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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자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버렸습니다. (3)

흡혈귀가 약물로 태양을 극복함 — novelpia.com · All chapters

빙의자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버렸습니다. (3)

연구소의 새벽은 쥐죽은 듯 적막했다. 지하 3층 특수 분석실로 들어섰다. 하필 노트를 두고 왔다. 내가 워낙 악필인 데다 글 자체도 소설 커뮤니티 밈과 화학 공식을 뒤섞어놔서 읽더라도 괴상한 낙서로 알겠지만, 그래도 찝찝하긴 매한가지다."파트리시온은...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펜탁스는...각성하라...!"구시렁대며 들어서던 중 기괴한 광경을 목격했다.구석 자리, 모니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박 선배의 뒷모습.타다닥!화면에서는 시뻘건 에러 코드가 떠 있었다.[오류: 타깃 단백질 결합 실패. 거부 반응 확률 88.4%]“제발... 제발 좀 붙어라, 빌어먹을 놈아...!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박 책임 연구원이 피눈물이 맺힌 눈으로 엔터 키를 난타했다. 어라, 저 양반.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조용히 다가가 한마디 던졌다.“선배님.”“히익!”박 선배는 기겁하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사색이 된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김, 김 선임...! 제발 팀장님이나 보안과에 말하지 말아주게! 오해일세! 나 진짜, 어, 딴 뜻으로 그런 게 아니야! 이번 달 배급 끊기면 나 진짜 끝장이야...!”손을 싹싹 비는 꼴이 처량했다. 파트리시안 놈들은 규율이 쓸데없이 엄격했다. 규정을 조금만 어기더라도 형개 배급을 끊거나 최악의 경우 햇빛 아래 산 채로 던져진다. 그걸 우려하는 거겠지.비는 선배를 뒤로하고 단말기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 띄워진 것은 설하 신경 및 설인두 수용체 복원 화합물의 구조식.“고자질할 생각 없으니까 진정하세요. 그보다 선배님, 이거 펩타이드 결합 각도부터 완전히 틀렸는데요.”“...어?”선배의 의자를 옆으로 쓱 밀어내고 키보드를 낚아챘다.“뱀파이어 면역 체계는 일반적인 L형 단백질이 들어오면 결합막이 즉각 분해 효소를 뿜어서 쪼개버립니다. 정면으로 들이받으니 에러가 88%나 뜨죠.”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기계처럼 미끄러졌다.“여길 억지로 뚫으려 하지 말고, D형 아미노산으로 거울 보듯 구조를 싹 뒤집으세요 그럼 그대로 프리패스입니다. 그 상태로 신경 수용체 틈새에 쏙 꽂아 넣으면 끝나요. 어디까지나 계산이지만.”타타타탁!그동안 계산만 했을 뿐 돌려보지 못했건 공식을 막힘없이 때려 넣었다.딱 소리가 나게 엔터를 눌렀다. 박 선배의 계정으로 로그인되어 있던 감마밴드가 다시 작동했다.위이이잉!본체의 팬이 웅웅거리더니 모니터 속 연산 진행률이 단숨에 100%를 찍었다.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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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완료: 수용체 결합 성공률 68.2%]영롱한 푸른빛의 화면 앞에서 박 선배의 입이 턱 빠질 듯 벌어졌다. “어...? 어어...? 뭐, 뭐야! 내가 수년간 매달려도 안 되던 게...!” "그러게요. 저도 계산만 한건데. 진짜 될줄은 몰랐네요."“자... 자네, 뭔가? 이걸 대체 어떻게...?”“제가 이론에는 빠삭하거든요.”나는 씩 웃었다.* **잠시 연구동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어제 배운 혈액 탄산수를 만들어 박 선배에게 건넸다. 박 책임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더니, 이내 습관처럼 매캐한 연기를 훅 내뿜었다.“...피만 처먹고 사니까 사람이 미치겠더군. 그거 아나? 이 담배, 이것도 그냥 분위기만 내는 거야. 이 놈의 몸뚱이는 니코틴이랑 타르도 안 받거든.”“말도 마세요. 전 밥맛도 서러운데 아랫도리도 완벽하게 기능을 정지했습니다. 서질 않아요, 심영이라니까요?”“푸하하! 쿨럭, 쿨럭!”박 책임이 연기를 뿜으며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거 참, 김 선임 아직 젊은데 억울하긴 하겠네! 하긴, 나도 그래. 피가 아래로 돌지를 않으니 원. 어차피 가족계획 때문에 진작 정관수술을 하긴 했다만.”"아, 그러고 보니 결혼하셨던가요?"한참을 낄낄거리던 박 책임의 얼굴에 아주 잠깐, 그림자가 졌다. 아차, 굳이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냈다 싶었다. 선배는 어색한 공기를 털어내려는 듯 금방 얼굴을 바꾸며 우쭐거렸다."에이, 김 선임. 내가 설마 자네처럼 솔로인 줄 알았나? 어?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 지금 밖으로 나가도 20대인 줄 알아! 여자들이 줄을 선다고! 하하!""아, 예..."선배는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봐봐! 우리 집사람이야. 어때? 예쁘지? 우리 딸도 그렇고.""인물이 훤하시네요.""검열이 있긴 한데, 가끔 편지를 보낼수 있거든. 생활비도 꼬박꼬박 부치고. 어휴, 그래도 진짜 얼굴 한번 보긴 해야 하는데..."선배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소장 놈한테 사정사정해서 겨우 허가받아 가지고 있는 사진이야. 내가 끌려올 때 갓 돌 지난 핏덩이였는데, 저번 달에 외출 허가받고 밤에 몰래 보니까 글쎄...유치원을 다니는 거야. 불쌍한 내 새끼...아빠가 해외 출장 나간 줄로만 알고...”박 책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을 쓸어내렸다.“1년에 딱 한 번, 연구소 지원 차량에 선팅 진하게 하고 나가서 유치원 통학차 타는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는 게 내 유일한 낙일세. 김 선임,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망원경 너머로 훔쳐보는 거 말고. 밤에라도 떳떳하게 다가가서 내 새끼 손 한번 꼭 잡아주고 싶어. 그거 하나 바라고 이 악물고 버티는 거라네.”듣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텁텁했다. 여기 있는 건 그냥 평범한 딸바보 아저씨거늘. 하필 피빨이들한테 한번 잘못 걸려서 멀쩡한 가정이 생이별을 당하고, 기약도 없는 어둠에 갇혀산다.'가족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 그게 규율이고, 뱀파이어가 가진 다른 문제도 있으니까...'그 문제를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기로 했다.잠시 침묵하던 박 선배는 피우다 만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불쑥 입을 열었다.“하지만 김 선임.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뱀파이어라는 이 몸... 정말 저주이기만 한 걸까?”“예? 피 빨고 낮에 타 죽는데 저주가 아니면 뭡니까?”순간 식겁했다. 이 인간, 파트리시안 꼰대들 밑에서 일하더니 그새 물든 건가? 뱀파이어 우월주의라도 생긴 걸까?“거 참, 김 선임! 자네는 나보다 더 좋은 대학 나왔잖아! 젊은 친구가 왜 이리 답답하게 굴어. 이런 생각 안 해봤나?”박 선배의 눈빛이 진지하게 번뜩였다."생각해보게. 이 뱀파이어라는 거, 과학적으로 봤을 때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육체란 말이지? 적은 양만 먹어도 힘은 무지막지하게 세지, 암에도 안 걸려, 늙지도 않아! 세포 재생력은 또 어떻고? 반수치사량은 인간의 수십 배. 치명적인 방사선 아래에서도 버틸 수 있지. 만약 흡혈 충동이랑 햇빛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이내 주먹을 불끈 쥐는 박 선배.“이게 어떻게 괴물인가? 늙어 죽지도 않고 병도 안 걸리는데! 신인류지!”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신인류...?’뇌세포 속에서 전생의 기억들이 교차했다. AI니, 트랜스휴머니즘이니,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뻗어나가겠다던 실리콘밸리 광인들의 미친 비전들. 돈 빨아먹으려고 친 허풍들이 태반이었지만, 듣다 보면 가슴 뛰는 구석이 없진 않았지.불쑥 미친 전기차 사장이 밀어붙이던 슬로건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선배님.”“응?”“뱀파이어는 동면 능력이 있잖아요. 심장 멈추고 뇌세포 손상 없이 몇십 년씩 자는 거.”“그렇지. 완벽한 대사 정지상태로 말이야.”“이건 어때요? 거추장스러운 냉동 수면 장치 없이 우주선에 태워서 화성이나 목성까지 그냥 보내는 거예요! 우주 방사선도 씹어먹으니 차폐벽 무게도 줄일 수 있고!”“...어?”“와, 신이 내리신 테라포밍 전용 하드웨어 아니에요? 우리 화성 한번 가보죠?!”박 책임이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계단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김 선임, 자네 진짜 보통 또라이가 아니야! 화성? 테라포밍? 난 내 자식 손 한번 잡아볼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스케일이 아주 우주급이네!”“맞잖아요! 잠깐, 그럼 흡혈 충동 잡고 낮에 돌아다니게 만들면, 노벨 생리의학상에 물리학상까지 챙길수 있는 거 아니에요?”우리는 흥분해서 낄낄거렸다."와! 그거 좋네! 당장 하자!"“노벨상 타러 갑시다!”손에 든 피 탄산수 컵을 힘차게 부딪쳤다.“인류의 위대한 번영을 위하여!”***그날 밤부터 우리는 완벽한 공범이 되었다.박 책임의 감마밴드 최고위 권한과 합성 능력이 내가 가진 원작의 지식과 결합하자 일은 일사천리.혹시 들킬까 봐 로그는 매일 새벽마다 빠짐없이 지웠다.낮에는 펜탁스 연구실의 노예, 밤에는 지하실 불법 연구원!두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일 밤을 꼬박 새웠다. 많은 시간을 지새우며 노심초사한 끝에 드디어 첫 결과물이 나왔다."성공할까?""성공하겠죠!"첫 테스트 약물을 만든 뒤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 대상은 나. 혹시 무슨 부작용이 터질지도 모르지만, 과학에는 언제나 희생이 필요하지!"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기록해 주세요, 선배님.""오케이. 캠 켰다. 시작해."가슴을 졸이며 스포이트로 약을 빨아들인 뒤 혀에 떨어뜨렸다."별맛 안 느껴지는데요?""그야 복구되는 중이니까. 혹시 모르잖나? 일단 이거 먹어보게."박 선배는 서랍에서 묵은 초콜릿 한 조각을 꺼내 건넸다. "음..."처음 1초, 뭔가 맛이 도는 듯했다."어? 어배님? 이거, 여가..."닿는다. 아득하게 손을 뻗어, 잊었던 감각을 다시 냉큼 붙잡아서."어?"혓바닥이 뻣뻣하게 굳었다.“우웨엑!”싱크대로 달려가 입에 든 걸 전부 뱉어냈다. 쓴맛이 혓바닥에 눌어붙어 도통 떨어지질 않았다. 수도를 틀어 입을 헹궈냈다."뭐야? 실패한 거야?"당혹감을 느낀 박 선배가 물었다."하... 시발, 선배님. 이거 아무래도..."실패다. 빌어먹을 피에 흐르는 저주가 반응한 게 분명했다. "분명 성공했거든요? 느껴질 뻔했는데... 바로 사라졌어요."이후의 실험은 연달아 실패. 성분을 바꿔도 안 되고, 아예 복합적 수단으로 약을 섞거나 해도 안 됐다.선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하아...안 되네. 젠장, 안 돼! 또! 도대체 그놈의 주술이니 저주니! 그게 말이나 돼? 사람이 달에 가는 시대에!”속이 바짝 탔다. 미각은 그나마 가능할 줄 알았는데, 여기도 뱀파이어들이 그렇게나 떠드는 피의 저주가 작동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비과학, 빌어먹을 저주!정문으로 덤비면 무조건 주술이 차단한다. 그렇다고 내가 주술사도 아닌데 저주를 어떻게 풀겠어? 그랬다면 진작 마법사들이 뱀파이어 문제를 다 해결했으리라."어쩔 수 없죠. 일단 먹고 해요.""그래야지...""탄산수 타드릴까요?""아니, 김 선임. 나는 그냥 캡사이신 듬뿍 부어주게. 속이 답답해서 원!"나도 같이 따라서 소스를 부어 마셨다."어억! 캑! 캑!"아오씨, 너무 많이 부었나. 더럽게 아팠다. 뱀파이어 종족 특성인지 눈물도 안 나왔다. 급히 박 선배가 물을 가져와 건넸다."그러게 천천히 마시지 그랬어? 여기! 우유 가져다줄... 아, 그럼 토하지... 제길. 얼음물로 가져올까?""괜찮습니다. 에휴... 뭐, 제 실수니까요."답답하다. 이게 삶이라고?중2병 같은 저주의 인생 주절대는 나부랭이를 이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답답해졌다. 입은 여전히 맵고. 이럴 거면 고통은 왜 느껴지는 거지? 크흐흑, 붉은 달의 세계에 고통과 증오뿐이다...크크큭...잠깐, 고통?휴게실에서 박 책임이 피에 맵닭소스와 탄산수를 타 마시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우리가 맛은 못 느껴도, 탄산이랑 캡사이신은 어디까지나 통각이잖나? 맛은 아니지만 맛 같은 게 느껴지는 거잖나.’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목욕하던 아르키메데스가 느낀 환희가 이거였구나."선배님, 존나 좋은 방법 떠올랐습니다."뜬금없는 외침에 박 선배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끔빡였다."뭐, 뭔데? 갑자기 왜 그래?"나는 화이트보드로 달려가 마커를 쥐었다."자, 선배님. 이놈의 저주가 정확히 어떤 주술적 기전으로 돌아가는진 몰라도, 최소한 정규 미각 경로만큼은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화이트보드에 혓바닥과 뇌를 잇는 굵은 선을 찍 긋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X표를 쳤다.첫 번째 실패에서 한 가지 배운게 있다.미각 수용체나 신경을 직접 살려내려 드는 순간 혈관에 각인된 저주가 즉각 발동한다. 지금 상황에서 정면 돌파는 무리."하지만 삼차신경은 어떻습니까?""그게 뭔 소린가?"내 제안에 박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김 선임. 삼차신경으로는 통각이랑 온도만 전달된다고. 그걸 어떻게 미각에 써먹어?""그건 저도 알죠!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피에 캡사이신을 타먹고 탄산을 타서 먹은 겁니까? 그 감각은 느껴지잖아요!""...!"이제야 내 말이 이해가 됐는지 박 선배는 침음성을 냈다."자네 말대로라면...""저주가 이쪽 감각은 감시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여길 우회로로 사용할수 있지 않을까요?"나는 설명을 시작헀다."삼차신경으로 들어오는 자극은 멀쩡하잖아요. 매운맛, 탄산, 차갑고 따끔한 자극들...그러니까 약으로 뇌 속의 신경과 감각을 위한 샛길을 살포시 잠깐 열어주는 겁니다. 평소엔 '맵다! 차갑다!' 하고 넘어가던 신호를, 뇌의 미각 피질로 슬쩍 흘려보내는 거죠."박 선배의 눈이 가늘어졌다."그리고 살아 있는 다른 감각들을 재료 삼아서 뇌한테 맛을 다시 재구성하도록 하는 겁니다. 어때요?"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말을 이었다."아, 현실의 좋은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감각 치환 실험, 시각장애인 상대로 한거 있잖아요.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혀에 전극 달고 쏜거. 아시죠?""아...브레인포트 실험?"인간 시절 학부 때 읽은 흥미로운 뇌과학 논문이 있다.실험은 간단했다. 먼저 시각장애인의 혀에 전극을 붙인다. 그 다음 카메라가 받아들인 흑백 영상을 변환해 혓바닥에 붙인 전극 격자에 미세한 전기 자극으로 쏘아준다. 놀랍게도, 피험자들은 몇 주의 훈련 끝에 혀끝의 전기 촉각으로 눈앞의 물체 형태나 사람의 윤곽을 '보기' 시작했다.뇌는 생각보다 유연하다. 어느 신경이 막히면 우회로를 찾아 필요한 정보를 재구성한다. 반복해서 학습하면 익숙하지 않은 정보를 다른 감각으로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지.그것을 신경가소성이라고 부른다."갑자기 혓바닥에 눈알이 생겼을린 없잖아요? 뇌가 혀끝의 신호를 시각 정보로 인식한거죠. 인간도 훈련하면 그게 되는데, 하물며 잘린 신경도 이어 붙이고 적응력도 높은 뱀파이어는 어떨까요?"박 선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약물로 감각 사이의 샛길 문턱만 살짝 낮춰준다면?살아 있는 삼차감각과 후각, 그리고 과거 인간 시절의 미각 기억. 뇌는 그 셋을 다시 한데 묶어 이 '맛' 이라는 감각을 실시간으로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박 선배는 이내 현실적인 의문을 던졌다."그럼 저주는?""그게 이 꼼수의 핵심이죠."나는 화이트보드의 X표를 툭툭 두드렸다."가설이지만, 저주는 정규 미각 경로를 직접 건드릴 때만 작동하는거 아닐까 합니다. 냄새만 해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흔히 맛이라고 부르는 것의 태반은 원래 후각입니다. 그런데 음식이 역겹게 느껴지기 전까진 코 자체는 멀쩡하단 말이죠.""아! 그렇지. 냄새도 기가 막히게 맡고, 매운 건 맵고, 탄산도 톡 쏘잖아? 정작 혀로 맛을 느끼는 순간만 끔찍하더라고.""바로 그겁니다! 저주는 오직 혀의 미각 신경 하나만 담당하는게 분명해요. 나머지 감각은 분명 해당 안될지도 모릅니다."저주는 문 하나만 담당하는 문지기다. 미각을 복구하거나 접근하려는 시도만 악착같이 틀어막을 뿐, 우회로를 타고 돌아간다면 이 고지식한 문지기는 게을러서 가만히 있을지도 모른다. 회피할 수 있다."당장의 목표는 하나, 약효가 도는 시간동안 저주를 우회하고 미각을 복구하는 겁니다. 밥 한 끼 인간답게 먹을 시간만. 그 정도면 차고 넘치잖습니까?"박 선배의 입이 떡 벌어졌다."맞아! 그건 된다...진짜 돼! 감마밴드 다시 켜! 당장 구조식 다시 짜세!"우리는 곧바로 다시 밤샘 작업에 돌입했다.그렇게 밤낮없이 갈려 나간 지 닷새, 운명의 새벽 4시 17분.감마밴드가 모니터에 한 줄의 텍스트를 띄웠다.[가상 시뮬레이션 완료][우회 경로 신호 전달률: 91.8%]“됐다...!”환호성을 지를 틈도 없이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밤새 합성기를 돌리고 정제를 거듭한 끝에 작은 앰풀 하나를 완성했다.“김 선임... 이번엔 진짜 괜찮겠지?”박 선배가 스포이트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제가 먼저 갑니다!”스포이트를 넘겨받아 혀 밑에 세 방울을 떨어뜨렸다.입안이 싸했다.박하사탕을 문 것처럼 턱 안쪽에서부터 관자놀이까지 화한 기운이 번져나갔다.서랍 깊숙한 곳에서 지난번 먹다 남긴 초콜릿을 꺼냈다. 성찬이라도 치르듯 짙은 갈색 조각을 쪼갰다.1차 실패 때 겪었던 그 구역질나는 맛이 떠올라 순간 턱이 굳었지만, 이내 질끈 눈을 감고 초콜릿을 혀 위로 올렸다.그 순간.“...!”코 뒤로 묵직하고 진한 카카오 향이 확 치고 올라왔다.전에는 흙먼지와 밀랍 맛이 났건만, 혓바닥에 닿자마자 체온에 부드럽게 녹아내렸다.잠시 뒤, 진한 단맛이 혓바닥을 부드럽게 감쌌다.달았다. 초콜릿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구나.“어때? 김 선임, 대체 어떤가?!”내 안색을 살피던 박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초콜릿을 삼킨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닦아냈다.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선배님.”“어, 왜 그러나?! 또 쓴맛 나나?!”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존나 맛있어요.”박 선배는 내 손에 들린 스포이트와 초콜릿을 통째로 낚아챘다."오오오오! 이게 단맛이구나! 우와아아!""선배님! 조용히! 조용!""알았어! 으허허허!"성공했다.드디어 첫 돌파구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