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화 - 바다 위의 새로운 질서
제 10화 - 바다 위의 새로운 질서
영혼해를 빠져나온 지 세 시간이 지났다.
청해목선은 잔잔한 바다 위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검은 안개도, 죽은 자들의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부서진 건물들과 물에 잠긴 도로가 간간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이었다.
정확히는 서울이었던 곳이었다.
백시현은 갑판 난간에 기대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출근길에 지나쳤을 건물들이 이제는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섬처럼 보였다.
“……하루 만에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그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용의 문양 아래에는 희미한 검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계약자 정보]
[이름: 백시현]
[계약 신격: 동해 용왕]
[계약 등급: 하급]
[영혼 안정도: 58%]
[칭호: 금지된 그릇]
영혼 안정도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몸속에 잠든 존재는 영혼해를 빠져나온 이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속으로 말을 걸었다.
'야.'
대답은 없었다.
'내 말 들리지?'
역시 조용했다.
“……필요할 때는 잘만 나타나더니.”
시현이 중얼거리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이냐?”
청린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작은 푸른 수정을 들고 있었다.
시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혼잣말이요.”
“인간들은 원래 혼잣말을 자주 하느냐?”
“사람마다 다르죠.”
청린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현의 손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몸은 어떠냐?”
“괜찮아요.”
“거짓말.”
“진짜라니까요.”
청린은 시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푸른빛이 그의 팔을 따라 흘렀다.
잠시 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영혼이 아직 불안정하다. 영혼이 손상되면 기억을 잃거나 의식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
청린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함부로 그 힘을 사용하지 마라.”
“……어떤 힘이요?”
청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 안에 있는 것.”
시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그게 뭔지 알아요?”
“모른다.”
“용왕님도 모르시고요?”
“아버님께서도 확신하지 못하셨다.”
청린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뭔데요?”
“신들조차 경계하는 존재라는 것.”
시현은 손등의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신의 계약자가 되었고, 정체불명의 존재까지 몸속에 품게 되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그때 청린이 손에 든 수정을 내밀었다.
“이것을 받아라.”
“뭔데요?”
“하급 신성석이다. 몸에 지니고 있으면 소모된 신성을 조금씩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현은 수정을 받아 들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자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고마워요.”
청린은 고개를 돌렸다.
“착각하지 마라. 계약자가 쓰러지면 아버님께 설명하기 곤란해질 뿐이다.”
시현은 피식 웃었다.
“네, 그렇게 생각할게요.”
선실 안에서는 박정호가 생존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영혼해에서 빠져나왔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부상자가 여럿 있었고, 식량도 부족했다.
특히 청해목선에 올라타기 직전까지 건물 옥상에 고립되어 있던 여섯 명은 탈진한 상태였다.
그중 한 남성이 정호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정호는 잠시 망설였다.
“동해 용궁으로 향한다고 들었습니다.”
“용궁이요?”
“네.”
남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아까 그 괴물들도 바다에서 나왔잖아요!”
주변 사람들이 술렁였다.
“맞아요. 차라리 육지로 돌아가는 게…….”
“육지가 어디 있다고요?”
“군대는요?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질문이 쏟아졌다.
정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선실 문이 열렸다.
시현이었다.
“저도 정확한 상황은 몰라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시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갈 수 있는 육지가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한 남성이 반박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 말들을 믿으라고요?”
“무조건 믿으라는 건 아니에요.”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다만 지금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민준이 시현에게 다가왔다.
“형.”
“응?”
“우리 집은 이제 없어요?”
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민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도 없어졌어요?”
시현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마 물에 잠겨있을 거야.”
“친구들은요?”
그 질문에 시현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역시 부모님과 친구들이 살아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모르겠어.”
시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살아 있을 거야.”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찾으러 갈 수 있어요?”
시현은 잠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응. 같이 찾으러 가자.”
민준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같은 시각.
청해목선의 하부 창고.
은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세이렌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푸른 빛의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청린이 만든 신성 구속구였다.
노래를 통한 정신 간섭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세이렌은 천천히 눈을 떴다.
“……답답해.”
그녀가 목의 고리를 만졌다.
그러자 고리에서 푸른 전류가 튀었다.
파직!
“아야!”
세이렌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성격 나쁜 공주님이라니까.”
“누가 성격이 나쁘다고?”
문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청린이었다.
세이렌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머, 들었어?”
청린은 차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상태는 어떠냐?”
“죽을 정도는 아니야.”
“네 목의 문양은?”
세이렌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목덜미를 만졌다.
푸른 구속구 아래에는 검은 문양이 남아 있었다.
“……아직 있어.”
청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혼해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응.”
세이렌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벗어난다고 계약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계약?”
청린의 표정이 굳었다.
세이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실수했네.”
청린이 다가왔다.
“누구와 계약했지?”
세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혼해의 집행자냐?”
“아니.”
“그럼 누구지?”
세이렌은 고개를 돌렸다.
“말할 수 없어.”
청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속박 때문이냐?”
세이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청린이 물었다.
“백시현을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은 이유는 알고 있냐?”
세이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인간이 특별하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니.”
세이렌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특별해.”
청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이렌은 낮게 속삭였다.
“그 인간의 영혼에는 신들의 계약보다 오래된 흔적이 있어.”
“……무슨 뜻이지?”
“나도 전부 알지는 못해.”
세이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영혼해에서 그 힘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집행자가 두려워했어.”
청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집행자가?”
“응.”
세이렌은 청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존재는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혼을 거둬들였어. 신의 계약자도 예외가 아니었지.”
“…….”
“그런데 백시현에게는 손을 대지 못했어.”
청린은 입을 다물었다.
세이렌은 천천히 덧붙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
오후가 되자 청해목선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갑판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시현은 난간을 붙잡았다.
“……무슨 소리예요?”
청린이 선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성석의 출력이 떨어지고 있다.”
“아까 받은 그 수정이요?”
“그보다 훨씬 큰 동력석이다.”
청린의 표정이 굳었다.
“영혼해에서 선체가 손상된 탓에 신성이 계속 새어 나가고 있다.”
그 순간 배가 크게 흔들렸다.
[청해목선 상태]
[선체 내구도: 42%]
[신성 동력 잔량: 17%]
[현재 속도로 항해 가능한 시간: 약 2시간]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두 시간?'
“이대로라면 용궁까지 도착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요?”
청린은 잠시 고민했다.
“가까운 안전 해역을 찾아야 한다.”
그때였다.
갑판 위에 있던 정호가 소리쳤다.
“저기! 배가 있습니다!”
시현과 청린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작은 선박 한 척이 보였다.
낡은 어선이었다.
배의 돛대에는 하얀 천이 묶여 있었다.
시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생존자들인가 봐요!”
하지만 청린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뭐가요?”
“저 배에서 신성 반응이 느껴진다.”
시현은 다시 어선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선에서 붉은 신호탄이 발사되었다.
피슈우웅!
하늘에 붉은 연기가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어선의 확성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은 제7해상구조대다!』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미확인 선박은 응답하라! 부상자나 민간인이 있는가?』
정호가 반가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구조대입니다!”
하지만 청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들의 구조대가 벌써?”
시현이 물었다.
“왜요?”
“멸망이 시작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청린은 어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들은 이미 조직적인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
시현은 잠시 생각했다.
“군인들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다.”
청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인이 필요하다.”
잠시 후 두 선박이 가까워졌다.
어선에는 다섯 명의 남성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방수복과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푸른 삼지창.
시현은 그 문양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때 어선에서 한 남성이 소리쳤다.
“생존자 몇 명입니까?”
정호가 대답했다.
“스물세 명입니다!”
시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파트에서 살아남은 열일곱 명.
그리고 옥상에서 구조한 여섯 명.
모두 무사히 배에 타고 있었다.
남성은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민간인 스물세 명 확인. 부상자 다수.”
잠시 후 무전기에서 잡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했다. 안전 항로로 안내해라.』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현 일행을 향해 말했다.
“저희를 따라오시면 안전한 피난 시설이 있습니다!”
시현이 물었다.
“어디에 있는데요?”
남성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틀란티스입니다.”
“……아틀란티스?”
“네. 현재 가장 안전한 해상 도시입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식량과 의료 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선실 안에서 사람들이 술렁였다.
“의료 시설이 있다고요?”
“그럼 치료받을 수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틀란티스에서는 모든 생존자에게 보호를 제공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청린은 남성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세이돈.”
남성이 고개를 돌렸다.
“네?”
청린은 차갑게 물었다.
“너희는 포세이돈의 세력이냐?”
남성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곧 미소를 되찾았다.
“정확히는 포세이돈의 계약자께서 설립하신 구조대입니다.”
“계약자의 이름은?”
남성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강태준 총사령관님입니다.”
청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강태준.”
시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포세이돈의 계약자라면 경계해야 한다.”
시현은 어선을 바라보았다.
그때 남성이 다시 말했다.
“선박 상태가 좋지 않아 보입니다.”
“……맞아요.”
“저희가 지원하겠습니다.”
남성은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본부, 신성 동력석 지원 요청합니다.”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승인. 단, 등록 절차를 우선 진행하라.』
남성은 시현 일행을 향해 말했다.
“아틀란티스의 보호를 받으시려면 간단한 등록 절차가 필요합니다.”
정호가 물었다.
“무슨 절차입니까?”
남성은 품에서 작은 수정판을 꺼냈다.
수정판 위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아틀란티스 시민 등록]
[보호 제공 항목]
[식량 및 식수 배급]
[의료 지원]
[안전 구역 거주권]
[신화종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현은 수정판의 아래쪽을 발견했다.
[등록 조건]
[아틀란티스 최고 통치권 승인]
[지정 구역 외 이동 제한]
[비상시 통치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
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만요.”
남성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시현은 수정판을 가리켰다.
“여기 복종 의무라는 건 뭔가요?”
남성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 규정입니다.”
“어떤 명령이든 따라야 한다는 뜻인가요?”
“비상 상황에 한정됩니다.”
“그 비상 상황은 누가 판단하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성은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강태준 총사령관님께서 판단하십니다.”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바다 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멀리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웅.
마치 거대한 고래가 우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청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전원 선실로 들어가라.”
시현이 물었다.
“왜요?”
청린은 수평선을 노려보았다.
“신화종이다.”
그 순간 어선에 있던 구조대원들의 표정도 굳었다.
“……설마.”
한 남성이 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본부! 북동쪽 해역에서 대형 신화 반응 감지!”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개체를 확인하라!』
남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수의 머리가 관측됩니다.”
그 순간 수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하나.
둘.
셋.
길고 기괴한 목들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한 머리가 달려 있었다.
[경고.]
[상급 신화종의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개체명: 스킬라]
[위험 등급: 상급]
시현은 숨을 삼켰다.
“……저게 뭐야.”
청린이 낮게 말했다.
“그리스 신화의 해양 괴물.”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스킬라다.”
그 순간 여섯 개의 머리가 동시에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청해목선을 향해 밀려왔다.
구조대원이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스킬라 출현! 반복한다, 스킬라 출현!”
잠시 후 무전기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현 위치를 유지해라.』
구조대원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총사령관님! 민간인이 스물세 명이나 있습니다!”
『알고 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직접 가겠다.』
시현은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청린이 낮게 중얼거렸다.
“……포세이돈의 계약자.”
멀리 수평선 너머.
거대한 철제 함선 한 척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함선의 돛대에는 푸른 삼지창이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