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rawler

제 3화 - 동해 용왕의 계약

일곱 바다의 묵시록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제 3화 - 동해 용왕의 계약

『……네 안에 있는 것이 그것이란 말이냐?』

동해 용왕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백시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청룡이 황금빛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던 존재가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말입니까?”

시현이 물었다.

“제 안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용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현의 눈앞에 떠 있던 검은 창을 바라보았다.

[미확인 존재의 간섭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영혼 봉인 해제율: 0.001%]

[경고: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잠시 후 용왕이 입을 열었다.

『백시현. 네가 지금 무엇을 품고 있는지는 나 역시 확신할 수 없다.』

“그게 무슨…….”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용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네 존재가 알려진다면 수많은 신격이 너를 노릴 것이다.』

시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미 괴물 하나에게 죽을 뻔했다.

그런데 이제는 신들까지 자신을 노린다고?

“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인데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런 반응이 나타날 리 없지.』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억울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네 이름을 맡기지 마라.'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용왕이 다시 말했다.

『계약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시현의 눈앞에 푸른 창이 나타났다.

[동해 용왕이 정식 계약을 제안합니다.]

[계약 수락 / 계약 거절]

『하지만 계약하지 않는다면 네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멈춘 옥상.

머리 위에서 정지한 괴물의 촉수.

공포에 질린 주민들.

이곳에는 자신을 지켜줄 군대도, 경찰도 없었다.

부모님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살아야 해.'

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계약하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까?”

용왕이 잠시 침묵했다.

『모두를 구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는 않겠다.』

“…….”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많은 가능성을 얻겠지.』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하겠습니다.”

그 순간.

[계약을 수락했습니다.]

[동해 용왕과 백시현의 신성 계약이 성립됩니다.]

눈부신 푸른빛이 시현의 몸을 감쌌다.

눈을 뜨자 전혀 다른 장소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그 위에 거대한 궁전이 떠 있었다.

궁전의 지붕은 청옥처럼 빛났고, 수많은 기둥에는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죠?”

『동해 용궁의 일부를 재현한 공간이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푸른 용포를 입은 중년의 남성.

긴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조금 전의 거대한 용과 다르지 않았다.

“……용왕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현은 어색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용왕은 그런 시현을 잠시 바라보았다.

『예법은 필요 없다. 지금부터는 계약자와 계약 신격으로서 대화할 테니.』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현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계약 정보]

[계약자: 백시현]

[계약 신격: 동해 용왕]

[계약 등급: 하급]

[신성 적합률: 측정 불가]

[고유 권능: 미확인]

[계약 권능이 지급됩니다.]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동해 용왕의 가호 Lv.1]

[효과: 수속성 피해에 대한 저항력 소폭 상승]

[부가 효과: 하급 정신 간섭에 대한 저항력 상승]

[수중 호흡 Lv.1]

[효과: 하루 최대 10분 동안 수중 호흡 가능]

[수분 친화 Lv.1]

[효과: 물의 흐름을 감지하고 다루는 능력의 성장 보조]

[해류 감지 Lv.1]

[효과: 반경 30m 이내의 수류 변화 감지]

시현은 한참 동안 창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소박하네요.”

용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

“아니, 그…… 용왕님이면 막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거나 그런 걸 주실 줄 알았는데.”

『계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권능을 바라느냐?』

시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긴 하죠.”

『신의 권능은 무한하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

용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현도 그를 따라갔다.

궁전의 바닥 아래로 거대한 바다가 보였다.

그런데 바닷속에는 기이한 빛들이 흐르고 있었다.

푸른빛.

붉은빛.

검은빛.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색의 흐름.

시현은 물었다.

“저건 뭡니까?”

『일곱 바다의 흔적이다.』

“일곱 바다요?”

용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알고 있는 바다는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손짓에 바다 위로 일곱 개의 빛나는 구체가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인간계와 신화계는 봉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시현은 구체들을 바라보았다.

『동해 용궁, 올림포스의 바다, 북방의 황혼해, 영혼들이 떠도는 바다…… 서로 다른 신화의 영역들이 각자의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 봉인이 무너졌다는 겁니까?”

『그렇다.』

시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누가 무너뜨린 거예요?”

용왕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무너진 건 아니고요?”

『아니다.』

용왕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곱 봉인은 외부에서 동시에 파괴되었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누군가 일부러 이런 일을 벌였다고요?”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서울이 잠겼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부모님의 생사도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이 누군가의 의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용왕은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 역시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저요?”

『네 안에 잠든 존재 때문이다.』

시현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뭔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용왕은 잠시 침묵했다.

『짐작하는 것은 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사실처럼 말하지는 않겠다.』

그 말에 시현은 더 묻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당장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용왕이 말했다.

시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요?”

『인간계에서는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간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럼 저 괴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시련은 끝났다. 네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는 없다.』

용왕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궁전 바닥에 푸른 문양이 나타났다.

『내가 보낸 배가 너희를 구하러 갈 것이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배요?”

『청해목선이라 불리는 용궁의 선박이다.』

“그럼 옥상에 있는 사람들도…….”

『가능한 한 모두 태우도록 명령했다.』

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용왕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라.』

“네?”

『그 배에 탄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용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 바다에는 수많은 신화종이 풀려나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 권능이 닿지 않는 영역의 존재들도 있지.』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안의 힘은 함부로 깨우려 하지 마라.』

“……왜요?”

『그 힘이 너를 지켜줄지, 집어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시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용왕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다.

『살아남아라, 백시현.』

푸른빛이 시현의 시야를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시현은 옥상 바닥에 쓰러졌다.

“커헉!”

폐 속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 전 용궁에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손등에는 푸른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계약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시현은 힘겹게 웃었다.

“……진짜였네.”

그때 괴물의 촉수가 다시 움직였다.

시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깐, 시련 끝났잖아!”

하지만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수십 개의 촉수가 옥상을 향해 내려왔다.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용왕님!'

그 순간.

하늘에서 푸른빛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물기둥이 괴물의 몸을 강타했다.

괴물의 촉수들이 일제히 뒤로 밀려났다.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하늘에서 무언가 내려오고 있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거대한 목선.

배의 양옆에는 용의 비늘을 닮은 장식이 새겨져 있었고, 돛에는 푸른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동해 용궁 소속 선박이 접근합니다.]

[선박명: 청해목선]

[등급: 하급 신성 선박]

시현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배가 하늘을 날아?”

그 순간 배의 갑판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흑청색 머리카락.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

하늘색 비단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물줄기가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였다.

물줄기는 괴물의 촉수들을 휘감았다.

콰드드득!

촉수들이 서로 얽히며 움직임을 잃었다.

여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동해 용궁의 계약자를 건드리느냐.』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번졌다.

『청해수박(靑海水縛).』

거대한 물의 사슬이 괴물의 몸을 묶었다.

괴물이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

여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시끄럽구나.”

그녀가 손을 내리자 물의 사슬이 더욱 강하게 조여들었다.

괴물의 몸이 바닷속으로 끌려갔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잠시 후 바다는 다시 조용해졌다.

시현은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 사람.'

자신이 10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버텼던 괴물이었다.

그런데 저 여인은 단 몇 번의 손짓으로 괴물을 밀어냈다.

물론 완전히 쓰러뜨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안전해 보였다.

그때 여인이 시현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그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향했다.

“네가 백시현이냐?”

시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께서 왜 이런 인간을 선택하셨는지 모르겠군.”

시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여인은 가볍게 웃었다.

“농담이다.”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푸른 물줄기가 옥상까지 이어졌다.

“올라타라. 너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겠다.”

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옥상 출입문에서 주민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박정호가 놀란 표정으로 하늘의 배를 바라보았다.

“저게 대체…….”

시현은 그에게 소리쳤다.

“구조하러 온 배예요!”

정호의 눈이 커졌다.

“정말인가?”

“네! 일단 다들 나오세요!”

주민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민준이 달려왔다.

“형!”

아이는 시현의 다리를 붙잡았다.

시현은 작게 웃었다.

시현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군.”

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여인은 시현의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님의 계약 문양이…….”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왜 이렇게 불안정하지?”

시현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용의 문양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잠깐 검은 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미확인 영혼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봉인 상태: 불안정]

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여인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너.”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거지?”

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지금은 구조가 먼저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푸른 물길이 옥상과 청해목선을 연결했다.

“나는 청린.”

여인이 말했다.

“동해 용왕의 셋째 공주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공주님이요?”

청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네가 무사히 용궁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할 사람이지.”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잘 부탁한다, 인간.”

시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시현입니다.”

“알고 있어.”

“그럼 인간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청린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재미있는 녀석이군.”

시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때였다.

청해목선 아래의 바다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수면 깊은 곳.

방금 전 사라진 괴물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동해 용궁.』

괴물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릇을 빼앗겼군.』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다.』

차갑고 낯선 목소리였다.

『어차피 일곱 바다는 하나로 이어질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가 되면……』

어둠 속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어느 신도 그릇을 지킬 수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