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할 수 없는 제안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사장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닫힌 문 너머로 희미하게 거울이 비쳤다. "...." 박소영은 말없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안경다리를 붙잡았다. 스륵.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이 벗겨졌다. 안경 하나만 벗었을 뿐인데 인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차갑고 수수한 회사원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드러운 인상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머리끈을 풀었다.찰랑. 질끈 묶여 있던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흘러내렸다.엘리베이터의 미세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정돈한 뒤, 손끝으로 셔츠 깃을 만졌다. 단추 하나. 그리고 하나 더. 목까지 잠겨 있던 셔츠가 조금 열리자 희고 가는 목선과 가슴골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이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평소보다 한 뼘 정도 올려 입은 H라인 스커트. 길지 않은 차이였지만 분위기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마지막으로 손목에 뿌려 둔 향수를 목덜미에 살짝 문질렀다. 은은한 꽃향기가 퍼졌다. "...." 거울 속에는 늘 회사에서 보던 인사팀 박소영 대리가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웠지만 박소영은 예쁜 편이었다.대학 시절에는 고백을 받은 횟수를 세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였고. 입사 초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식 자리나 타 부서 협업 프로젝트, 하다 못해 사내 메신저까지. 틈만 나면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였다. 회사에서는 일부러 꾸미고 다니지 않았다.머리는 늘 단정하게 묶고, 화장은 최소한으로.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넉넉한 셔츠를 걸쳤고 눈에 띄지 않도록 안경까지 썼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였다. 능력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받는 것도 싫었다.입사 이후로는 그렇게 쭉 살아왔다. 그런데. "...하."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결국, 스스로 가장 예쁜 모습으로 꾸민 채 사장실을 찾아가고 있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방법을 선택하고 있었다.'...이게 창녀랑 다를 게 뭐지.'코끝이 시큰해졌다.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당장이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준호가 떠올랐다.해외 발령과 절망에 찬 그의 목소리까지. '소영아... 나 이제 어떡하지.' 그 한마디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박소영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애써 눈물을 삼켰다. '이번 한 번만.' 정말 이번 한 번만이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리라.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사장실이 있는 최상층. 박소영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 웅장한 사장실 문이 눈에 들어온 때였다. 쾅! 사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여직원 서너 명이 우르르 밖으로 밀려 나왔다. "사, 사장님! 한 번만 봐주세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구두 한 짝이 벗겨진 채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여직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급히 정리하고 있는 여직원.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곧이어 사장실 안에서 우렁찬 고함이 복도를 뒤흔들었다. "내 회사에서 나가!" 쾅! 문이 다시 세차게 닫혔다.어찌할 바를 몰라 사장실 문 앞을 서성이는 여직원들.문이 닫힌 복도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흘렀다.상황을 파악한 박소영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렸다. '...어째서?' 분명, 자신이 알고 있던 강태성이라면.이런 상황은...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을텐데. * 이 세상이 야겜 속 세상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빙의한 이후부터, 나는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살아왔으니까. 아침 여섯 시, 알람이 울리면 곧바로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뒤룩뒤룩 살이 찐 몸으로 러닝머신을 뛰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웨이트를 했다.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운동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씻을 힘조차 남지 않을 만큼 녹초가 되곤 했다. 침대에 몸을 던지는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낮에는 회사일하기 바빴다. 비밀 감사팀이 가져오는 보고서를 하나하나 검토하고 감사실에서 올라오는 자료를 비교했다. 누가 횡령을 했고, 누가 협력업체에서 뒷돈을 받았는지. 직원들 분류하기 바빠 낮 시간은 따로 빼지도 못했다. 그렇게 헬스장과 회사만 왔다갔다 반복하는 삶을 보냈으니.어느새 자연스레 잊고 있었다, 이 세계가 원래 어떤 세계였는지를. 'NTR 야겜.' 게임의 장르를 떠올리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온갖 배드 엔딩이 존재하는 연애 게임.그 중심에 있었던 악역이 바로 원래의 강태성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달랐다. 운동과 회사 경영만 하며 살았을 뿐. 야한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은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몇 시간 전부터 이어진 일들은, 내 상식을 완전히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사장님... 한 번만 선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첫 번째 직원이었다. 아직 스물여섯밖에 되지 않은 신입사원."사장니임,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사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애교섞인 말투로 봐달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슬슬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이렇게 하면... 될까요?""지, 지금 뭐하는 겁니까! 당장 나가세요!" 화들짝 놀라서 돌려보냈다. 다음은 30대 중반 유부녀 과장. 그녀 역시 앞선 신입사원과 비슷하게 선처를 부탁한다는 이유로 나를 찾아왔다."제가 몸으로 갚을게요. 제발 저희 남편만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제 속옷을 드러내는 것이었다.'어흐….' 확실히 유부녀라 그런지 과감하기 그지없었다.벌써 몇 달째 욕구를 제대로 해소하지 않아 조금 쌓여있긴 했지만… 예외는 없었다. 이 회사는 이제 내 회사고, 내 회사는 이런 비리를 용납할 수 없었으니."나가쇼.""사장님, 어째서…."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몸으로 갚겠다, 예전부터 사장님이 마음에 들었다, 곰같은 모습이 멋있다 등등…. 이번 대규모 숙청 건에 관련되지 않았음에도 라인을 타겠답시고 사장실을 찾아오는 여직원이 적지 않았다. 이쯤되니 어이가 없었다."이게 대체 뭐하는 세상이야?" 이 세계는 도덕관이 어떻게 되어먹었단 말인가. 내가 살던 세상에도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이들은 있었다. 뉴스에서도 접대나 청탁 같은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으니. 그래도 지금처럼 이렇게 대놓고 들이대지는 않았다. 당연히 몸으로 승부하고, 당연히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들.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생각보다 훨씬 야한 게임에 충실하잖아.' 하긴, 이래야 스토리가 진행이 될테니까. 원래의 강태성이 타인의 연인을 빼앗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런 배경이 갖춰져야 하는 것이리라. 원래대로라면 강태성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겠지.애초에 비리가 밝혀지지도 않았겠지만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다면 몸을 취하고 그들의 비리를 눈감아줬을 터였다."회사 꼬라지가 말이 아니네."이걸 어디서부터 바꿔나가야 할까-.혀를 끌끌차며 한탄하던 때였다.똑똑. 사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곧바로 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장님, 인사팀 박소영 대리님이십니다."'또인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 사장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넓은 집무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강태성은 책상 위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 박소영은 입술만 달싹였다. 막상 들어오니 준비했던 말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방금 전, 사장실에서 울먹이며 뛰쳐나온 여직원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대체…?' "...박 대리?" 강태성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아... 저...." 겨우 정신을 차린 박소영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강태성은 짧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제가 좀 바쁜 몸이라.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 박소영은 손을 꽉 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이준호 대리의 해외지부 발령, 취소해 주십시오." 순간, 강태성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 비웃는 듯한 모습에 박소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태성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담담히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사장님." "징계는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결정됐습니다. 번복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지만 준호 오빠는..." "회사 규정을 어겼습니다." 강태성 사장은 단호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강태성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바라보다가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 박소영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왔다.' 결국,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해.' 천천히, 박소영은 눈을 감았다. 떨리는 손끝이 셔츠 단추로 향했다. '준호 오빠만 살릴 수 있다면. 이깟 몸쯤은….' 손가락이 첫 번째 단추를 붙잡은 때였다. 강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박 대리." "...예." "지금 뭐하는 겁니까?" "...네?"서슬퍼런 목소리에 박소영이 곧바로 얼어붙었다. 강태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단추 잠그세요." "...?" "제가 말한 방법은 그게 아닙니다." "...예?" "이준호 대리의 업무 능력은 인정합니다."강태성이 책상 위 인사기록부 파일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그래서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해외지부에서 성과를 내면 돌아올 기회를 준 겁니다." 그는 박소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만, 그로 인해 발생한 공백은 누군가 메워야 합니다.""..." "원래라면 새로 사람을 뽑으려 했는데... 이건 어떨까요."강태성이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이준호 대리가 회사에 끼친 손실과 업무 공백까지 감당할 만큼 박 대리가 성과를 내십시오."강태성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한다면, 해외 근무 기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습니다." "...!" 박소영은 멍하니 강태성을 바라보았다. "그게 제가 말한 방법입니다." 박소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굉장히 자비롭고, 또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방금 전까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몸을 함부로 사용하려 했던 것에 대한 수치심과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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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성은 그녀의 속내를 전혀 모른 채, 다시 서류를 집어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