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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블랙기업 탈출은 지능순

하남자 이아손이 되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9. 블랙기업 탈출은 지능순

피비린내가 났다. 거기에 야수의 냄새까지.사자 가죽이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네놈이 죽음을 마시는 자, 이아손이냐.""예? 아뇨아뇨! 전 그런 거 마신 적 없는데요! 마신 건 물이랑 포도주밖에……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이아손은 저기, 저쪽에……!"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이 광장에서 표범 가죽을 두른 놈은 나 하나뿐이다.[개체 식별: 헤라클레스][인물 정보: 알크메네와 제우스의 아들. 그리스 최강최흉의 인간 병기][이력: 네메아의 사자 교살, 레르나의 히드라 토벌 등 전적 다수]헤라클레스의 시선이 내 목덜미에 꽂혔다."헤라. 그 여자의 개새끼였군."휘익-피할 새도 없었다."커헉……!?"억센 손아귀가 목을 틀어쥐었다.숨통이 막히고, 발끝이 땅에서 붕 떠올랐다.[위험: 경추 골절 한계 압력 82% 도달.][분석: 개체 '헤라클레스'는 사용자를 헤라의 하수인으로 해석 중입니다.]시야가 시커멓게 물들었다."그 여자가 보냈나? 이번엔 또 뭘 가져가려고! 내 목숨이냐? 아니면 내 곁에 남은 녀석들이냐? 대체 얼마나 더 빼앗아야 그 빌어먹을 여자의 분이 풀린단 말이냐……!"충혈된 눈이 내 얼굴과 목덜미의 공작 깃털 문양을 번갈아 훑었다.[생존 확률 계산 중][보정치 적용: 한심한 표정 +4.1%, 비굴한 태도 +8.4%……][평소처럼 하십시오.]평소처럼이 뭔데!!짓눌린 목구멍을 쥐어짜 비명을 질렀다."컥……! 저, 저도……! 저도 피해자라고요……!!"손아귀의 조임이 멈칫했다."뭐라?""저도 억울해 죽겠다고요! 저도 그 할망구한테 강가에서 샌들 뜯겼단 말입니다!!""할망구……? 샌들?""업어 달라 떼쓰더니 급류 한복판에서 샌들 한 짝 날려 먹게 하고…… 목덜미에 괴상한 문신까지 강제로 박아놓고 튀었어요! 저도 사기당한 거라고요!!"헤라클레스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내 꼴이 어땠는지는 나도 모른다.적어도 신의 뜻을 받드는 챔피언의 위엄은 없었겠지. 그건 확실하다.손이 스르륵 풀렸다.털썩.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쿨럭! 컥, 켁……!"네 발로 기며 기침을 쏟아내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다시 덮였다."……그 여자의 손길이 닿은 자치고 온전한 놈은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다."살았다.[생존 확률 1.4%로 복귀. 놀라운 생존 본능입니다.][체면을 버린 찌질함이 대영웅의 광기를 상쇄했습니다.]'입 다물어, 메티스. 목뼈가 두 조각 날 뻔했으니까.'무릎을 털며 슬금슬금 일어났다.여기서 섣불리 도망치면 이번엔 몽둥이가 날아오겠지.상대는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 무조건 달래야 한다."저, 저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일단 자리부터 옮기시죠. 이올코스 왕궁으로 갑시다! 왕실 곳간에 고기랑 포도주가 썩어 넘쳐납니다. 헤헤, 어차피 제 돈 나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삼촌 돈이지."***왕궁 별채의 석조 홀.탁자 위에는 통째로 구운 양 한 마리와 포도주 암포라 항아리 네 개. 시종들은 음식만 부려놓고 도망쳤다.콰직.헤라클레스는 칼도 없이 양 뒷다리를 뚝 떼어내 뼈째로 씹어 먹었다.나는 맞은편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마른침만 삼켰다.분위기가 살벌해도 너무 살벌하잖아. 뭐라도 말을 붙여야 했다.머릿속으로 이세계물의 클리셰를 떠올렸다.주인공이 뭘 하든 옆에서 '뭣……!?' 하고 경악해 주는 조연들.물 한 잔만 따라도 '설마 감히 저 물을 마시겠다고!?' 하고 해설을 깔아주는 그 양반들.강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그만한 교본이 없지."이야…… 뼈를 그냥 씹어 드시네요! 대단하십니다! 보통 사람은 이빨이 다 나갈 텐데, 역시 턱관절부터가 남다르십니다!""…….""대단해! 엄청나! 이게 그 유명한 올리브 몽둥이죠! 옹이가 아주 예술적으로 박혀 있네요! 균형감이 장난이 아닙니다! 어디서 이런 명품을 구하셨습니까? 설마 헤파이스토스 공방의 작품??"헤라클레스가 포도주 잔을 들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청동 잔이 찌그러졌다."네메아 숲에서 뽑았다.""뽑았다고요?? 그것도 뿌리째!?""그렇다."두 손을 모았다."스게에!! 역시 형님이십니다!!""……적당히 해라.""넵."즉시 입을 닥쳤다.대단해 시리즈는 그리스에서 통하지 않는구나.하긴 이 남자는 요람에서 뱀을 목 졸랐을 때부터 '대단해'만 듣고 살았을 테니까.헤라클레스가 찌그러진 잔을 마저 비우고 입을 열었다."그래서 네 과업은 뭐냐."과업이라.그 순간,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보통 이런 거물은 피 튀기는 거창한 싸움을 바라겠지.괴물을 죽이고, 신들과 맞서는 영광의 길.그렇다면 떼어낼 방법이 있다."아…… 제 과업이요? 별거 아닙니다."가볍게 손을 내저었다."과업이랄 것도 없어요. 그냥 저기 흑해 구석탱이에 있는 콜키스라는 시골 동네 가서, 양털 하나 훔쳐 오는 겁니다.""양털?""예. 털 뭉치 하나요. 괴물을 잡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박살 내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헤라클레스 형님께서 관심 두실 만한 일이 전혀 못 됩니다. 너무 시시하고 하찮아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죠."헤라클레스는 양 뼈를 툭 내려놓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시시한 게 낫다.""……예?""차라리 시시한 게 나아."헤라클레스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흉터로 얽힌 손바닥."내 이름이 뭔지 아느냐.""헤라클레스 아닙니까? 혀를 좀 굴려서 허큘리스?""헤라클레스. 헤라의 영광이란 뜻이지."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어머니가 내 목숨을 건지겠다고 지어준 이름이다. 그 여자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그 여자의 이름을 앞에 붙였지. 하지만 돌아온 게 뭐였는지 아나?"대답할 수 없었다."그 여자는 광기로 내 눈을 멀게 했고, 내 손에 칼을 쥐여 주었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발치에 뒹굴고 있던 것은 피투성이가 된 메가라와 내 아이들의 살점이었어."그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세상 놈들은 나를 대영웅이라 찬양하지만…… 내 손에는 영광 따위 묻어 있지 않아. 오직 지워지지 않는 피비린내뿐."가슴이 덜컥했다.'어…… 잠깐만.'속으로 메티스를 불렀다.'야, 메티스. 내 목덜미의 이거, 설마 저주 낙인 같은 건 아니지?'[확인 결과: 사용자 이아손의 공작 문양은 헤라 여신의 직속 후원 및 가호의 징표가 맞습니다.][현재 사용자의 칭호: 헤라의 챔피언]'근데 저 아저씨는 지금 나랑 동병상련인 줄 아는데?'[동상이몽입니다. 진실을 밝히실 경우 즉시 두개골이 함몰될 위험이 있으므로 침묵을 권장합니다.]화제를 돌리자. 밝고 건전한 쪽으로. 이를테면 커리어 얘기."그, 그래도 형님! 요즘 과업은 승승장구 중이시라면서요? 네메아의 사자에 레르나의 히드라까지! 세상 전부가 형님 얘기뿐입니다. 이대로면 과업 끝내는 것도 금방 아닙니까?"헤라클레스는 포도주 항아리를 통째로 들이켜더니 턱을 훔쳤다."에우리스테우스 그 버러지 같은 놈이 던져주는 일거리들 말이냐?"목소리가 담담해서 오히려 더 섬뜩했다."이번에는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 오라더군. 눈보라 치는 산을 밤낮으로 헤매서, 그놈을 맨손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갔지.""오…… 그래서요?""에우리스테우스 놈은 궁전 마당에 파묻어둔 청동 항아리 속에 기어 들어가 뚜껑을 덮고 나오지도 않았다. 멧돼지 숨소리만 듣고도 오줌을 지리면서 말이다. 보리 한 줌 쥐여주지 않았지. 사흘 굶은 배를 쥐고 궁전을 나와야 했어.""……예?""그전에 잡은 레르나의 히드라도 마찬가지다. 목을 지질 때 조카 이올라오스가 횃불을 들어주었다는 이유로 무효라더군. 온몸에 독혈이 튀어 살가죽이 벗겨졌는데, 과업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열 가지를 채워야 죄를 씻는다고 해놓고, 제멋대로 규칙을 바꾸고 있어."듣다 보니 기가 찼다.무한 추가 근무.산재 처리 없음.제멋대로인 성과 평가.신화 속 영웅은 무슨. 블랙기업에 잘못 걸린 비정규직 노동자잖아.전생의 억울함이 울컥 끓어올랐다."아니, 형님. 그딴 미친 짓을 왜 계속하고 계십니까?""……뭐?""악덕 고용주가 항아리에 숨었다면서요. 그럼 그 항아리째로 들어서 바다에 던져버리시든가, 아니면 그냥 일 때려치우고 쉬셔야죠! 사람이 밥도 못 얻어먹고 피 보는 일만 하다간 과로사한다고요!""하지만 죄를 씻어야…….""죄를 씻는 건 좋은데, 일단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냥 쉬었음 영웅 하세요! 일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어디 공기 좋은 데 가서 푹 쉬시라고요."그러니까 제발 내 배에는 절대 타지 말고 휴가나 가라고!헤라클레스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뭐지.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내가 너무 건방지게 말했나?"넌, 내가 무섭지 않나?""당연히 존나 무서운데요?"반사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조금 전에도 목 졸려서 스틱스 강 건널 뻔했잖아요! 형님 주먹 한 대 맞으면 제 머리통 터져요!!"피식."……그래."헤라클레스가 사자 가죽을 고쳐 맸다."모두가 나를 괴물이라 부르거나, 신들의 몽둥이로 여겼지. 나더러 쉬어도 된다고 말한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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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했다. 네 배에 타겠다.""아니, 쉬시라니까!? 노 젓는 게 어떻게 휴식이에요??"헤라클레스가 제 팔뚝을 툭툭 쳤다."그게 쉬는 거다.""아까 제가 분명 시시한 항해라고 했잖아요! 형님 급에 안 맞는다고요!""그래. 양털 뭉치 하나 주워 오는 시시한 일이라면…… 딱 내 휴식에 어울리는군. 에우리스테우스의 더러운 주둥이도, 피비린내 나는 괴물도 없는 곳으로. 그저 망망대해 위에서 노나 저으며 머리를 식히겠다."말이 통하지 않는다.이게 무슨 바나나 보트도 아니고.아르고 호를 익스트림 힐링 캠프쯤으로 아는 건가?그때,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헤라클레스 님, 물을 가져왔습니다."하늘색 머리의 시종 하나가 물병을 들고 걸어왔다.헐렁한 아마포 키톤. 구릿빛 피부. 물기를 머금은 사슴 같은 눈망울.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뭐지, 개 예쁜데……?'전생의 서브컬처 지식이 뇌리를 스쳤다.버서커 옆에는 으레 가련한 미소녀가 딸려 있는 법.비록 은발에 적안은 아니지만 저 정도면 충분히 그림이 되지."이쪽은 힐라스다. 내 시종이지."아이는 쟁반을 내려놓더니, 내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힐라스라고 합니다."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미성."아, 네…… 참 고우시네요. 근데 아가씨가 거친 뱃길을 버티실 수 있을지……."힐라스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저, 전 남자인데요.""에?"힐라스를 다시 한번 훑었다."……남자?""예. 건장한 사내입니다만."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확실히 가슴은 밋밋하지만…… 저 얼굴이 남자라고? 저 쇄골이랑 골반 곡선은 또 뭔데?'[고대 그리스 기준 지극히 평범한 미소년 시종입니다.][다양성 지표 상승: 원정대가 정치적 올바름(PC) 점수를 대폭 획득했습니다.][참고로 무지개는 헤라 여신의 전령입니다.]'그딴 점수 필요 없어!!'머리를 감싸 쥐고 휘청거리는데, 복도 끝에서 또 다른 재앙이 들이닥쳤다."이아손!! 내가 해냈어!!"흙먼지를 뒤집어쓴 아카스토스였다.손에는 풀이 잔뜩 묻은 양피지 뭉치. 키톤은 땀과 진흙으로 엉망진창."모집 포고문 다 붙였어! 이올코스는 물론이고 포키스, 보이오티아, 저 멀리 델포이 아폴론 신전 기둥에까지 전부 다 붙이고 왔다고!!""……명색이 로열패밀리면서 왜 제 발로 뛰어다니며 전단지를 돌려요? 시종을 시키든가 전령을 보내야지!""내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잖아! 우리 아르고 호의 모험인데!"아카스토스는 활짝 웃다가, 탁자 앞의 대영웅을 발견하고 굳어버렸다."헤, 헤라클레스 님?"심지어 홀 구석에서는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조율하고 있었다."오르페우스 님까지??"아카스토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세상에, 벌써 두 사람을 영입한 거야?? 헬라스 최강의 전사와 최고의 음유시인을!?""영입은 무슨, 지들이 멋대로 굴러 들어온──""남들이 평생 꿈도 못 꿀 일을 태연하게 해치우고 있어! 그 점이 짜릿해! 동경하게 돼!!""그딴 대사 치지 마세요!!""이제 시작이야, 이아손!"아카스토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헤라 신전과 아테나 신전에서도 신탁이 내렸대! '아르고 호에 오르는 자, 불멸의 명예를 얻으리라!' 지금 온 헬라스의 영웅들이 이올코스를 향해 달려오고 있어!"[지원자 수 급증. 선내 정원 초과 예상.][대규모 승선 오디션 개최가 불가피합니다.]"……뭐? 아, 안 돼!"***다음 날 아침, 파가사이 항구.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칼을 찬 자, 창을 든 자, 멧돼지 가죽을 뒤집어쓴 자.눈빛이 심상치 않은 사내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 있었다.첫 번째 지원자가 성큼 다가왔다. 온몸이 칼자국투성이인 거한."아르카디아에서 왔다! 지참금 문제로 말대꾸하던 장인어른 될 영감을 혼례 전날 술김에 패 죽이고 도망치는 길이다! 갈 곳이 없으니 배에 태워다오!""……예?"'장인을 패 죽였다고? 그걸 지금 지원 동기라고 말하는 거야?'두 번째 지원자는 입을 열기 전부터 탄내가 진동했다."보이오티아 출신이다! 옆집 놈이 내 염소를 훔쳐 가길래 그 집에 불을 질렀지! 바람이 세서 마을 절반이 같이 타버렸지만 후회는 없다! 불 다루는 것 하난 자신 있다!""방화범이잖아……."세 번째. 비쩍 마른 몸에 발만 기형적으로 큰 사내였다."로크리스에서 왔다! 특기는 달리기다! 세 개 도시의 부유한 과부들에게 혼인을 빙자해 금붙이를 털어먹고 튀었는데 아직 단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지! 야반도주라면 신들에게도 뒤지지 않는다!"이력서 스펙이 하나같이 강력 범죄 경력뿐."저기…… 여러분? 혹시 사람 안 죽여보고, 납치, 강간, 절도 전과 없고, 선박 면허증이나 응급처치 자격증 같은 거 있으신 분 안 계십니까?"지원자들이 일제히 나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았다.[경고: 지원자 전체와의 문화적 충돌 발생.][사용자의 무리한 요구가 고대 영웅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이게 왜 무리한 요구인데!?'[살인·약탈·강간 이력은 가산점 항목입니다.][올림포스 최고경영자의 주력 분야니까요.][참고로 경력직 우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