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각성하다
Ep.01 각성하다
[질문] 묻겠다.작성자 : 스킬박이 그대들에게 묻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헌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장비? 물론 중요하다. 스탯?말할 필요도 없지.하지만 장비와 스탯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휘황찬란한 무구를 걸치든.나 혼자만 힘이 999가 되든.그 짧은 팔로 빛나는 검과 지팡이만 붕붕 휘두른다면, 대관절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스킬이 없으면 헌터도 없는 것이다. 스킬이 없으면 게이트도 탑도 정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는 스킬을 무시하지 마라. P.S 그리고 이왕이면 수제 스킬북을 애용하라. 공산품보다는 그게 몸에 더 좋다. 그럼 이만. 아디오스.———- 얘 오늘도 왔네 - 아디오스 ㅇㅈㄹ ㅋㅋㅋㅋ- 님 이 개노잼 컨셉 언제까지 유지할 생각임?ㄴ 안 봐도 개찐따처럼 생겼을 듯. - 걍 흑화한 책쟁이 아님? 태산에서 스킬북 복제 성공한 뒤로 시장 다 뒤졌잖아. 줄폐업했다던데.ㄴ ㄹㅇ 하루아침에 백수되면 정신 나갈 만 함. ——————깜빡. 깜빡. 나는 눈앞의 댓글을 잠시 바라보다가,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너보단 잘생겼는데.…라고 쓰면 진짜 개찐따 같겠지.한참 고민한 끝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손을 내려놓았다.얼굴도 모르는 놈들에게 굳이 내 외모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다이아몬드 원석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댓글처럼 팩트로 때리든가.그건 그거대로 아프구나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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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열 평 남짓한 공간.원목 책장에는 스킬북이 빼곡했고, 둥근 창가에 놓인 토루토루 인형은 오늘도 혼자서 골목을 구경하고 있었다.보고 있으면 참 그럴듯해 손님 하나쯤은 들어올만한 가게였다. 실제로는 토루토루를 보고 들어온 학생이 인형 안 파냐고 물은 게 오늘 손님 접대의 전부였지만."하아암ㅡ"이곳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에, 그동안 열심히 모아둔 아르바이트비까지 합쳐 겨우 장만한 내 가게.서울 변두리의 주택가. 큰길에서 골목을 두 번 꺾어 들어와야 간판이 보이는, 좋게 말해 조용하고 솔직히 말해 유동인구가 없는 곳.이름하야 [채선호 스킬북] 되시겠다.사실 반년 전에 처음 이곳을 보러 왔을 때도 위치가 눈에 밟혔다. 그런데 막상 중개인의 안내를 받아 안에 들어와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어떠세요. 진짜 괜찮죠? 이 가격에 이 매물? 어딜 가셔도 못 구해." 현 주인이 쥬비리 영화를 좋아한다더니, 창틀 하나까지 나무로 수제 제작해 놓은 실내가 딱 내 취향이었던 것이다. 따로 공사를 할 필요도 없이 책만 가져다 꽂으면 될 정도로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인테리어 비용이 얼마나 굳는 거야, 이게.그쯤 되자 가게를 보여주던 중개인의 말도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스킬북은 물건만 좋으면 다 찾아와요. 헌터들이 돈이 없어요, 차가 없어요?”듣고 보니 과연 맞는 말이었다. 목숨 걸고 마수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좋은 스킬북을 구하는데 골목 몇 개 들어오는 수고를 아낄까.무엇보다 물건을 잘 만드는 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사거리 앞 좋은 목에 상가를 살 돈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훨씬. 그래서 계약했다. 책장에 직접 필사한 스킬북을 채우고, 간판을 달고, 개업 기념 할인 안내까지 나무문에 붙였다. 처음 며칠은 문에 달린 종만 울려도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서옵쇼!"첫 손님이었던 여자 헌터님이 가게 내부를 SNS에 찍어 올린 것이 꽤 화제가 돼서 찾아오는 손님도 몇 있었다."얘. 여기 감성 진짜 미쳤다. 아웃스타에 올릴까?"하지만 그렇게 가게를 연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인 태산기업이, D급 이하 스킬북의 대량 양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개새끼들.”이성적으로는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하니 또 욕이 나왔다. 스킬북이란, 원래 지독하게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다. 마석에서 끌어낸 마나를 펜촉에 일정하게 흘려보내며, 인류가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룬어를 한 글자씩 필사해야 한다.획이 조금만 어긋나도 마나가 제대로 흐르지 않고, 중간에 집중이 흐트러지면 잘 쓰던 페이지를 통째로 버리는 일도 다반사."야, 너 여기 잘못쓴거 아니냐?""으아아아아아아ㅡ!."손으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완성도가 조금씩 달랐다.그 까다로운 짓을 기계가 하기 시작한 것이다.쉬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몇만 번째 책에서도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룬어를 찍어내는 기계가.고백하자면, 처음에는 사실 콧방귀를 뀌었다. 양산품이 나와봤자 얼마나 쓸 만하겠는가. 저런 건 결국 불량이 터져 헌터인생 하나가 망가지고 나서야 수제의 소중함을 깨닫는 법이다.그렇게 생각하며 출시하자마자 비교용으로 한 권을 주문했고, 받아본 날 밤에는 같은 책을 세 번이나 다시 검수했다. …그런데 어디 하나 잘못된 데가 있어야지.룬어의 정밀도도, 마나가 흐르는 효율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내가 몇 시간을 꼬박 들여 잘 만들어낸 책과 별 차이가 없는데, 가격은 내가 쓰는 재료비보다 쌌다. 내 대가리에 신이 강림하여 룬어라도 해독하지 않는 한, 이걸 대체 무슨 수로 이기란 말이야."하느님요…?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요."설상가상으로 내 책장에 꽂힌 스킬북들은 대부분 태산의 생산 목록에 있었다.손님이 가격만 물어보고 나가는 날이 이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격을 물어볼 손님조차 오지 않았다.한국대 마력공학 석사.졸업할 때만 해도 이 정도면 어딜 가서든 먹고살 걱정은 없겠거니 했다. 대학원에서 밤을 새운 날이 며칠이고, 손에 익힌 룬어가 몇 개인데. 남들보다 좋은 책을 만들 자신도 있었다.다만 그 좋은 책을 남이 반의 반값으로 팔게 될 줄은 몰랐지.…그렇게 전도유망한 스킬북 제작자가 망한 가게 주인이 되는 데는 한 달도 필요하지 않았다.그나마 내 건물이라 월세가 나가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여기 앉아 숨 쉬는 것만으로 매달 집주인에게 돈까지 바쳐야 했다면, 인터넷에 쓴 글이 저렇게 점잖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아.”카운터 한쪽에는 쓰다 만 스킬북이 펼쳐져 있었다. 아침에 펴놓은 페이지 그대로였다.이거라도 마저 쓸까 싶어 펜을 집었다가, 빼곡한 책장을 보고 도로 내려놨다. 사실 완성하면 어디에 꽂을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판이다.결국 나는 옆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속보입니다. 창천길드의 유아라 헌터가 오늘 오전 성능 시험 도중 국립헌터원의 신규 훈련장을 반파했습니다. 해당 시설은 A급 헌터의 전력 공격도 견딜 수 있다고 홍보해 왔으나, 준공 사흘 만에 방어 결계가 완전히 파괴돼……』『전력으로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셨다고요?』『네.』『유아라 헌터의 전력을 감당하기에는 시설이 부족했던 셈이군요.』『아뇨.』기자가 다음 질문을 하려다 멈췄다.『…아니라는 건, 어떤 의미실까요?』『처음부터 전력으로 치지는 않죠. 시험인데.』나는 TV를 껐다.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나도 저 각성이란 걸 했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부질없는 이야기다.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주일 예배에 갔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주께서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주시지는 않습니다.”“다만 스스로를 믿고 온 힘을 다해 제 길을 걷는 이의 등 뒤에 손을 얹으시어, 한 걸음 더 나아갈 힘을 허락하십니다.”지금도 신앙심이라고 할 만한 건 없다. 그래도 그날 내 손을 감싸 쥐던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는 기억한다.말씀대로라면, 적어도 먼저 걸을 생각은 있어야 등을 밀어주신다는 건데….나는 아까 내려놓은 펜을 흘끗 봤다.요즘은 한 권만 더 만들어보자 싶다가도, 팔리지 않은 책들을 보면 그럴 마음이 쏙 들어가곤 했다. 오늘만 해도 새로 쓴 룬어보다 인터넷에 쓴 헛소리가 더 많았다."좀 부끄럽긴 하다…."게다가 사람이 각성할 확률은, 삼천 분의 일.가뜩이나 희박한 확률에, 성실하게 사는 사람의 등이나 밀어주신다는 신께 요행까지 바라기에는 아무래도 좀 낯이 간지러웠다.뭐. 통계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나 같은 인간이 각성할 리가 없다는 이야기다.밤새 책을 만들며 성공을 꿈꾸던 날들도 다 놔두고, 펜을 놓은 채 인터넷에서 찐따냐고 욕이나 먹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그러니 나에게 이런 기적이 찾아온 것은.필히 신의 얄궂은 장난일 것이다.[당신은 세계의 선택을 받아 각성하셨습니다.]【능력 : 직관(直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