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회의실에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처음에는 스무 명이 넘게 모여 있던 회의실.그 자리에 남은 것은 고작 열 명뿐이었다.처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였다.그러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기획실장.재무실장.품질관리실장.경영기획상무 송태진.비밀 감사 결과, 단 하나의 흠도 발견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은 자들.그런 그들조차 얼굴만큼은 굳어 있었다.기습이라고 불러도 무방할만큼 갑작스러운 숙청이 이루어졌다.동료들이 눈앞에서 끌려나가는 광경은,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그 싸늘한 침묵 속에서 강태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예상하지 못한 첫마디였다."제가 회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회사를 방치했습니다. 그 결과."강태성은 텅 빈 자리들을 바라보았다."이런 꼴이 났습니다.""...."무거운 얼굴로 빈자리를 살펴보던 그가 다시 남아 있는 임원들을 바라보았다."여러분들께는 감사합니다.""...""이런 환경에서도 회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켜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회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몇몇 임원은 아직도 멍한 표정이었다.'...사과했다고?''강태성 사장이?'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반면, 기획실장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은 여전히 경계심을 거두지 못했다.'설마.''또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겠지.'한 번 신뢰를 잃은 사람은 쉽게 믿기 어려운 법이었다.그들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강태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앞으로 회사는 달라질 겁니다.""과정은 공정하고 평가는 투명하게.""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만큼, 성과를 낸 사람은 성과만큼 반드시 대우받게 하겠습니다."미사여구 따위는 없는 말이었다.단단하고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듯한 말. 그 말은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래 남았다.그때였다.드르륵-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울렸다.송태진 상무였다.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강태성 앞으로 걸어왔다.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강태성 역시 순간 긴장했다.'뭐지?'송태진.게임에서도 비중이 거의 없던 인물.애초에 KJ그룹은 주인공과 강태성에 의해 몰락하는 기업이었다.원작에서 송태진은 이름만 언급될 뿐이었다.무슨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송태진이 강태성 앞에 멈춰 섰다.그가 강태성의 앞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90도 인사라고 부를만큼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사장님."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잘 부탁드립니다."순간, 회의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뭐...?''그 뻣뻣한 송 상무가...!''강태성을 인정했다고?'놀란 것은 다른 임원들뿐만이 아니었다.강태성 역시 잠시 눈을 깜빡였다.송태진.강백호 회장을 창업 초기부터 보좌해 온 원로급 임원.그렇기에 회사 안에서 그의 한마디는 웬만한 임원 둘, 셋의 말보다 무거웠다.그런 그가 공식석상에서 강태성을 사장으로 인정한 것이다.강태성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송태진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꽉.굳은살 박인 손과 손이 맞물렸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임원들이 술렁였다.강태성은 말없이 송태진의 눈을 바라봤다.사실은 당황한 탓이었다.이 정도 거물급 인물이 먼저 고개를 숙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하지만, 그 표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안그래도 험악한 인상이다.굳게 다문 입에 날카롭게 치켜뜬 눈.그 모든 것이 더해져 마치 상대를 떠보는 듯한 위압감을 만들어 냈다.회의실 뒤편에서 작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저 눈빛 좀 봐.""송 상무님이랑 기싸움하는 거야?""아무리 송 상무님이 원로라도..."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봐주지 않겠다는 뜻이군.""사장으로서 선을 긋는 거야.""확실히 기강을 잡겠다는 거지."웅성거림은 아주 작았지만.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원로도 예외는 없다고.그 순간, 강태성이 먼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굳어 있던 공기가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반면 송태진은 끝내 손을 놓기 전까지 강태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역시.'회의실에서 송태진만이 그 험악한 인상 뒤에 담긴 결의를 읽어냈다.험상궂은 인상에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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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강태성의 위로 젊은 시절 강백호 회장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회장님.'송태진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호랑이 새끼가... 드디어 호랑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그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 품어 왔던 기대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KJ그룹에 피바람이 불었다.대대적인 인사 개편 소식이 순식간에 전 직원에게 퍼져나갔다.법무팀 직원들이 정신없이 오가고, 감사실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회사 곳곳이 어수선했다.직원들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사내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었다.「징계 및 인사 조치 안내」직원들이 하나둘 게시판 앞으로 몰려들었다."와... 이게 뭐야?""많이도 해먹었네.""생산본부장도 걸렸어?"게시판에는 비위 사실과 징계 대상이 정리되어 있었다.횡령.배임.협력업체 리베이트 수수.허위 계약.법인카드 사적 사용 등등.그 정도에 따라 징계 수위도 달랐다.크게는 면직이나 직무 정지.작게는 감봉 혹은 해외 발령으로 나뉘었다.이번 조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첫째로는 경고의 의미.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강태성 사장이 경고하고 있었다.회사가 그동안의 잘못을 모두 거슬러 올라가 처벌할 수는 없었다.아주 작은 사소한 비리라도 저지른 모든 인원을 처벌했다간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테니까.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더 이상 회사의 돈을 빼먹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게시판에 기재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뒷주머니를 찰 생각을 하고 있던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둘째로, 개혁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 느낌을 담고 있었다.이제부터 회사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겠다고.성과를 낸 사람은 성과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만큼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특히 간부급 상당수가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 실력 있는 직원들에게는 그만큼 승진의 기회가 열렸다.몇몇 야심있는 직원들은 눈을 번뜩이며 공석이 생긴 자리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사장님이 드디어 일을 하시는군.""소문이 사실이었네.""정말 사람이 변하기도 하는구나.""이번엔 진심인가 봐."게시판 앞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였다.저마다 의견을 나누며 웅성거렸다.그 틈에 인사팀 박소영 대리도 조용히 게시판 앞에 섰다.그녀는 원래라면 이런 소문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다.하지만 회사가 이 정도로 뒤집혀 버렸으니,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문득 얼마 전 사내식당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사장님이 변한 것 같아.'동기 이주희가 했던 말.그땐 반신반의했지만, 지금 보니 정말 사실이었던 걸까.복잡한 심정으로 게시판을 훑어 내려가던 박소영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뭐?"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명단을 다시 확인했다.『영업2팀 이준호 대리』『징계 : 해외지사 발령』"...준호 오빠?"고위 임원들처럼 해임이나 수사 기관에 의해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그런데 느닷없는 해외 발령이라니.인사팀 직원인 그녀가 봐도 사실상 좌천에 가까운 조치였다.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설마...'준호 역시 무언가 저지른 걸까.박소영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그리고 곧장 이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영아….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평소 자신감 넘치던 이준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그 한마디만으로, 박소영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오빠."-나... 이제 어떡하지."..."-해외로 가라고 하네…."사실이었어."말끝마다 힘이 빠져 있었다.평소라면 어떻게든 괜찮다고, 방법을 찾자고 말했을 그였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인사 발령은 이미 확정되었고, 사장이 직접 결재한 사안이라는 것까지 들은 모양이었다.해외 지부 발령은 사실상 좌천이나 다름없었고, 언제 한국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쪽이 이준호였기에 불만이 있다면 회사를 떠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오빠."박소영은 애써 목이 메는 것을 참아내며 말했다."내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소영아, 아니야. 난, 난 괜찮아. 응?"안 괜찮잖아!"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오빤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통화가 끊겼다.박소영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어떻게든...'그녀가 생각하기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천천히 눈을 감았다.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태성은 그녀를 볼 때마다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불쾌한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의미심장한 말투에 괜히 핑계를 대며 불러세웠다.손끝이 스칠 만큼 가까이 다가오던 순간들.직접적인 행동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겨운 속내가 무얼 담고 있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박소영은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만약, 정말 그것이 이준호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자신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눈을 뜬 박소영은 결심한 듯 숨을 들이마셨고.이내 사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