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미각을 얻었다
절대미각을 얻었다
“흠.” 나는 옥상 평상에 정좌를 틀고 앉았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또 벼락 맞을 걱정은 없다는 뜻이다. “아 아. 으으… 목소리 진짜 적응 안 되네.” 벼락 맞고 깨어나서 몇 분.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여자아이가 됐다.키는 140쯤. 팔다리는 짧고 볼살은 말랑말랑한 개쳐귀여운 여자아이가.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 몸은 이렇게 여초딩이 되어버린 반면.힘은 맨손으로 아보카도 씨도 으스러뜨릴 것 같은 괴력이 되었다. “사실 제일 처음 걱정한 게 웍 다루는 거였는데.” 여자가 된 걸 확인하고 처음 든 생각은. ‘왜 여자가 됐지?’가 아니라. ‘이 귀엽고 가녀린 몸으로 웍질 어떡하지?’였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해야할지.몸은 여초딩이 됐지만 엄청난 괴력을 얻었다. 괴력 여초딩.팔다리가 짧아진 걸 제외하면 오히려 요리하는 데에는 유리하다. 중식 요리사가 되는 길에는 문제가 없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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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 천소. 이 새벽부터 무슨 일이냐. “원장님. 제가 원래 여자였었나요?” -…? 당연하지. 고아원 나가서 무슨 일 있었냐? “아니에요. 잘 지내고 있어요. 다시 주무세요.” 원장님과의 전화.원장님은 나를 애초부터 여자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원장님 뿐만이 아니다.애초에 내가 이 세상에 여자로 존재했던 것처럼 되어 있었다. [주민등록증][강천소] 민증에 적힌 이름도 강천수에서 ‘강천소’로 바뀌어 있었고.주민번호 뒷자리도 3에서 4로 바뀌어 있었다. 챙겨온 짐도 모두 여자의 것으로 되어 있다.애초부터 여자로 존재한 게 되어버린 상황. “무슨 웹소설도 아니고…” 진짜 웹소설 같은 상황이다.별 짓 다 해봤지만 꿈은 아닌 게 확실. 이게 현실이다.받아들일 수밖에. 고아 때부터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현실은 외면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그럴 시간에 할 일을 해야지. 어쨌든 중식 셰프가 되고 싶다는 내 꿈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을지도 모른다.여자 중식 셰프는 희귀하니까.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그때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시간은 오전 6시 반.출근할 시간이다. 여초딩이 되었어도, 일은 해야지.나는 옷을 갈아입고 호텔 중식당 <홍원>으로 출근했다. 옷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몸에 딱 맞게 변해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네~” 떨리는 마음으로 주방으로 출근. 웬 여자아이가 주방에 들어오는데 다들 그러려니 했다. ‘진짜 아무도 신경 안 쓰네.’ 주방 사람들도 나를 여자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아, 어제 온 그 설거지 알바? 이렇게. 심지어 내가 튀김을 지적한 것도 똑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어제 쟤가 튀김 온도 맞췄다며?’, ‘저 작은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설거지 하는 거냐’ 같은 소리들이 들려왔으니까. 어제 있었던 일은 모두 그대로.하지만 내 성별만 바뀌어서 세상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신 차리고 설거지 하자!’ 나는 뺨을 한 번 쫙 쳤다. 그래. 오히려 좋은 거지.원래 마음가짐대로 설거지에 집중하면 된다. 어제 수셰프가 말한 대로다.내 역할은 설거지. 나는 확 작아진 사이즈의 근무복에, 허벅지까지 다 덮는 장화를 신고 주방으로 나갔다.내 몸보다 큰 앞치마를 하고 소형 고무장갑까지 꼈다. 그리고 설거지를 시작하려는데. ‘너, 너무 높아!’ 싱크대가 너무 높았다.아니, 내 키가 작아졌다.겨우 머리가 싱크대에 닿을 정도. “저기 있어요. 발판.” 그때 어느새 출근한 다른 설거지 알바가 와서 말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구석에 있는 플라스틱 상자를 가리키고 있었다.초록색의, 식재료 등이 배달될 때 사용되는 그 상자. “아, 감사합니다.” 나는 잽싸게 플라스틱 상자를 가져와 뒤집어 놓았다. 올라가보니 높이가 딱 맞았다.이제 설거지할 수 있겠다. 쏴아아- 싱크대 물을 틀고 설거지 시작.야채통들이 엄청 컸지만, 다루는데 문제는 없었다.힘이 워낙 강해졌으니까. 대신 팔이 짧아서 수세미질 할 때 팔을 더 많이 왔다갔다 해야 됐다. 하지만 속도가 느려져서는 안 된다.짧아진 만큼 더 빠르게. 나는 햄스터가 쳇바퀴 굴리는 것마냥 열심히 와다다다 설거지를 이어나갔다. 금방 런치 타임이 다가왔다. “웍! 웍 빨리!” “오더 다시 불러!” “9번 유린기 나갑니다!” “야! 불이 약하잖아!” 런치 타임의 주방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수라장이었다. 기름 냄새와 열기가 주방을 가득 채우고.끝없이 밀려오는 주문. 주고 받는 셰프들의 고함소리.한눈팔면 순식간에 불어나는 설거지. 그 사이에서 나는 멈추지 않고 짧을 팔을 열심히 움직였다. ‘어제보다도 안 힘들어.’ 그런데 아무리 설거지를 해도 지치지 않았다. 어제는 갈수록 팔에 힘이 빠졌는데.말랑한 몸이 된 지금은 오히려 힘이 넘쳤다. 쓱싹쓱싹- 촤차차차찻- “웍 나왔습니다!” “뭐, 벌써?” “오늘 설거지 왜 이렇게 빨라?” “저 애가 웍을 한 손으로 든다고…?” 내 몸만한 무쇠 솥과 웍을 한 손으로 휙휙 돌려가며 설거지.셰프들은 한 번씩 설거지 파트를 보고는 깜짝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설거지에 집중.특히 웍은 조금이라도 밀리거나 잘못 씻으면 요리 퀄리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가, 감사…” 촤차차차찻- 다른 설거지 알바가 힘겨워 보여서 몇 개는 도와주기도 하고. 몸이 가벼워지니 설거지도 할 맛이 났다.그리고 남자일 때보다 시력도 좋아진 느낌. 구석구석까지 잘 보여서 깔끔하게 닦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그렇게 정신없이 런치 타임이 이어졌다. 슬슬 새로운 몸으로 하는 설거지도 적응 됐다.적응이 되다보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바쁘게 움직이는 셰프들.한 쪽에서는 화려한 웍질과 함께 불길이 타오르고.반대쪽에서는 전채 요리를 예술 작품처럼 섬세하게 플레이팅하고 있다. 적정 온도의 기름에 들어간 튀김이 빗소리를 내며 익어간다.셰프는 정확한 타이밍에 튀김을 기름에서 뺀다. 배합된 소스의 향과 기름향이 풍기고.볶음 요리에는 재료들이 완벽한 순서로 들어가 각기 다른 익힘 정도를 완성. 이 주방에는 그야말로 내가 꿈꾸던 모든 게 들어 있었다.그야 호텔 중식 주방이니까. 나는 곁눈질로 그 모든 것을 살폈다.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들. 당장은 설거지밖에 못 하는 밑바닥이지만.언젠간 나도 저렇게 맛있게 요리할 수 있게. “이것도 부탁해요!” 그때 홀 직원이 퇴식구로 식기를 밀어넣었다.한 팀의 손님이 식사를 끝내고 나갔다는 뜻이다. 잽싸게 접시들을 받아 잔반을 버리고 설기지를 시작하려는데. ‘…볶음밥을 좀 많이 남기셨네.’ 어김없이 손님이 남긴 잔반이 눈에 들어왔다.XO소스볶음밥을 반도 안 먹고 남기고 가셨다. 조금 남기는 정도라면 항상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많이 남긴 접시는 신경이 쓰이는 법. 그러면 안 되지만.이 요리의 문제점을 찾고 싶은 욕구가 피어올랐다. 손님이 남긴 음식은 일종의 오답노트다.그걸 보고 공부하면 실력이 금방 상승한다. 공부하고 싶은 욕심을 참을 수 없었다.그러려고 여기 온 거니까. ‘…아무도 안 보고 있지?’ 주변을 살펴보니 지금은 아무도 내게 신경을 안 쓰고 있다. 나는 잽싸게 볶음밥 한 숟갈을 입에 털어넣었다.그리고 아무일 없던 척 잔반을 비우고 설거지 재시작. 설거지를 하며 한 입의 볶음밥을 분석했다. ‘…짜다.’ 한 입으로도 답은 금방 나왔다.볶음밥이 짜다. XO소스 볶음밥은 말 그대로 XO소스로 볶은 밥.핵심은 당연히 XO소스다.XO소스의 맛과 향이 볶음밥의 성패를 크게 좌우한다. 이때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XO소스는 거의 마지막에 짧은 시간만 볶아져야 한다. 다 완성된 볶음밥에 XO소스의 향만 입히는 식인 것이다. 그런데 XO소스를 조금이라도 일찍 넣으면?XO소스 특유의 좋은 향과 감칠맛이 날아가고, 짠맛만 남는다. 즉, 이 볶음밥은 XO소스를 너무 일찍 넣었다. ‘소스 넣는 타이밍이 좀 빨랐네. 기름맛과 마늘의 향만 조금 남아 있고…’ 한 입으로 대부분 문제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이렇게 맛이 잘 느껴지지?’ 원래도 맛을 분석하는 건 자주 했지만.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맛이 잘 느껴졌다. 그러니까, 사용된 재료의 맛이 하나하나 다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해야 되나?미묘하지만 재료의 배합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미각이 예민해졌다. 절대미각처럼. “…….” 그 순간,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불안감에 돌아보니 수셰프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히, 히익. 잔반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볶음밥 잔반 먹는 걸 봤나?혼나는 건가? 수셰프의 눈빛, 엄청 무섭다.어제도 그렇고 사람이 저렇게 무서운 분위기를 가질 수 있나? “…흠.” 하지만 수셰프는 별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못 본 걸까?아무튼 한시름 돌렸다. 이후에도 손님들이 음식을 많이 남기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어제 기름 온도처럼 고질적인 문제는 아니었다.대부분 실수의 개념이었다. 아까 XO소스볶음밥도 모두 그런 게 아니라.딱 그 접시만 실수로 셰프가 소스 타이밍을 놓쳐서 짜게 된 것. 난 어제처럼 주제넘게 나서지는 않았다.그냥 혼자 공부를 위해 몰래 먹어보고 분석할 뿐. 물론 잔반을 먹어선 안 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손님이 남긴 음식은 너무 좋은 오답노트다.좋은 교본을 눈앞에 두고 놓치기 싫었다. 또한 맛을 보면 볼수록 혀가 음식을 더욱 민감하게 느꼈다.재료의 배합, 익힘의 정도, 맛의 층위, 볶음의 순서, 소스의 조합. 혀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음식을 조리한 과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힘이 강해진 것처럼, 미각도 세심해진 걸까? 이 감각에 중독될 정도였다.음식을 맛보면 한 입만으로 음식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니. 처음엔 조금 구분되는 정도였지만, 쓰면 쓸수록 혀는 더 똑똑해져갔다. 남들은 설거지 알바라 깔볼지 모르지만, 나는 너무 좋았다.어깨너머로 셰프들의 스킬을 훔쳐보고 오답노트 공부까지. 퇴근하는 길에는 그날 기억한 걸 모조리 메모한다. 요리 지식이 상승하는 그 기분 자체로도 너무 좋았다. 그렇게 나는 한 달간 열심히 설거지 알바를 했다. 얼마뒤 찾아온 월급날. 받은 월급으론 곧바로 옥탑방 주방을 보수했다.가성비 좋은 식기들도 필요한 만큼 구매했다. “다, 다 됐다…!” 이것저것 쓰다보니 돈은 금방 떨어졌다.하지만 드디어 요리를 할 수 있게 됐으니 아깝지는 않았다. 드디어 요리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이, 이렇게 설치하면 되나?” 나는 다잇소에서 사온 삼각대를 주방이 잘 보이게 설치했다. 계획했던 대로 요리 영상도 찍어서 요튜브에 올리기로 했다. 띠링- 버튼을 누르자 실행되는 비디오 녹화.카메라에 찍히는 내 모습이 심히 어색하다. 방구석에 아무도 없는데 괜히 부끄러운 느낌.하지만 이것도 내가 요리사가 되기 위한 관문이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고 스마트폰 카메라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오… 오늘 만들어볼 요리는 간짜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