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 바다 위의 생존자
제 4화 - 바다 위의 생존자
오전 8시 37분.
서울의 하늘을 가르며 거대한 목선이 떠 있었다.
청해목선.
동해 용궁에서 보낸 구조선이었다.
백시현은 배의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도시가 이제는 거대한 바다 아래 잠겨 있었다.
높은 건물들의 옥상만이 수면 위로 드러나 있었다.
도로도, 지하철도, 사람들이 오가던 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끝난 건가.”
시현이 중얼거렸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말이냐?”
고개를 돌리자 청린이 서 있었다.
긴 흑청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시현이 바라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간들의 도시가 무너진 것이냐?”
“네.”
시현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거든요.”
“…….”
“출근하고, 밥 먹고, 친구 만나고. 그냥 그런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루아침에 다 없어졌네요.”
청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궁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어요?”
“아니.”
청린은 고개를 저었다.
“봉인이 불안정하다는 징조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무너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용왕님도요?”
“아버님께서도 마찬가지다.”
청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곱 봉인이 동시에 파괴되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경계를 무너뜨렸다는 뜻이지.”
시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놈 때문에 이렇게 된 거군요.”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
청린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시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은 무사하실까.'
휴대전화에는 여전히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연락할 방법도, 찾아갈 방법도 없었다.
그저 살아 계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청해목선의 갑판에는 구조된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총 17명.
시현을 포함해 아파트 옥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박정호는 주민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이쪽으로 모이세요!”
한쪽에서는 민준의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때 중년 남성이 정호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이 배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동해 용궁이라는 곳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용궁이요?”
남성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주변에서도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도 사람인지 모르겠고.”
“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잖아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
정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청린이 앞으로 걸어왔다.
“그대들의 불안은 이해한다.”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지금 인간계의 해역은 매우 위험하다. 이 배는 동해 용궁의 보호를 받는 선박이며, 그대들을 안전한 해역으로 옮기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청린은 남성을 바라보았다.
“믿지 않아도 된다.”
“……예?”
“다만 지금 이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대들을 억지로 데려갈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 배에서 내리겠다면 그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갑판이 조용해졌다.
중년 남성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시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말 한번 잘하네.'
청린은 시현을 돌아보았다.
“백시현.”
“네?”
“그대는 나를 따라오거라.”
“왜요?”
“할 이야기가 있다.”
시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순순히 그녀를 따라갔다.
청해목선의 선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내부에는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박혀 있었다.
전등도 없는데 복도 전체가 밝았다.
시현은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거 전기예요?”
“신성석이다.”
“신성석이요?”
“신격의 힘을 저장할 수 있는 광물이지.”
청린은 벽에 박힌 수정을 가리켰다.
“배를 움직이는 데에도 사용된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다른 세계구나.'
두 사람은 선실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청린은 문을 닫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묻겠다.”
“뭘요?”
“아버님과 계약할 때 무슨 일이 있었지?”
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뜻이에요?”
“네 계약 문양이 이상하다.”
청린은 시현의 손등을 가리켰다.
“정상적인 계약자라면 신격의 문양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네 문양에서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시현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용의 문양.
그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시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용왕님도 제 안에 뭔가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신다고 했어요.”
청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버님께서도?”
“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군.”
“많이 위험한 건가요?”
청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모른다.”
“…….”
“하지만 지금은 네가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그때 청린이 손을 뻗었다.
“손을 내밀어 보거라.”
시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청린이 그의 손등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푸른빛이 번졌다.
[동해 용궁의 신성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계약 상태를 확인합니다.]
잠시 후 청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
“…….”
“왜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요.”
청린은 시현을 바라보았다.
“네 안에서 잠깐…… 아주 오래된 바다의 기운이 느껴졌다.”
시현은 눈을 깜빡였다.
“오래된 바다요?”
“그래.”
청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의 바다.”
시현은 더 묻고 싶었지만, 청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입을 다물었다.
오전 9시 12분.
청해목선은 서울 외곽의 침수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시현은 다시 갑판으로 올라왔다.
주민들은 선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 용궁까지 가는 게 맞을까.'
부모님을 찾으려면 언젠가는 다시 육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시현은 손등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계약자 정보]
[이름: 백시현]
[계약 신격: 동해 용왕]
[계약 권능: 동해 용왕의 가호 Lv.1]
[수중 호흡 Lv.1]
[수분 친화 Lv.1]
[해류 감지 Lv.1]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정호였다.
“학생.”
“아, 아저씨.”
정호는 시현 옆에 섰다.
“아까는 고마웠네.”
“뭐가요?”
“옥상에서 말이야.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중 절반은 죽었을 거야.”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
“운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
정호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도 무서웠네.”
“…….”
“주민 대표라는 사람이 정작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어.”
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자네는 움직이더군.”
“저도 무서웠어요.”
시현이 말했다.
“솔직히 지금도 무서워요.”
정호는 그를 바라보았다.
시현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정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살아 있잖나.”
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으면 방법은 찾을 수 있을 걸세.”
그 말에 시현은 작게 웃었다.
“……그렇겠죠.”
바로 그때였다.
“저기!”
갑판 반대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시현과 정호가 고개를 돌렸다.
한 주민이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이 있어요!”
시현은 급히 달려갔다.
수면 위로 작은 건물의 옥상이 보였다.
그 위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청해목선을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시현은 청린을 찾았다.
“청린!”
그녀가 갑판 위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
“저기 사람들이 있어요!”
청린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
“구조할 수 있죠?”
청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이 해역은 위험하다.”
청린은 주변의 바다를 살폈다.
“조금 전부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그럼 빨리 구하고 떠나면 되잖아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청린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곳에는 신화종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시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건물 옥상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구해야죠.”
청린은 시현을 바라보았다.
“백시현.”
“네.”
“나는 이 배에 탄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알아요.”
“구조를 위해 접근했다가 모두 위험해질 수도 있다.”
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람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시현이 말했다.
“그럼 제가 내려갈게요.”
청린의 눈이 커졌다.
“뭐?”
“수중 호흡이라는 능력도 생겼잖아요.”
“고작 10분이다!”
“알아요.”
“게다가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시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른 방법을 알려주세요.”
청린은 입을 다물었다.
시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살고 싶어서 저기 있는 거잖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청린은 시현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집이 센 인간이군.”
“많이 듣는 말이에요.”
“칭찬이 아니다.”
청린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청해목선의 방향이 천천히 바뀌었다.
“좋다. 구조하겠다.”
시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요?”
“하지만 내 지시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
“네!”
청린은 그를 노려보았다.
“멋대로 뛰어내리면 바다에 던져 놓고 갈 것이다.”
시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좀 무서운데요.”
청해목선이 건물 옥상 가까이 접근했다.
청린은 물줄기를 뻗어 옥상과 배를 연결했다.
“한 명씩 올라오거라!”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물길 위로 올라섰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구조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때 시현의 눈앞에 푸른 창이 나타났다.
[해류 감지 Lv.1이 활성화됩니다.]
[반경 30m 이내의 수류 변화를 감지합니다.]
시현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바다 아래에서 이상한 흐름이 느껴졌다.
자연스러운 해류가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물속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그리고 넷.
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청린.”
“왜 그러느냐?”
“물속에 뭔가 있어요.”
청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디냐?”
시현은 바다를 가리켰다.
“저 아래.”
그 순간.
[경고.]
[미확인 신화종 다수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개체 수: 4]
[위험 등급: 분석 중]
청린은 곧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 배 안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앙!
건물 주변의 수면이 폭발했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생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고기의 몸.
사람처럼 긴 팔.
그리고 입가를 가득 채운 날카로운 이빨.
그중 하나가 옥상에 남아 있던 여성을 향해 뛰어올랐다.
“꺄아악!”
시현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안 돼!”
그 순간 손등의 푸른 문양이 빛났다.
[수분 친화 Lv.1이 반응합니다.]
작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물줄기는 괴물의 얼굴을 강타했다.
하지만 괴물은 잠시 주춤했을 뿐이었다.
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약해!'
그때 청린이 앞으로 나섰다.
“물러서라!”
그녀의 손끝에서 거대한 물의 창이 형성되었다.
푸른 창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콰직!
괴물의 몸이 꿰뚫렸다.
검붉은 피가 바다에 흩어졌다.
하지만 나머지 세 마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피 냄새에 흥분한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청린의 표정이 굳었다.
“……이상하군.”
시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이 녀석들은 원래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그 순간.
바다 아래에서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희미한 목소리였다.
마치 누군가 먼 곳에서 자장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난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래?'
그때 청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듣지 마라!”
시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청린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저건…….”
그녀는 바다 깊은 곳을 노려보았다.
“영혼을 부르는 노래다.”
그 순간 시현의 눈앞에 붉은 창이 나타났다.
[경고.]
[미확인 정신 간섭이 감지되었습니다.]
[동해 용왕의 가호가 간섭에 저항합니다.]
[정신 저항 판정 진행 중……]
[저항 성공.]
시현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배 위의 주민들이 하나둘 난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엄마?”
민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어머니 역시 멍한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면 아래.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누군가 웃고 있었다.
『찾았다.』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게.』
청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이렌.”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바다 위로 노랫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청해목선의 푸른 돛이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