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빙의자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1)
그래서 빙의자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1)
박진석 책임연구원이 죽은 후, 나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생각했다. 백날 열내봐야 지금 상태로는 저 혈숭이 새끼들의 시스템에 흠집 하나 낼수 없다.'이건 장기전이다. 마라톤 같은 거지. 빡돈다고 좆빠지게 뛰어봤자 내 힘만 빠진다.'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혈숭이들은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 뒤집어 말하자면 피 없으면 쫄쫄 굶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세상의 지엄한 법칙에 구속된 존재다. 혈마법이니 피의 능력이니 하지만 그것도 다 지 피랑 마력 깎아서 쓰는 거고.큰 덩어리를 바로 상대하는 게 어렵다고?살라미 전술처럼, 한 조각 한 조각 썰 듯 문제를 잘라 하나씩 해치우는 거다.그리고, 1원칙 사고를 사용할 시간이다.허구한 날 화성에 가겠다며 입을 털던 전기차 사장 로켓맨이 입에 달고 살던 그 개념 말이다.남들이 해오던 전통이니 신화니 하는 껍데기를 전부 벗겨내고 밑바닥의 물리적 사실 단위로 문제를 쪼개보는 거다.자, 원로 놈들은 수천 년 동안 쓸데없이 중2병 시를 읊어대며 밑의 사람들을 가스라이팅했다. 저주니, 피의 숙명이니, 밤의 지배자니 하는 개소리들!낭만을 다 걷어내고 순수한 생물학적 관점에서 뜯어보면 본질은 허탈할 정도로 단순하다.뱀파이어란?햇빛에 타버리고 주기적으로 남의 피를 들이부어야만 뇌가 돌아가는 불량 생물이다.미사여구 다 걷어내고 보면 그냥 특이한 면이 있는 환자.그렇다면 왜 인간 사회에서 숨어지내며 클랜 밑에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을까?답은 명확하다.낮에 활동을 못 하니 직장을 못 구하고, 먹을수 있는 게 피뿐이니 마트에서 장을 볼 수도 없다. 인간 사회의 경제망에 낄 수가 없으니 필연적으로 난민보다도 비참한 지하실 신세가 되는 거다.원로 놈들이 던져주는 피와 은신처에 목줄이 묶이고 노예 신세로 살아온 진짜 이유도 오직 그 생물학적 결함밖에 없다.지금까지는 방법도, 기술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굴종하며 살아왔겠지.하지만 누군가 그 결함을 지워버린다면?햇빛에 타지 않고 음식으로 영양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순간, 뱀파이어는 그냥 세금 꼬박꼬박 내고 주말에 치킨 뜯는 불로불사의 모범 시민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다.원로들의 보호도 클랜의 규율도 불필요해지리라.태양을 극복하고 흡혈 충동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어 전 세계 뱀파이어 사회에 무료 배포하자.그 순간, 피와 공포로 유지되던 가장무도회 체제는 밑바닥부터 통째로 무너져내린다.겸사겸사 피로 묶인 상위 혈족의 지배도 끊어버리면 완벽하겠지.뱀파이어가 저주받은 생물이라고? 틀렸다. 영생 시도 한번 해보려다 골치 아픈 버그에 수천년동안 시달려온 불쌍한 생물이지.버그는 고치라고 있는 거고, 그러려면 내가 이 연구소를 점거해야 한다.연구소 내부 사내 정치도 마찬가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씩 해결해보자.우선은 내가 총괄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어떻게 하면 내가 위에 올라갈 수 있을까?'심심하면 우릴 갈구는 소장과 팀장 놈이 떠오른다. 당장 칼빵을 놓는 건 하수.대체 불가능한 병목이 되어 실권을 쥐어야 한다. 마침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소장실 앞 복도를 지나가는데, 두꺼운 방음문 틈새로 고성이 새어 나오고 있지 뭔가.“어쩔 거냐고, 고 팀장! 당장 내일모레가 아르젠타리 본사 정기 감사야! 신경독 3차 샘플이랑 최종 임상 데이터 보고서 못 올리면 우리 둘 다 묶여서 태양 보게 생겼어!”“그, 그러게 코넬리우스 경이 날뛸 때 좀 말리시지 그러셨습니까! 다 포맷해버렸는데 저더러 어쩌라고요!” “내가 말릴 수 있는 짬이냐? 이 새끼야?! 네가 팀장이잖아! 알아서 복구해놔야 할 거 아냐!”조태식 연구소장과 고진우 팀장이 고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저 새끼들은 또 왜 갑자기 지랄이지?'평소에는 목에 깁스를 하고 하급자들을 인간과 뱀파이어 상관없이 공평하게 개돼지 취급하던 두 혈숭이들이, 지금은 아주 안쪽에서 발광을 하고 있었다.'내막은 뻔하지.'현재, 우리 연구소의 진짜 물주인 아르젠타리가 준 대 웨어비스트 신경독 관련 정기 보고가 코앞.비교적 피의 순수성보다 돈에 환장하는 흡혈귀들답게 에드워드 같은 사이코보단 유연하다만, 계약을 어기고 수익을 깎아먹는다면 감찰관이 파견된다. 최악의 경우 처형이겠지.근데 어쩌나? 하필 그 프로젝트의 핵심 인력이 박 선배였고, 에드워드 그 혈숭이 놈은 오염된 사상을 치운답시고 박 선배의 컴퓨터를 공장 초기화시켜 버렸다.물론 연구소 서버에 백업 데이터가 있긴 하다만 소장 놈과 팀장 새끼는 같은 박사니 뭐니 해도 뇌가 굳은 놈들. 이 자리도 정치질과 낙하산으로 앉은 놈팽이 새끼들이니 이해할 수 없었겠지.'그리고, 그걸 이해할 줄 아는 놈이...'나뿐이다. 일단 업무 시간에는 박 선배랑 나랑 주로 그 파트를 담당했으니까. 본사가 원하는 데이터를 바로 갖다줄 수 있는 인간은 이 연구소에서 나밖에 없다!심호흡을 한 번 하고, 굳게 닫힌 소장실 문을 두드렸다.똑똑.“누구야! 눈치 없이 지금...!” “소장님. 선임연구원 리처드 킴입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문이 벌컥 열리더니 팀장 놈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며 성질을 부렸다.“야, 킴! 지금 상황 안 보여? 바빠 죽겠는데 잡종 놈이 어디서...!”'지도 잡종 주제에...'유신 시대에 모가지 물렸다고 뻗대는 꼴이 짜증 나긴 했지만 일단은 숙이자.“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뭔데!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알지? 응?”“웨어비스트 신경독 촉매 반응식, 제가 복원할 수 있습니다.”소장실 안의 시간이 멈췄다.두 꼰대의 붉은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해 튀어나올 듯 박혔다.“...뭐?”조태식 소장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듯 튀어나와 내 멱살을 잡을 듯 다가왔다.“자, 자네...방금 뭐라고 했나? 복원?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아?!”나는 고개를 팍 수그리고 에겐남 사원 흉내를 내며, 주머니에서 구겨진 수첩을 꺼내 들어 설명했다.“그, 그게 아시다시피...그 프로젝트 박 책임님이랑 저랑 같이 리드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데이터 라벨링이랑 촉매 테스트 보조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데이터 삭제되기 전에 분자 구조식이랑 자료도 기억하고요.”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48시간 안에 뽑아낼 수 있습니다.”“진짜냐? 진짜로 가능해?!”화이트보드로 걸어가 마커를 쥐었다. 그리고 신경독의 전구체 합성 단계와 반응식을 일필휘지로 쓱쓱 적어 내려갔다.물론, 가장 핵심적인 배합비는 쏙 빼놓은 채로. 병목을 쥐려면 중요한 건 아껴놔야 한다.“여기까지가 2단계 공정입니다. 마지막 활성화 단계는 제 개인 컴퓨터에 암호화되어 있구요.”“뭐? 잘됐네! 그럼 바로 시작...”“그게 말입니다...”나는 바로 뜸을 들였다. 두 상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뭔데? 대답해!”“이게 공정이 워낙 까다로워서, 박 책임님이 쓰시던 장비가 아니면 안 됩니다. 게다가 저한테는 감마밴드 접근 권한도 없고요...”소장과 팀장은 칠판을 살피더니 곧 표정을 바꿨다. 비록 완성본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놈들이니 저 수식만 봐도 진짜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좋아! 좋아, 아주 좋아!”소장이 내 어깨를 으스러져라 쥐며 침을 튀겼다.“오늘부로 자네가 제3특수실험실 책임자야! 박진석이 하던 프로젝트, 자네가 전담해서 전부 이끌어! 본사에도 임시 책임연구원이라고 결재 올릴 테니까!”“가, 감사합니다, 소장님! 그럼...제3실험실의 단독 보안 권한과 감마밴드 API도 제 계정으로 열어주시는 거죠?”“다 가져가! 토큰이든 시약 발주권이든 다 승인해 줄 테니까, 빨리 모레 정오 전까지 본사 쪽에 보낼 안건 정리해!”빙고.소장 놈은 위기 탈출용 구원투수가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겠지. 나도 기분좋다. 덕분에 박 선배의 권한을, 단 5분 만에 내 손에 넣었다.삐빅!새로 발급받은 키카드를 제3실험실의 문에 댔다. 주인 잃은 책상 위에는 맵닭소스와 탄산수의 희미한 레몬 향이 망령마냥 맴돌았다.“박진석 선배님. 방 좀 빌리겠습니다.”짧게 묵념을 올린 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니터를 켜고 내 관리자 계정으로 접속했다.'됐다!'감마밴드를 이제 온전히 쓸 수 있다. 그뿐인가? 시약 및 기타 필요한 소재 발주 전결권도 확보했다.“운이 좋군.”키보드를 두드리며 펜탁스 바이오의 내부 시스템과 인사 규정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책임연구원이 된 만큼, 이전에는 열람조차 불가능했던 보다 상위 보안 정보와 내규에 접근할 수 있었다.그때, 화면을 스크롤하던 내 눈에 기괴한 조항 하나가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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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탁스 바이오 운영 내규 — 제44조 (비상시 자산 보전 및 지휘권 승계)]① 본 규정은 외부 적성 세력(이하 헌터 등)의 습격, 테러 및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발생 시, 지적 자산의 보전과 지휘 체계의 연속성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② 지부 총책임자(연구소장) 및 차석 관리자(연구팀장)가 생체 신호 정지 또는 지휘 불능 상태에 이를 경우, 본사 지적 자산의 파기 및 외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장 생존 인원 중 상위 인원에게 지부의 전권과 전 시설 통제권을 즉시 인계한다. “...어?”마우스를 쥔 손이 우뚝 멈췄다.몇 번이고 조항을 다시 읽었다. 이거, 지정생존자 조항이잖아? 대통령이 암살당하면 총리나 장관한테 권한대행 주는 그런 규칙 말이다.'원작에서 헌터들이 지부 털어먹을 때마다 회사가 바로 안 무너진 이유가...이거였나?'내규의 존재 이유는 타당했다. 이 붉은 달의 세계는 뱀파이어 자기들끼리도 암투와 암살이 일상. 서로 간에 피를 빨면 힘이 더 강해지고, 햇빛 아래에서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게다가 헌터들의 테러가 밥 먹듯이 터지니, 아르젠타리 입장에서는 수많은 산하 조직들이 알아서 굴러가게 하려면 필수불가결했겠지.한데, 현재 펜탁스 바이오 한국지부의 서열은...1위는 조태식 연구소장 (정식 생화학 학위, 50년 전 취득).2위는 박진석 책임연구원 (사망).3위는? 나, 리처드 킴 임시 책임연구원이다 이거야.고진우 팀장? 명목상으로는 높긴 한데 그 새끼는 정치질로 올라온 애송이고.만약, 소장이랑 팀장 이것들이 한날한시에 죽어버리면?그 순간 펜탁스 내규상, 이 연구소의 모든 권한은 나에게 떨어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직이니 몇 달 후 본사에서 나를 그대로 연구소장에 앉혀 줄지, 아니면 다른 놈이 파견 올지는 미지수다.'그래도 저 두 놈은 무조건 쳐내야 해.'중간관리직의 비애니 뭐니 식으로 봐줄 수가 없다. 평소에도 사람들을 쪼아대며 들볶고, 지 스트레스 받으면 인간 직원들도 혈족이 되지 않는 선에서 물어뜯던 놈들이다.만약 내가 하려는 연구 시도를 저놈들이 알면? 무조건 내 등에 칼을 찌르고는 윗선에 기대어 더 진한 피를 받아 처먹으려 들겠지. 제 세계관에 갇혀 더 나은 걸 생각 못하는 혈숭이들에게 기대하면 바보다.여하튼, 돌파구가 생겼다.'어떻게 쳐낼지는 일단 차차 생각해 두고...'실무진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들지부터 고민해 보자.***업무시간임에도 연구소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자판기 옆 그늘진 구석. 담배를 나눠 피우던 하급 뱀파이어 둘이 벽에 기댄 채 나직하게 말을 섞고 있었다.“...불 좀 똑바로 붙여 봐. 손을 왜 그렇게 떨어? 파킨슨병이야?”“너 같으면 안 떨리겠냐? 어제 그 꼴을 보고도?”“목소리 낮춰.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들으라고 해! 차라리...”말을 잇지 못한 사내가 필터까지 타들어 간 꽁초를 바닥에 짓이기며 메마른 헛웃음을 흘렸다. “씨발... 봤잖아. 그 어린 여자애를... 일가족을...”“알아! 아니까 입 닥치라고! 제발!”인간 직원들이 일하는 쪽의 공기도 다를 바 없었다.쨍그랑!복도 한편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류를 들고 지나가던 직원이 헛디디며 비커를 떨어뜨린 모양이었다.“죄, 죄송합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직원은 사색이 되어 무릎부터 꿇었다. 맨손으로 유리 조각을 쓸어 담다 손바닥이 찢겼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 따윈 없다. 연구실 문을 열고 나오던 뱀파이어 관리자가 걸음을 멈춘다. 코를 킁킁거리자 직원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피 묻은 손을 소매 속에 쑤셔 넣었다. 관리자는 혀를 쯧 차고 지나쳤다. 다들 심리적으로 한계에 몰려있다.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혼자서는 이 거대한 연구소를 못 돌린다. 소장과 팀장을 치워버린다 치자. 운 좋게 에드워드 놈도 조진다 치고.실무진이 협조하지 않으면 망한다. 재수없게 내부고발로 감찰관이 내려오면 다 끝이지. 복도를 걸으며 눈에 밟히는 얼굴들을 담았다. 선배의 빈 의자만 쳐다보는 연구원들. 포맷 명령을 수행하고 나서 우울함에 늘어진 전산실의 주임. 그밖에도 괜찮은 위치에 있는 괜찮은 사람들이 일부 있다. 공통점은 박 선배와 각별했고, 이번 사태에 충격을 받아 이 미친 체제에 질릴 대로 질린 사람들이란 거지.하지만 목숨이 걸린 판에 감정만 믿고 섣불리 찔러볼 수는 없다.궁지에 몰린 사람은 살기 위해 동료를 팔아넘기기도 한다. 섣불리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간 밀고당해 내 목부터 따이겠지.블라인드가 쳐진 어두운 1층으로 나오자 한 사내가 벽에 기댄 체 우두커니 서 있다.경비반장이다. 제 손으로 한 일가족의 잿가루를 제 손으로 쓸어 담아 치웠지.평소 박 선배와 종종 담배를 나눠 피우며 허물없이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현재는 근무는 커녕 대리석 바닥을 멍하니 응시했다.'차근차근 가자.'시간은 많다. 옥석을 가려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