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자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버렸습니다. (4)
빙의자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버렸습니다. (4)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으! 이거지!” 달다. 쓰다. 쌉싸름한 원두와 연유의 향이 혀를 감도니 울거 같다. 인간시절에는 흔한 싸구려 캔커피거늘, 인간 시절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천원짜리 캔커피가 지금은 그 어떤 디저트보다 달콤했다. "으흐흐흐...! 진짜다! 커피야! 커피의 맛이야...!"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은 박 선배는 부처님 사리라도 다루는것마냥 캔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피도 아니고...” “선배님, 눈물 닦으세요. 캔에 눈물 들어가면 짭니다.” “이 사람아, 짠맛도 느껴진단 소리잖아! 소금 맛이라도 한번 보고 싶네, 진짜!” 우리는 새벽 텅 빈 비상계단 구석에 웅크려 앉아 캔커피를 홀짝였다. 고작 30분 후면 끝날 싸구려 감각이다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모래알과 촛농 맛밖에 안 나던 혓바닥에 찾아온 기적. "참나, 펜탁스 이 새끼들 진짜 인권위에 고발해야되요. 우리는 쓰지도 못할 자판기 갖다놓은거 봐요. 인간 직원용이라지만, 희망고문도 정도껏 해야지!" 선배도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자판기의 버튼 하나를 툭툭 쳤다. "그러게 말일세. 그림의 떡이라니까? 이놈의 이 탄산수! 1500원짜리 말고는 도통 뽑아먹을 게 없었어. 내가 오죽하면 피에 탄산수 타고 맵닭소스 타고 이랬겠어?" "에이, 그건 잘하신거죠. 저 그거 아니었으면 미각 회복 못 떠올렸거든요. 절반은 박 책임 선배님 덕이죠!" 나는 박 선배와 눈을 마주하더니 낄낄 웃었다. “아, 커피 마시니까 갑자기 배고프네요. 다음에는 뭐 먹을까요? 안들키게...치킨은 어때요?" "아서라, 냄새는 뭐로 설명할건데? 우리 말고 다른 연구원이나 경비들도 생각해야지." "약 주고 우리랑 동참시키죠? 먹히지 않을까요?" 내 제안에 박 책임은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쏟아냈다. "이야! 그거 좋네. 역시 후배님이 젊어서 팽팽 돈다니까! 하긴, 여기 뱀파이어들. 다 나랑 자네처럼 혈족에 합류한지 몇 년밖에 안된 사람들밖에 없거든. 콜라 맛좀 보면 아주 환장할걸." 듣고보니 제법 괜찮은 생각 같다. 좀 믿을만한 사람들 꼬셔서 동참시키면 좋지 않을까. 이건 나중에 한번 계획에 넣어봐야지. "아무튼 선배님,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형수님도 만나보고, 집밥도 한번 드셔볼수 있겠네요.” 내 농담에 박 선배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야, 말도 마라. 네가 우리 집사람 밥을 먹어봐야 해. 더럽게 맛없어.” “예? 에이~괜히 그러시는거죠?” “진짜야, 인마! 우리 집사람이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라 그런가 칼질도 서툴렀거든. 연애할때부터 요리해준다고 뭘 했는지 아나? 된장찌개에 사과를 썰어 넣질 않나, 미역국에 설탕을 들이붓질 않나. 나 연애할 때 그거 먹고 응급실 실려 갈 뻔했다니까. 혹시 교포라 한국 집밥 환상 있나 본데, 절대 아니야!” “아니, 그렇게 맛이 없는데 왜 먹고 싶으시대요?” 장난스레 웃던 선배의 목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러게나 말이야. 참 더럽게 맛없었거든?” 선배는 찌그러진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멈췄다. "그리워지더라고." 허공을 보는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제대로 끓이지도 않고 소금 범벅에, 멸치 똥도 제대로 안 따서 그 씁쓸하고 짠 된장찌개인데...어느날 그렇게도 먹고 싶지 뭐야. 조금이라도 맛없다 하면 와이프가 그렇게도 잉잉대던 목소리가 듣고 싶지 뭐야?" 어느새 선배는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김 선임, 나 진짜...많은거 안 바래. 그냥, 그 맛없는 찌개 식탁에 앉아서, 우리 딸 얼굴 한번 보면서 같이 식사 한번 하고 싶어. 그게 다야.”" 그 모습에 나는 꺼내려던 말을 입 안에서 멈추고 굴렸다. 저 영포티 아재가 느끼는 감정을, 나는 뭐라 위로해줘야 할까. 할 수 있는 한 좋은 이야기를 해주자. “...먹을 수 있겠죠.” “엉?” “지금 약효는 30분이잖아요. 약 안정화 방향만 잡히면 반나절은 멀쩡히 유지할 수 있어요. 선배님, 성공하면 퇴근하고 몰래 집 앞에 찾아가는거 어때요? 딸 얼굴도 보고. 형수님이 끓여준 된장찌개도 드시고 오시죠.” "자, 잠시만. 그게 되겠나? 지금 편지도 소장 놈이 겨우 허가해줘서 보내는 건데..." "이번 라이칸스로프 신경독 건만 잘 풀리면 한번쯤은 허가해주지 않을까요?" 뱀파이어들이 세운 가장무도회의 규칙이 엄격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체를 노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흡혈충동을 관리 잘 하는 밤의 상황이라면 어느정도 쏘다니는 건 문제 없다. 우리 연구소가 좀 특이한 거다. 어쩌면 될 지도 모른다. “한번 해보지! 김 선임! 자네는 진짜 내 은인이야! 내가 진짜 어떻게든 보답하지!” “보답이요? 필요 없고 치킨이나 사주세요. 후라이드로” “겨우 후라이드로 되겠어? 비싼거! 아주 비싼거로 시켜! 요즘은 무슨 골든 프링클 이런거 많잖아! 다 사줄게!” 선배는 낄낄거리며 빈 캔을 우그러뜨렸다. 우리는 입술에 맴도는 싸구려 커피 향을 다시며 계단을 내려갔다. * * * 나흘 뒤 정오. 깜깜한 연구실 스피커에서 조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 연구원 및 경비 인력은 즉시 1층 중앙 로비로 집합하라! 반복한다. 즉시 집합하라!!” 서류를 정리하던 연구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뭔 일 났어요? 헌터 습격은 아닌거 같고...” 한 직원이 외쳤다. “본사에서 감찰관 나왔대! 불시 감찰이야! 묻지 말고 뛰어!” 뱀파이어 연구원들과 인간 노예 연구원들이 뒤섞여 1층으로 몰려갔다. 나 역시 박 선배의 뒤를 따라 계단을 밟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갑자기 왠 감찰?' 파트리시온 쪽에서 보낸거 같은데, 왜 하필 햇빛 쨍쨍한 대낮에 기어 와서 지랄인지... 사소한 잡생각은 1층 메인 로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사라졌다. "...!" 보이지 않는 밧줄이 목을 조여온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서늘하게 짓눌렸다. 로비에는 진작 다른 하급 뱀파이어 직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있었다. 쿵! 나도 어느새인가 무릎을 꿇은 상황이었고. '이게 상위 혈족의 힘인가?' 절대 떼어낼 수 없는 위압감이 나를 얽맸다. 벌써 박 선배 또한 벌벌 떨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애써 고개를 든 순간. 나는 한번 더 경악했다. “규율이 바닥에 떨어졌구나. 잡종들을 너무 오냐오냐하며 풀어놓더니 아르젠타리의 천박한 감각에 너무 물들었어.” 로비 중앙에는 단정하게 넘긴 갈색 올백 머리의 연미복 차림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가슴팍의 붉은 장미 브로치가 번뜩였다. ‘...에드워드 코넬리우스?’ 미친, 저 괴물새끼가 왜 여이 있지.? <피망록>에선 지금으로부터 반년 뒤에야 성운시로 내려와 조선총독 놀음을 하며 도시를 들쑤시는 놈이다. 주인공 헌터의 활약 때문에 파견왔다는 설정이었지. 본래라면 그래야 했는데...나비효과인가? 에드워드의 발치에는 펜탁스 바이오의 한국지부 연구소장과 우리 팀장이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소장, 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대답해보게.”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나직하고 나긋나긋한 중저음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로비 전체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송, 송구합니다! 각하!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즉시 시정...!” “시정? 그래, 당연히 시정해야지.” 에드워드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지하 주차장에서 온 걸까. 검은 방탄복을 입은 사병 둘이 무언가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힉...!” 내 옆에 엎드려 있던 박 선배의 입에서 찢어지는 숨이 터져 나왔다. 사병들이 밧줄로 묶인 두 사람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입에 재갈이 물린 중년 여성. 그리고 겁에 질려 파들파들 떠는 어린 여자아이. 나는 저 둘을 안다. 박 선배가 품속에 고이 간직하던 사진 속 두 모녀. “여, 여보...! 은아야...!” 박 선배가 비명을 질렀다. 기다렸다는 듯 뒤쪽의 사병들이 어깨를 붙잡고는 끌고와 에드워드 앞에 내리꽂았다. “소장, 내가 흥미로운 걸 얻었네. 이게 뭔가?” 에드워드가 손짓하자, 뒤의 부하가 편지 몇 장을 꺼냈다. 원래도 하얗던 박 선배의 얼굴은 석고상마냥 생기를 잃어버렸다. "편지를 보냈더군? 나 참, 혈족의 은혜를 입고 영생을 얻었거늘...과거의 연을 끊지 못하고 가축들과 가족놀이라니? 소장, 어째서 이걸 내버려뒀지? 무도회의 규칙 위반 아닌가? 어째서 방기했나?"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던 연구소장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쳐들었다. "가, 각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안부나 몇 번 전달하랬더니 제 호의를 악용하고 저 모르게..." “소, 소장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소장님이 분명 허락하셨잖아요! 생활비 보내는 것도, 1년에 한 번 멀리서 보는 것도 허락해주셨잖아요! 이 정도는 규칙상 허용됐다 했잖아요! 저, 저는...” "벌레가 말이 너무 많구나." 에드워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직후 에드워드의 눈이 붉어졌다. 붉은 기운이 바닥에서 피어오르더니 박 선배의 몸을 더 강하게 짓누르며 휘감았다. "내가 곧 규칙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이건 위반 행위로 간주한다. 잡종." 빌어먹을, 피의 지배다. 하급 뱀파이어에 대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상위 혈족의 구속. "하지만 잡종, 듣기에 너는 이 연구소에서 꽤 중요한 위치에 있더군. 그러니, 반성할 기회를 주마." "반성...네! 하겠습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뭐든 하겠다고? 갸륵하구나." 에드워드는 웃었다. 순간 깨달았다. '저, 저 개새끼! 설마!' 박 선배의 몸이 삐걱거리며 일어났다. 어벙벙한 얼굴을 보니 제 의지와 상관없는 움직임. “자. 직접 네 손으로 과거를 처리하거라..”에드워드는 손가락으로 선배의 가족을 가리키며 선언했다. "...네?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그건..."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선배에, 에드워드는 사악하게 미소지었다."...혈족의 명예에 누를 끼친 죄를 반성하고, 진정한 밤의 신민으로 거듭나거라."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선배가 비명을 질렀다."안돼! 제발! 잘못했습니다! 이것만은!" 선배는 울부짖으면서도 핏줄이 곤두선 다리를 억지로 끌며, 제 의지와 무관하게 결박된 아내와 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여, 여보...? 당신이야...?” 여자가 입을 연다. 어린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유치원생 나이대쯤 됐을 소녀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김 선배를 본다. "어...아빠?" “아, 으, 은아야. 안돼. 안돼! 제발-” 박 선배의 비명이 목구멍 안으로 틀어막혔다. 눈동자의 초점이 풀리고, 핏줄이 안구 전체를 뒤덮더니 입술이 뒤로 말려 올라가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에드워드가 속삭였다. “먹거라."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더 볼 자신이 없어서. 찢어지는 소음이 로비 한 가운데를 울린다. 비명, 울음, 절규. 왜 이리 긴 거야. 제기랄. 소리는 점차 잦아들더니 꺽꺽대는 숨소리만 이어지다 곧 멎었다. 한동안 기괴한 물 빨아들이는 소리, 무언가를 씹는 소리만이 귓가를 파고들다 잠잠해졌다. 신이시여. 눈을 떴다. 박진석 책임연구원은 입가부터 전신을 피로 적신 채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야 쓸데없는 잔여물을 다 털어냈군. 정리는 끝났으니 업무로 복귀해라.” 에드워드가 무심하게 몸을 돌리려던 찰나.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박 선배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으, 으아아아아아아!!” 선배는 바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설마, 에드워드 놈에게? '미친! 선배! 멈춰요!' 아니었다. 박 선배가 향한 곳은 바로 근처, 두꺼운 암막 블라인드로 햇빛을 가려둔 창문 쪽. "막아!" 경비들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선배는 블라인드를 잡아뜯었다. 검게 칠해진 유리창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와장창! 정오의 살인적인 햇빛이 로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망쳐!" “피해! 물러서!” 홀에 있던 수십 명의 흡혈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림자 속으로 몸을 던지던 그때. 빛이 닿는 순간, 박 선배는 폭발하듯 타올랐다. 선배는 비명 한마디 없이, 불덩어리가 된 채 비틀거리며 걸어왔다.덩어리는 무너져내리는 두 팔로 바닥의 두 시신을 와락 끌어안았다.불꽃이 일가족을 집어삼켰다.얼마나 지났을까. 불길은 잦아들고, 깨진 유리창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재가 흩날렸다. 그 난리통 속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미동없이 서 있었다. "쯧, 반성할 기회를 줬건만...잡종은 역시 잡종이군." 에드워드는 옷소매에 튄 재를 털어냈다. 깨진 창문에서 뻗어 나온 햇빛의 가장자리에 있음에도, 놈은 비교적 멀쩡했다. 피부가 살짝 붉게 달아오르고 몸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게 전부. 빌어먹을, 이게 상위 혈족의 체급인가. 에드워드는 코를 찡그리며 그림자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비상벨이 울리더니 깨진 창문 위로 셔터가 내려와 태양빛을 차단했다. “당장 치워라. 그리고 저 잡종의 자리로 안내해라. 무슨 오염된 사상을 품고 있었는지 샅샅이 털어봐야겠으니.” “예, 예! 각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소장이 기어가듯 일어나 앞장섰다. 잠시 후, 연구실 벽을 따라 연구원들이 등을 바짝 붙이고 늘어서 있었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상태. 에드워드의 부하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각하...지워진 로그가 있어 복원했더니 미인증 연구 데이터가 발견되었습니다! '미각 신경 및 감각 우회 복원’에 관한 건입니다.” 에드워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각?" “예. 인간 시절의 음식 맛을 느끼게 해주는 화합물 모델링인 듯합니다. 단독 연구로 진행된 모양인데...”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감마밴드 접근 권한은 선배에게 있었으니까. “미각이라니? 붉은 달의 신민이, 가축의 사료를 삼키고 싶어서 위해 몸을 고치려 해?” 에드워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조리 삭제해라. 붉은 달의 귀족에게 그런 불순한 발상 따윈 필요 없다." 소장 놈은 지시를 수행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삭제하시겠습니까?] 사라진다. 선배가 수년간 쌓아 올렸던 노력이. [삭제 진행 중-] 우리의 숱한 그 긴 시간이. [삭제되었습니다.] 며칠 전 우리가 완성했던 모든 희망이. 엔터키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에드워드는 흥이 깨졌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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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후, 연구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깨진 창문은 다시 복구되었다. 재와 남은 잔해는 진작 청소부들이 치워버린지 오래. 나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로비 한구석으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대리석 바닥이었건만, 내게는 한 가족이 아직도 거기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하하..." 나는 웃었다. 너무 충격이 크면 사람이 웃을수도 있다는걸 깨달았다.별안간,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의문들이 또렷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제 알겠다. 왜 원작 소설의 헌터들이 눈이 뒤집혀 흡혈귀들의 목을 자르러 다녔는지. 주인공은 왜 제 몸을 시한부 마인으로 만들면서까지 그토록 지독한 증오로 몸을 불살라가며 싸웠는지. 숱한 결사와 비밀 조직들이 왜 대화조차 거부하고 이 괴물들을 불태우려 했는지. 왜 소설 속 원로와 귀족 뱀파이어들이 하나같이 사이코패스라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제야 뼛속까지 완벽하게 이해헀다. 저것들은 대화가 통하는 생명체가 아니다.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 남의 고통을 영양분 삼아 연명하는 혐오스러운 기생충! 깨달았다. 소설 후반부, 원로들이 태양광 극복 약물의 시도를 연구소째 폭파하며 없애버렸는지. 멸망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피의 순수성 따위를 부르짖으며 핵전쟁으로 인류와 공멸을 택했는지도. '저 새끼들은, 세상이 나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하기에,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틀을 벗어나는 변화는 모조리 짓밟겠지. 내가 너무 순진했다. 고자를 탈출하고 치킨이나 먹겠다고? 이런 놈들이 있는 세상에서, 그런 소박한 행복 따위는 애초에 허락될 리가 없다. 문득, 전생의 게임이 떠올랐다. 변화를 거부하고, 게임이 망해가든 말든 제 밥그릇만 지키겠다고 게거품을 물던 악질 유저들. 사람들은 그들을 원숭이라 불렀다. 저 유저들과 다를바 없으니, 저 놈들 또한 원숭이다. 아니, 피에 미친 혈숭이다! 나는 대리석 바닥을 응시했다. “박진석 씨...다 기억하겠습니다.” 에드워드 놈은 데이터를 지우면 다 끝날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어쩌나. 그 분자 구조식 하나하나가, 모든 세계의 진실은 내 머리속에 흉터처럼 뚜렷한걸.이 지긋지긋한 중세 파시스트들의 세상. 인간을 가축으로 보고, 동족을 노예로 부리며,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살기를 강요하는 썩은 세상.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저 괴물들은 기어코 인류와 함께 멸망을 선택하겠지. 좋다. 앉아서 죽느나 일어나 죽느나 똑같다면...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미친 혈숭이 새끼들. 좆같은 붉은 달의 세계. 내가, 전부 정상화시킨다.EP 1. 빙의자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버렸습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