 인장을 찍어주시면서 손을 덜덜 떠시던데, 역시 네 기백에 눌리신 게 틀림없어!""……형님, 잠은 주무신 겁니까?""지금 잠이 와!? 황금양털을 찾으러 가는데 잠이 오겠냐고! 자, 이거 봐! 지금 짓고 있는 배의 도면이랑 물목이야! 아테나 여신께서 최고의 조선공까지 보내주셨대! 바로 가보자!""아테나 여신님이 왜요?"[추정: 사용자의 원정에 올림포스 지분이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헤라에 이어 두 번째 대주주입니다.]'스타트업도 아니고 왜 자꾸 투자가 들어와.'아카스토스는 두루마리를 이불 위로 냅다 던졌다.나도 모르게 눈이 움직였다.예산 항목. 산출 근거. 일정표.빽빽한 글씨가 시야를 어지럽혔다.순간, 전생에 직장 생활이 떠올랐다.신입이 올리던 결재 서류.근거 부실에 오탈자투성이인 전형적인 졸속 기획안.'잠깐.'원정을 취소하겠다고 직접 말하면? 신탁을 거부한 사기꾼으로 낙인찍혀 그날로 목이 날아간다.도망치면? 뒤통수에 창이 꽂힌다.그렇다면 제3의 길.끝없는 설계 변경. 상식을 초월한 안전 규제. 근거 없는 보완 요청.'프로젝트 자체를 무한 검토의 늪에 빠뜨리면 어떨까?'배가 없으면 출항도 없다.[사용자가 무척이나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메티스. 나 결심했어.'[불길한 예감이 듭니다.]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섰다. 아침 햇살이 후광처럼 쏟아졌다.'나는 오늘부터, 그리스 사상 최악의 진상 클라이언트다.'[…….]*파가사이 항구.소금기 밴 바람이 뺨을 때렸다. 끼룩거리며 돛대 위를 맴도는 갈매기. 부두에 진동하는 역청 끓는 냄새.조선소 한복판에는 선체 골조가 갈비뼈를 드러낸 고래처럼 누워 있었다.그 위에 선 사내가 망치를 든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구릿빛 피부. 문짝만 한 어깨. 톱밥 묻은 턱수염.사내가 골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발주자 되시오? 듣자 하니 그 '외짝 샌들의 영웅'이라던데. 나는 아르고스. 아테나 여신의 뜻을 받아 세상에서 가장 빠른 배를 지을 목수요."[개체 식별: 아르고스][인물 정보: 아테나의 가호를 받는 당대 최고의 조선공][원전: 아르고 호의 건조자. 배 이름의 유래]장인이라…… 좋아. 장인일수록 진상에게 약한 법이지.프라이드는 유리와 같다. 두드리면 깨진다.딱 좋은 타깃이네.뒷짐을 지고 용골 주위를 느릿느릿 돌았다. 시선은 최대한 불만스럽게."아르고스 씨.""말씀하시오.""이거, 노가 몇 개짜립니까?""서른 개요. 양쪽에 열다섯 개씩."첫 번째 트집거리가 걸렸다."서른 개?"혀를 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르고스 씨, 그게 최선입니까?"아르고스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뭐라 하셨소?""노 서른 개짜리 배는 파도가 조금만 쳐도 뒤뚱거립니다. 게다가 흑해가 어디 옆 동네 개울입니까? 바람이 안 불면요? 파도가 험하면? 선원 서른 명이서 그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탈진해서 죽으라고요?""하! 이 배는 날렵함이 생명이오! 파도를 탔을 때 가장 빠른 구조란 말이오!""그리고 저 뱃멀미 엄청 심하거든요? 전 토하다 죽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아요. 노를 늘리세요.""늘리다니, 대체 얼마나!"아르고스가 핏대를 세웠다."음…… 한 오십 개?"무리한 증축 요구에 공정 전면 재검토.당연히 현장 목수는 공구를 집어던지고 파업을 선언할 터였다.그런데."……오십 개?"아르고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발주자 양반. 그게 얼마짜리 소린지는 알고 하는 말이오? 용골부터 다시 깎아야 하오. 목재가 곱절, 인부가 곱절, 역청도 곱절이오."나왔다. 예산 핑계.전생에 지겹도록 들은 레퍼토리다. '그 견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시간과 예산을 좀 더 주신다면……'그렇게 뭉개다가 결국 원안대로 가자는 수작이지?어림없다."돈 얘기로 빠져나갈 생각 마세요. 어차피 제 돈도 아닙니다. 곱절이든 세 곱절이든 청구서는 전부 삼촌한테 가요.""맞아! 국고는 내가 벌써 열어놨어!"아카스토스가 옆에서 해맑게 거들었다."못 짓겠으면 못 짓겠다고 하세요. 예산 탓하지 말고."아르고스는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더니 연장통 밑바닥을 뒤져 누렇게 바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좌우 스물다섯, 오십 개의 노가 그려져 있었다."실은 나도 늘 이런 배를 짓고 싶었소. 한데 다들 서른 개면 족하다며 퇴짜를 놓더군. 돈 걱정 말고 원하는 배를 만들라는 발주자는 그대가 처음이군!"어라?"이봐들! 기존 도면은 불쏘시개로 써라! 용골 길이 늘리고, 늑골 간격 좁히고, 노잡이 좌석 오십 개다!!"'잠깐만. 왜 좋아해?'[분석: 조선공 아르고스의 사기가 상승했습니다. 도전 과제가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알림: 노 50개 규격 아르고 호의 탄생 비화가 사용자의 '뱃멀미 회피'로 공식 등록되었습니다.]등록하지 마! 역사에 남기지 마! '아오, 이래서 고인물들은 안 된다니까!!'첫 수가 빗나갔다. 하지만 내겐 아직 수많은 진상 매뉴얼이 남아 있지.용골 밑바닥으로 달려가 목재 틈새를 쿡쿡 찔렀다."잠깐! 이거 방수는 어떻게 할 건데요!?""역청을 끓여 바를 것이오! 세 번 덧바르면 물 한 방울 새지 않소!""겨우 세 번? 장난해요!?"삿대질에 힘을 실었다."소금기에 목재 삭는 건요? 최소 일곱 번! 그리고 바닥 미끄럼 방지 홈은요? 비 오면 선원들 미끄러져서 머리 깨지라고요? 도면 보니까 갑판 난간은 또 왜 이렇게 낮아요? 허리까지 올려요! 사람 떨어지면 어쩔 건데요!"아르고스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옳지. 이번에야말로 질렸겠지. 이런 좀스러운 트집을 잡는 영웅이 어디 있겠는가."그리고 선체 두께도 마음에 안 들어요! 큰 파도 맞으면 반 토막 나는 거 아닙니까? 바다 한가운데서 얼음덩어리랑 충돌하면 어떡할 건데요!?"머릿속에 타이타닉호가 떠올랐다. 흑해에 빙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딪히면 깨지는 건 똑같잖아!"이중 격벽! 선체를 이중으로 보강하고 용골을 두 배 두꺼운 참나무로 바꾸세요! 안전제일 몰라요? 안전제일! 좋아, 좋아, 좋아!"그래. 이 정도면 충분해.공사 기간 세 배, 자재비는 폭등. 인부들은 '이딴 겁쟁이의 배는 못 만든다'며 도망치겠지.툭.아르고스의 손에서 망치가 떨어졌다.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왜 울어? 내가 좀 심했나?"지금껏 수많은 영웅의 배를 지어왔소."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내 조선소를 거쳐 간 영웅이란 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것만 요구했소. 더 빨리 만들어라. 더 화려하게 만들어라. 뱃머리에 용 머리를 달아라, 선체에 금칠을 해라. 이런 허례허식만 지껄였소. 그 배에 탈 선원들의 목숨을 아까워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소.""……네?""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가장 먼저 살피는 사내라니!"아르고스가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쾅 쳤다."당신이야말로 바다를 아는 영웅이오! 화려함 뒤에 숨은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진짜 선장이오! 이 아르고스, 목숨을 걸고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안전한 배를 지어 바치겠소! 이봐들! 오늘부터 밤샘 작업이다! 펠리온 산에서 제일 굵은 참나무를 베어 와라!!""우오오오오오!!"인부들이 도끼를 챙겨 들고 뛰쳐나갔다. 다들 아주 열정이 번들거렸다.'왜!? 왜 파업을 안 하고 자발적으로 열정페이를 당하냐고, 이 미친 고대인들아!!'[노무 관리의 기적입니다. 임금 인상 없이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켰습니다. 경영학 교본에 실릴 사례입니다.][알림: 인부들의 사기가 200% 상승했습니다. 건조 속도가 1.5배 빨라집니다.]*점심때가 지나도록 조선소는 잔칫집 분위기였다.안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그렇다면 다음 전략."근데요!"나는 악을 썼다."배만 있으면 뭐 합니까? 키는 누가 잡아요? 전 노 한번 저어 본 적 없어요! 뱃길도 모르고 별자리도 볼 줄 모른다고요! 흑해 물살을 가를 키잡이가 당장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답니까!?"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키잡이가 없다는 핑계면 몇 달은 질질 끌 수 있지.그때였다.조선소 구석에 걸터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일어났다.사내는 쥐고 있던 조개껍데기를 바다로 툭 던졌다."내가 잡지."짧고 건조한 목소리."……누구신데요?"사내는 품에서 올리브 잎 하나를 꺼내 보였다."티피스. 보이오티아에서 왔다.""아니 그러니까, 왜…….""여신이 꿈에 나와서 여기로 가라더군."[개체 식별: 티피스][인물 정보: 보이오티아 출신. 아테나 여신이 파견한 당대 최고의 키잡이][별자리를 읽는 눈과 파도를 길들이는 손을 지녔습니다.]'파견? 벌써? 아직 채용 공고도 안 냈는데!!'신이란 것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일 처리가 빠른 거야!?[올림포스의 인재 풀은 사용자의 생각보다 넓습니다. 일 처리도 사용자의 전 직장보다 빠르고요.]티피스는 용골을 쓱 훑어보았다."배는 좋군.""……그게 끝입니까?""키는 내가 잡겠다."말문이 턱 막혔다.침착하자. 진상 클라이언트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생에 그런 사업가가 있었다. 완전 자율주행은 내년에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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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년'이 매년 갱신되는 동안 주가만 치솟았지. "아니 뭐…… 요즘 배는 자율주행 같은 거 없나? 암초 있으면 배가 알아서 알려주고, 항로도 지가 봐주고, 위험하면 말도 해주고. 그런 거."끼룩끼룩.갈매기가 울었다.철썩-파도가 모래톱을 때렸다.아르고스가 눈을 끔뻑였다."……배가? 말을……?"티피스는 나를 잠시 쳐다봤다."뱃놈은 그런 배 안 탄다."아카스토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헛웃음을 삼켰다."저기, 이아손…… 상상력이 정말 영웅적이긴 한데…… 배가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인부들도 쑥덕거리기 시작했다."저 양반, 아까까진 멀쩡하더니.""갑자기 실성을 하셨나.""배가 말을 한대. 배가."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반걸음 물러섰다. 머쓱함이 정수리까지 차올랐다."아,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 거 분위기 되게 싸해지네. 아무튼 전 배가 완벽해지기 전까진 절대 안 탈 거니까 그렇게들 아세요!"도망치듯 조선소를 빠져나왔다.등 뒤로 아르고스의 고함과 망치질 소리가 다시금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그날 밤.객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쥐어뜯었다."망했어. 완전히 망했어."[사보타주 기초 교육을 다시 받으시길 권장합니다. 사용자가 입을 열 때마다 배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그 배는 세상 끝까지도 거뜬히 항해하겠죠.]"내가 자율주행 개소리까지 했는데 왜 안 엎어지냐고! 이 정도면 미친놈이라고 쫓아내야 정상 아니야??"[그 대목에선 확실히 다들 사용자를 정신이상자로 보더군요. 유일한 위안으로 삼으십시오.]"위안은 개뿔……."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내일은 또 무슨 수를 쓰지."불이라도 질러야 하나…… 흰개미를 풀까…… 그리스에 흰개미가 있나……?"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꿈을 꿨다.꿈이라는 건 단번에 알았다. 발밑에 구름이 깔려 있고, 하늘에는 별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으니까.안개 저편에서 발소리가 울렸다.또각. 또각."……누구세요?"안개가 갈라지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푸른빛이 감도는 투구. 날 선 창. 왼손의 방패에는 괴물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어깨 위에는 부엉이 한 마리.회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머릿속 학습만화를 필사적으로 넘겼다.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으악! 사람을 거미로 만드는 타입의 여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