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유일한 손님
Ep.02 유일한 손님
【한국 각성자 갤러리】[제목] : 스탯/장비/스킬중에 뭐가 젤 중요하다고 봄?역시 장비지? - 무조건이지 ㅇㅇ 대장장이쉨들 연봉 높은것만 봐도 ㅋㅋㅋㄴ 스탯 낮으면 그 장비 자체를 못 끼는데?ㄴ 그럼 스탯 올려주는 다른 장비를 먼저 끼면 되지.ㄴ …그런감?- 모르면 걍 외워라. 장비가 첫째. 스탯은 둘째요. 스킬은 셋째이니라. ㄴ 이게 ㄹㅇ인거시에요.- 왜 스킬은 아무도 언급을 안하누.ㄴ 그건 걍 요즘 마트만 가도 널려있는 거잖아.ㄴ 그래도 C급 이상 스킬들은 아직 희귀하긴 하잖슴.ㄴ 증권가 찌라시로는 수율이 안 나와서 그렇지, 지금도 C급 양산이 가능은 하다던데. 시간문제일 듯?ㄴ 그래서 태산주식 지금 사요? ㄴ 지금 너무 많이 올라서 조정 좀 받을 거임. 기다리다 곡소리 나올 때 풀매수 ㄱㄱ ——————뭐… 세상은 요지경이 됐다. 탑과 게이트가 등장하고, 각성을 받은 자들이 헌터가 되고. 나머지는 다들 아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류는 언제나 그랬듯이, 미지의 존재들을 대부분 제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다.몬스터에서 채취한 마석으로 도시의 불을 밝히고, 탑에서 가져온 기술을 제 것으로 만들며 문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다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룬어.내가 대학원까지 나와서 하루 종일 베껴 쓰고 있던, 바로 그 해괴한 문자들이다.문법도, 배열도, 도무지 통하는 규칙이 없었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언어학자와 암호학자들이 달라붙었지만, 제대로 번역해 낸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다.긴 세월 동안 우리가 알아낸 것은 단 하나.똑같이 그리면 똑같은 효과가 난다는 것.그러니 사진을 옆에 놓고 따라 쓰는 수밖에. 그걸 사람이 하면 수제 스킬북이고, 기계가 하면 요즘 마트에서 파는 공산품 스킬북이 되는 것이다.누구도 읽을 수는 없는데, 누구나 사서 쓸 수는 있는 것.그런 책을 만들며 먹고살던 내 눈앞에, 이런 문장이 떠 있었다.【능력 : 직관(直觀)】[??]▸ 마나를 소모하여 언어의 의미와 사물·생물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해합니다.그래서일까. 각성했다는 사실을 채 실감하기도 전에, 내 손은 곧바로 카운터 데스크에 놓인 사진으로 향했다. 아까 필사하다 만 스킬북의 원본 사진이었다. 아래쪽에는 각 획의 마나 분석도와 익숙한 성능표가 붙어 있었다.【가벼운 발걸음】▸ 등급 : E급 ▸ 효과 : 시전 동안 이동 속도가 10% 증가합니다.▸ 제한 : 급격하게 정지하거나 방향을 바꾸면 효과가 종료됩니다.▸ 습득 조건 : 마력 2 · 민첩 7 이상.E급 이동 보조 스킬. 가벼운 발걸음.조금 빨리 움직일 수는 있는데, 몬스터를 피하겠다고 급하게 옆으로 한번 꺾으면 그대로 끝이다. 그 주제에 적지 않은 민첩 조건까지 붙어 있어, 막 각성한 사람은 배우지도 못하는.유일한 장점이라곤 작은 마나 코스트 뿐인 스킬.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장점 하나 때문에, 이 스킬은 모든 신입 헌터들의 필수 스킬이 되었다.스테디셀러인 만큼, 나는 이 책의 어느 자리에 무슨 획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까지 모두 외우고 있다.딱 하나. 그 획이 무슨 뜻인지만 몰랐을 뿐이다.나는 사진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왔다.‘읽을 수 있다는 거지, 이걸.’글자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 뜻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뭉텅 빠져나갔다.그리고 그것이 내 몸을 타고 눈 안쪽으로 몰려드는가 싶더니, 사진 위의 글자들이 두둥실 떠올랐다.“…!!!”종이에서 떨어져 나온 획들이 눈앞에 겹쳐졌다. 아무 데나 구겨놓은 실타래 같던 형상에 앞뒤가 생기고, 조금 전까지는 글자 하나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던 덩어리가 문장으로 이어졌다.그러자 마치 본래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발바닥에 모은 마나를 진행 방향으로 밀어낸다. 그 힘을 5초 동안 유지하다가…아니. 이다음은 왜 이렇게 해놨지?나는 세 번째 줄을 다시 읽었다. 진행 방향을 자연스레 따라가는 게 아니라, 처음 발을 내디딘 방향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몸을 틀면 마나가 흐를 길이 어긋나니 효과가 끊기는 것이다. 어디가 문제인지 알겠다.그 생각을 하고서야, 사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 하나를 찍을 때도 사진부터 확대하던 내가, 지금 그 점을 왜 찍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틀리지 않게 베껴 쓰는 것밖에 못 하던 문장에, 손을 대고 싶어졌다.“…말도 안 돼.”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치달았다.나는 바로 사진을 내려놓고 펜을 집었다.아침부터 그토록 손에 잡히지 않던 펜이.지금은 정말 놓고 싶지 않았다. * * *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고개를 들고서야 바깥이 깜깜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반나절이 훌쩍 지나 있었다.책상 위에는 고쳐 쓴 종이가 수북했다. 처음에는 방향을 고정하는 구절만 바꾸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걸 바꾸자 앞뒤로 손볼 곳이 줄줄이 나왔다.덕분에 밥 먹는 것도 잊었다.그렇게 만들어낸 책 한 권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었다.【질풍의 발걸음】▸ 등급 : C급 · [최상급]▸ 효과 : 시전 동안 이동 속도가 20% 증가합니다.▸ 특성 : 이동 중 방향을 바꿔도 가속이 유지됩니다.▸ 습득 조건 : 마력 1 · 민첩 5 이상.“…하.”헛웃음이 나왔다.잘 모르는 이들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동 속도 증가량은 두 배에, 품질은 최상급이다.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풀리던 제약까지 없어졌는데, 정작 배우는 데 필요한 조건은 확 내려갔다.민첩에 스탯을 많이 몰아줄 필요도 없었다. 조건만 맞으면 각성한 첫날에도 배울 수 있는 C급 스킬이었다.나는 책을 한 번 더 펼쳤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야,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딸랑. 딸랑. 그때,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어, 오늘도 아직 계시네. 아저씨!”“…아직 20대야. 오빠라고 해.”“넵 아저씨.”아, 손님이 아예 끊겼다는 말은 조금 정정해야겠다.이 아이는 예외다. 물건을 사주지는 않아도, 우리 가게에 꾸준히 찾아오는 유일한 방문자였으니까.근처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인데, 할아버지와 어린 남동생, 셋이서 사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아이였다.얼마 전 밤늦게 작업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것 같다며 불 켜진 내 가게로 피신한 적이 있었다. 그날 잠깐 앉혀놓고 말을 나눈 뒤로 이따금 이렇게 얼굴을 비추곤 한다.그리고 일주일 전에는 각성했다는 소식까지 들고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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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각성 검사는 어떻게 됐어?”“히히. 저 전투계래요. E급!”“…그렇구나.”전투계 E급.사실 각성하고 받을 수 있는 판정 중에서는 가장 아쉬운 쪽이었다. 몸을 쓰며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정작 그 몸을 지켜줄 능력은 최하급이라는 뜻이니까.그런데도 아이의 얼굴에서는 실망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이게 어디예요. 저 이제 돈 벌 수 있잖아요. 할아버지 폐지 그만 주우시라고 하고, 집도 좀 괜찮은 데로 옮기고…”말하던 아이가 헤실 웃었다.“그냥 편하게 쉬시게 해 드리려고요. 할아버지도 이제 나이 많으신데.”“짜식.”나는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콩 쥐어박았다.“아, 왜 때려요오!”“옛다. 사탕.”사탕을 받은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한 번 째려봤다. 그래놓고 포장지를 까는 손은 재빨랐다.이내 사탕을 입에 넣고는 카운터 앞 의자에 올라앉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으흠ㅡ 으으흠ㅡ"…사실 저래 보여도 나 같은 놈보단 훨씬 나은 아이다.각성하자마자 개인의 영달보다,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나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저랬으면 좋았을 텐데.일단 졸업부터 하고, 자리부터 잡고. 뭐든 그다음에 해드리면 될 줄 알았지.괜히 사탕통 뚜껑을 열고 닫다가, 나는 손을 멈췄다.…뭐지?앞에서 빙글 돌던 아이의 몸 안에서 가느다란 빛이 따라 움직였다.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푸른 흐름이 팔과 다리로 갈라져 있었다.마나인가?어떻게 흐르는 건지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눈 안쪽으로 마나가 스며들었다.곧 아이의 옆으로 낯선 창이 펼쳐졌다.【대상 정보】▸ 이름 : 송민지▸ 스탯 : 힘 1.3 · 마력 1 · 체력 2.7 · 민첩 8.4▸ 능력 : 재빠른 몸놀림 [E급]나는 민지와 그 옆의 창을 번갈아 봤다.생물의 상태를 이해한다더니, 남의 상태창까지 읽을 수 있는 능력이었나.신기한 마음에 내용을 훑어봤지만, 적힌 능력만큼은 썩 반갑지 않았다.재빠른 몸놀림.각성할 때 민첩 스탯 일곱 개를 추가로 받고 시작하는 능력이다.뒤로 갈수록 스탯을 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작은 수치는 아니다.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거지.일곱 개를 더 받고 나면, 그 밖에 전투에서 써먹을 만한 효과는 없다.“민지야. 너 이번 주말이 시험이라고 했지?”“네. 한국헌터사관학교요.”한국헌터사관학교.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각성자들이 몰리는, 국내 최고의 헌터 양성 기관이었다. 원래 E급은 서류 심사에서부터 걸러졌지만, 민지는 할아버지 덕에 응시 자격을 얻었다고 했다.…그래서 아마 떨어질 것이다.시험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해서, 다른 지원자들과의 격차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그렇게 생각하던 내 눈에, 조금 전 완성한 스킬북이 들어왔다.“장비하고 스킬은? 준비는 좀 했고?”“장비는요. 지원금이 3백만원이나 나왔거든요! 그걸로 기초 장비는 맞췄는데….”“스킬은?”“아직이요. 장비 사고 나니까 돈이 없더라고요. 생각보다 엄청 비싸던데요?”민지는 멋쩍게 웃더니,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왜요? 아저씨가 하나 주시게요?”말해놓고도 실실 웃고 있었다.“그래. 줄게.”나는 카운터에 놓인 스킬북을 집어 아이 앞으로 내밀었다.“…어?”민지는 웃던 얼굴 그대로 책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농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내가 책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내밀고 있자, 그제야 슬그머니 손이 올라왔다. 그러다 막상 책에 닿기 직전, 또 멈췄다.“잠깐만요. 진짜… 진짜요?”“그래.”“아니, 이걸 왜 주세요? 이런 거 못해도 백만 원은 하지 않아요?”…그거보다는 훨씬 비쌀 거다 꼬마야.무려 각성 하자마자 배울 수 있는 C급 스킬북이다. 게다가 최상급.그래도 제대로 값을 알려줬다가는 받겠다는 말도 못 할 테니,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시험 잘 보고 오라고.”내가 책을 조금 더 내밀자, 민지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표지를 쓸어보던 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오빠.”“왜.”“진짜 고마워요. 저 꼭 헌터 돼서, 돈 많이 벌어서 갚을게요.”“애가 갚긴 뭘 갚아. 그리고 이럴 때만 오빠냐?”“그럼 다시 아저씨라고 해요?”“됐다. 그냥 오빠 해.”민지가 책 뒤로 얼굴을 반쯤 숨기며 웃었다.“그럼 저 연습하러 갈게요. 합격하면 제일 먼저 여기 올 거예요.”“그래. 문 열어둘게.”민지는 책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진짜 갈게요!”“가 빨리.”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리고, 아이의 뒷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금세 멀어졌다."사탕 가져가란 말을 못했네…."나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뭐.하나 더 만들면 되지.앞으로 시간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