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예산 삭감은 없다
7. 예산 삭감은 없다
궁전 생활 2주 차.밥은 누린내 나는 멧돼지 대신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새끼 돼지 통구이가 나오고, 잠자리는 동굴 바닥 대신 침대다.게다가 아침에 말발굽으로 깨우는 스승도 없다.이게 사람 사는 거지. [쾌적한 주거 환경에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참고로 임대인은 사용자의 익사 및 실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인간의 뇌는 푹신한 침대와 당분만 주어지면 닥쳐올 죽음도 잊어버리는 모양이군요.]"일어나자마자 꼭 그런 걸 상기시켜야겠냐?"[정확한 현실 인식은 생존 확률을 올려줍니다. 사양하지 마시길.]뚝딱뚝딱-창밖 저 멀리, 파가사이 항구에서는 오늘도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아침을 먹고 조선소로 향했다. 원치 않는 출근길.【자~ 출석 체크할게! 곰발바닥 왔고~ 물개 왔고~】뱃머리 참나무의 말투는 그대로였다. 다만 내용물이 매우 협조적으로 바뀌었을 뿐.【체조 시간~! 하나~ 둘~ 몸 굳어 있으면 허리 나간다? 셋~ 넷~】근육질 사내 수십 명이 나무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팔을 돌렸다.【마무리 구호! 안전!】"제일! 좋아좋아좋아!!"혹시 저거 내가 퍼뜨린 건가?[고객 요구사항을 구현했을 뿐입니다. 만족도 조사에 응해주시겠습니까.]'별점 테러할 거야.'덕분에 공정은 예정보다 한참 앞서가는 중.그리고 오늘.아르고스가 끌과 망치를 들고 다가왔다."슬슬 뱃전에 이름을 새길 때요. 이아손 호. 어떻소?""안 돼요!!"배에 내 이름까지 박히면 진짜 못 도망친다."그럼 뭐라 새기오?""아르고 호요! 원래 그 이름이에요!"원전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아르고 호……? 설마, 내 이름을? 배에는 본디 영웅의 이름을 새기는 법. 목수의 이름이 붙은 배는 헬라스에 한 척도 없소."아르고스가 망치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내 아비도 목수였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목수였소. 평생 영웅들의 배를 지었지. 한데 음유시인들은 배를 탄 자의 이름만 노래하더군. 배를 만든 자의 이름은 언제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 그런데 그대는 내 이름까지 기억해 주겠다고……!"아르고스가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결심했소. 내 이름을 단 배를 그 험한 바다에 홀로 보낼 수는 없소. 이 아르고스, 함께 흑해로 가겠소!""네!? 아니, 목수가 왜 타요! 만들었으면 끝이지!!"[악덕 고용주의 화법이 관측되었습니다.][해석: 프로젝트에 네 이름 걸어줄 테니 열정페이로 무급 승선해라] [아주 효율적인 가스라이팅입니다.]'그냥 원래 배 이름을 말한 거잖아!!'[미래 지식으로 순진한 목수를 사지에 끌어들였다는 뜻이군요.][사기 수법이 한층 더 악랄해졌습니다.]밧줄을 감던 티피스까지 다가왔다."좋은 배에는 좋은 목수가 필요하지. 잘 생각했군.""부추기지 마요!!"그리고 마지막 일격.아카스토스가 내 양어깨를 덥석 붙잡았다.참나무 사건 이후로 눈빛이 완전 광신도처럼 변했다."이아손. 그날 이후로 계속 생각했어. '찬탈자 냄새가 난다'던 신목의 모욕에 나는 고개를 숙였는데, 너는 신령의 입을 다물게 해서 내 앞길을 열어줬잖아. 핏줄이 어떻든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 된다고, 몸소 증명해준 거지?""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나도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 배는 순조로우니까, 이제 영웅들을 모을 차례야! 헬라스 전역의 영웅들을 내가 전부 끌고 올게!""잠깐만요! 형님!!"아카스토스는 어느새 구경꾼이 몰린 부두 한복판에서 칼을 뽑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이올코스의 백성들이여, 들으라! 위대한 포세이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라! 나 아카스토스는 이아손과 함께 흑해의 끝까지 항해할 것이다!!""와아아아아!!""전령을 헬라스 전역으로 띄워라! 황금양털 원정대를 모집한다아아!!"부두가 떠나가라 환호성이 터졌다.멀어지는 사촌 형님의 고함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뒷목을 잡았다."저 미친 모험뇌가……!"[승선 확정: 사용자 외 3명. 모집 공고 발송 완료. 출항 준비가 순조롭습니다.]"그게 문제라고!!"한낮, 궁전 객실.창가에서 햇살을 쬐고 있는데,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귀띔했다."이아손 님, 오늘 아침 폐하께서 배에 드는 돈을 전부 다시 따져 보라 명하셨다 합니다.""……정말요?""예. 장부를 하나하나 손수 살피시겠다고…….""크으으! 역시 삼촌이야!"무릎을 탁 쳤다.'그렇지! 내가 돈을 너무 썼어!'역시 정치는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법이구나!그래, 조카 놈이 나랏돈을 그렇게 펑펑 쓰는데 가만둘 리가 없지."저기요, 잠깐만요."돌아서려는 시종의 소매를 붙잡고, 갈대 펜으로 양피지에 지출 목록을 술술 적어 내려갔다."폐하께서 고생 안 하시게 제가 싹 정리했어요. 특히 비싼 것들은 밑줄까지 쳐놨으니까 꼭 전해주세요.""이걸 폐하께……?""그럼요. 세금을 아껴 써야죠. 눈먼 돈이 아니지 않습니까?"시종은 귀신에 홀린 얼굴로 물러갔다.[압수수색 영장도 안 나왔는데 증거물을 자진 납품하셨습니다.]'선량한 시민의 제보야. 혈세 낭비 내부 고발!'[고발 대상이 사용자 본인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죠.]'시끄러워. 아무튼 이 장부 보면 삼촌 뒷목 잡고 쓰러질걸?'예산이 깎이면 임금부터 밀릴 거다.그러면 인부들이 돈 안 주면 일 못 한다며 들고일어날 테고, 아르고 호는 미완성 흉물로 방치될 거다!콧노래가 절로 나왔다."내일 조선소 문 닫는 거 구경 가야겠다."[히죽거리는 사용자의 안면 근육이 불쾌감을 유발합니다.][덧붙여, 근거 없는 낙관으로 판정됩니다.]"근거가 왜 없어! 예산 삭감되면 자재 등급 내려가고, 공정 늘어지고, 그러다 흐지부지! 공공 프로젝트라는 게 원래 그렇게 끝나는 거야!"***이올코스 왕궁.펠리아스 왕은 창밖으로 파가사이 항구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탁자 위에는 첩자가 올린 양피지 보고서.'배는 오십 인승으로 확장되었으며, 바닥은 이중 격벽으로 보강되었다.''아테나 여신이 내린 도도나 참나무가 뱃머리에 얹혔다.''참나무의 신령마저 이아손의 기백에 눌려 굴복하고, 길을 여는 도구가 되었다.'펠리아스의 턱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괴물 같은 놈."그날 알현실에서 보았던 얼빠진 얼굴, 유산이나 달라고 징징대던 태도는 역시 기만이었다.배가 저토록 크고 튼튼해진다면? 험악한 흑해의 파도조차 뚫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안 되겠다."마침 구실도 있었다.오늘 아침, 배에 드는 돈을 전부 다시 따져 보라 일러둔 참이 아닌가.펠리아스는 갈대 펜을 들어 양피지에 밀명을 휘갈겼다."자재를 다시 살핀다는 명분으로 목재의 등급을 낮춰라. 펠리온 산의 참나무 대신 물을 먹으면 썩는 무화과나무를 섞어라. 역청도 한 번만 바르게 해라. 바다가 알아서 저 건방진 놈을 수장시키도록……."왕실 인장을 집어 들고, 등잔불에 녹인 밀랍 위로 짓누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쾅!내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시종장이 허겁지겁 굴러 들어왔다."폐, 폐하! 큰일 났습니다!""무례하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그, 그게 아니오라…… 왕자님께서…… 아카스토스 왕자님께서!!"펠리아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아카스토스가 왜? 그 아이가 또 무슨 철없는 짓을 벌였단 말이냐?""왕자님께서 영웅들을 모으겠다며 방금 친위대를 이끌고 떠나셨습니다! 심지어 백성들 앞에서, 포세이돈의 이름을 걸고 몸소 그 배에 타시겠다고 맹세까지……!"툭.펠리아스의 손에 들려 있던 인장이 양피지 위로 떨어졌다. 녹은 밀랍이 핏방울처럼 번져나갔다."……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인가?"알현실을 나서자마자 아카스토스의 호감을 사고, 배의 건조를 순순히 그 아이의 손에 맡겨둔 이유.그 순진한 아이를 감화시켜 바람잡이로 내세운 뒤, 기어코 제 발로 갑판 위에 올라서게 만든 기책.포세이돈의 이름을 건 맹세는 포세이돈의 아들인 자신조차 무를 수 없다.'내가 배에 손을 대는 순간, 내 손으로 아카스토스를 죽이게 되도록…… 내 아들을 인질로 세우다니!!'이어서 시종장이 쭈뼛거리며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바쳤다."그, 그리고…… 이아손 님께서 폐하께 친히 올리라 하신 목록입니다.""이아손이……?"펠리아스가 낚아채듯 양피지를 펼쳤다.펠리온산 참나무 원목.방수용 최고급 정제 역청.청동 보강 리벳 일체……값비싼 자재에는 일일이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이아손 본인은 '빨리 삭감해달라'며 표시해 둔 항목들.그러나 펠리아스의 눈에는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어디 한번 건드려 봐라. 네 아들이 탈 배의 어느 부품을 뺄 셈이지?'"이아손! 이 지독한 놈……! 피도 눈물도 없는 놈……!"왕이 문밖을 향해 고함쳤다."당장 페니키아산 백향목을 사들이고, 구리 못 대신 청동 못을 쏟아부어라! 못 하나라도 헐겁게 박히는 날엔 목수 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내 행복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저녁에 생선을 뼈까지 쪽쪽 발라먹고 있을 무렵.숨을 헐떡이며 들이닥친 왕실 전령이 양피지를 내밀었다."폐하의 칙령입니다! 원정선에 들어가는 재물을 크게 늘리고, 왕실이 비축한 자재를 전부 내어주라 하셨습니다! 최고급 청동 보강재도 원하는 만큼 가져다 쓰라십니다!""……응?"포도주 잔이 손에서 미끄러졌다."뭐라고요? 깎아도 모자랄 판에 더 준다고요?""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성한 원정에 단 하나의 흠집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하시며, 국고의 빗장을 푸셨습니다!"전령은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갔다."……왜?"[인질극의 효과가 아주 탁월했던 모양입니다.]"뭐? 인질? 내가 뭔 인질을 잡았는데!? 나 오늘 조선소 갔다 와서 생선 발라먹은 게 전부거든!?"[네. 그사이에 몸값이 입금되었습니다. 전과 한 줄 추가.][사용자의 항해 중 익사 확률이 유의미하게 감소했습니다.] [감사 편지를 쓰시겠습니까?]"날 죽이고 싶어 안달 난 거 아니었어?? 왜 지원을 팍팍 해주는 건데? 왜 배를 무적함대로 만들어주냐고!!"양피지를 구겨서 던졌다. 벽에 맞은 뭉치가 데굴데굴 굴러 발치로 돌아왔다.그날 이후로 조선소는 더욱 활력이 넘쳤다.수레째 실려 오는 최고급 백향목. 역청 끓는 냄새는 밤낮없이 진동하고, 참나무의 출석 체크는 새벽부터.뚝딱뚝딱-아르고 호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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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밤.머리를 감싸 쥐고 침대 위를 굴렀다.이제 배는 침몰하고 싶어도 침몰할 수 없는 배가 되어가는 중.침착하자. 심호흡을 하자.그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메티스. 노가 오십 개야. 오십 자리가 다 차야 배가 뜬다고."[놀랍군요. 사용자가 숫자를 셀 수 있다는 사실이 방금 처음 입증되었습니다.]"일단 나 하나. 죽어도 타기 싫지만 머릿수엔 들어가겠지."그리고 모험뇌 사촌 형님.목수 아르고스. 키잡이 티피스.겨우 네 명뿐이다."공석이 아직도 넘쳐나. 흑해로 황금양털을 뜯으러 가는데, 심지어 선장은 경력도 없는 풋내기 백수야. 이런 자살 특공대에 지원할 미친놈이 마흔여섯 명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지금 그리스는 영웅의 시대입니다. 명예에 눈이 먼 지능 미달의 전사들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아무리 그래도 마흔여섯 명은 무리지! 테베나 스파르타 놈들이 머저리냐? 남의 나라 왕자 뒤치다꺼리하러 오게? 정원 미달이면 배는 못 떠!!"마음이 한결 놓였다.그래, 사람만 안 모이면 그만이지. 암, 그렇고말고.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리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내일은 텅 빈 모병소를 보며 느긋하게 낮잠이나 자야지.***다음 날 아침.디리리링-구슬픈 현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잠을 깨웠다.궁전 앞마당은 사람들로 웅성웅성.창가에 앉아 있던 비둘기들도 넋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뭐지, 연예인이라도 왔나."하암…… 누가 아침부터 개념 없이 버스킹을……."눈을 비비며 대충 표범 가죽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문간 바로 앞에 은발의 미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그대가 이아손입니까? 세상 끝으로 향하는 배가 뜬다고, 바람이 노래하더군요."팅.그가 거북등딱지로 만든 리라를 퉁겼다."……누구?""트라키아에서 온 오르페우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