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화 - 첫 번째 바다
제 9화 - 첫 번째 바다
어둠이 걷히자 바다가 나타났다.
백시현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바다였다.
파도는 없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하늘과 수면의 경계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물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시현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뒤덮고 있던 상처가 사라져 있었다. 젖어 있던 옷도 멀쩡했다.
하지만 손등에 새겨진 동해 용왕의 문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눈앞에 낯선 메시지가 나타났다.
[미확인 기억에 접속했습니다.]
[기억명: 첫 번째 바다]
[열람 가능한 정보: 극히 일부]
[주의: 현재 장면은 계약자의 기억이 아닙니다.]
시현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 기억이 아니라고?”
『그렇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황급히 돌아섰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너구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몸을 빌려 갔던 놈.”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
시현은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여기로 데려온 것도 너야?”
『아니다. 봉인이 흔들리면서 기억의 일부가 열린 것 뿐이다.』
“그럼 여기가 대체 어딘데?”
남자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바다.』
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작되기 전?”
『신들이 각자의 왕좌를 차지하기 이전. 인간들이 바다에 이름을 붙이기 이전.』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직 일곱 바다가 나뉘지 않았던 시대다.』
그 순간 수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시현은 숨을 삼켰다.
일곱 개의 왕좌였다.
각각 다른 빛을 내는 왕좌들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푸른 왕좌.
붉은 왕좌.
은빛 왕좌.
그리고 검은 안개에 잠긴 왕좌들.
그 위에는 사람인지 괴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앉아 있었다.
시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신들인가?'
그때 왕좌들 사이로 거대한 사슬이 나타났다.
사슬은 바다 아래에서 솟아올라 일곱 왕좌를 연결했다.
그러자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나였던 수면이 서로 다른 색으로 나뉘었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저게 일곱 봉인?”
『봉인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왜 바다를 나눈 거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시현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넌 항상 중요한 건 안 알려주더라.”
『지금의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도 있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하는데?”
남자가 시현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말도 틀리지 않군.』
그 순간 바다가 흔들렸다.
일곱 왕좌 중 하나가 무너졌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사슬이 끊어졌다.
검은 물결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누군가 외쳤다.
"봉인하라!"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였다.
"저것을 다시 잠재워야 한다!"
"왕좌를 지켜라!"
시현은 귀를 막았다.
“크윽!”
눈앞의 풍경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 검은 옷의 남자가 말했다.
『기억해라.』
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바다가 나뉜 이유와 봉인이 무너진 이유는 같지 않다.』
“무슨 뜻이야?”
『누군가는 과거를 되돌리려 하고 있다.』
남자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를 필요로 하지.』
시현은 급히 손을 뻗었다.
“잠깐! 네 이름이라도 알려줘!”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대답했다.
『이름은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무너졌다.
“……커헉!”
시현은 눈을 떴다.
차가운 물이 폐 속으로 밀려드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무거웠다.
주변에는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돌아왔어.'
[미확인 기억 열람이 종료되었습니다.]
[영혼 안정도: 43%]
[수중 호흡 잔여 시간: 02분 17초]
시현의 얼굴이 굳었다.
기억을 보는 동안에도 현실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올라가야 해.'
그는 위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이 보였다.
청해목선이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검은 사슬 하나가 발목을 붙잡았다.
“……!”
시현은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서진 영혼의 닻에서 뻗어 나온 사슬이었다.
분명 핵심부를 파괴했는데도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때 목소리가 울렸다.
『도망칠 생각인가.』
영혼해의 집행자였다.
『닻을 부순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 닻 때문에 사람들이 죽게 생겼잖아!”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뭐?”
『이곳의 질서를 훼손한 자는 대가를 치른다.』
시현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죽든 말든 규칙만 지키면 된다는 거야?”
『그렇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시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럼 난 네 규칙 안 지켜.”
그는 발목을 붙잡은 사슬을 움켜쥐었다.
푸른 문양이 빛났다.
[동해 용왕의 가호가 반응합니다.]
시현은 사슬을 향해 신성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안 되나.'
그때 해류 감지가 활성화되었다.
[주변 수류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시현의 눈앞에 여러 흐름이 나타났다.
부서진 닻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기운.
위쪽에서 내려오는 푸른 신성.
그리고 그 사이에 형성된 작은 소용돌이.
'……푸른 신성?'
시현은 고개를 들었다.
청해목선에서 내려오는 빛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백시현!”
청린은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푸른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검은 물결이 그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젠장.”
청린은 이를 악물었다.
어깨의 영혼 상처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신성을 사용할 때마다 검은 문양이 번졌다.
그때 세이렌이 다가왔다.
『그렇게 계속하면 네 영혼도 무너질 거야.』
청린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켜라.”
『저 인간을 구하고 싶지 않아?』
청린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이렌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방법은 있어.』
“……무슨 방법이지?”
『영혼해의 문을 열어 주면 돼.』
청린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그래.』
“믿을 수 없다.”
세이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그녀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검은 문양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청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이곳의 신화종이 아니냐?”
『그렇다고 자유로운 건 아니야.』
세이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여. 거역하면 이 문양이 내 영혼을 조여 오지.』
“누구의 명령이지?”
세이렌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문양이 검게 빛났다.
『……윽!』
세이렌이 목을 움켜쥐었다.
청린의 표정이 굳었다.
거짓말을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잠시 후 세이렌이 힘겹게 말했다.
『이름은…… 말할 수 없어.』
청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조건은?”
세이렌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이 바다에서 데리고 나가.』
“……뭐?”
『영혼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청린은 망설였다.
세이렌은 위험한 존재였다.
이미 수많은 사람을 환각에 빠뜨렸고, 자신에게 영혼의 상처까지 입혔다.
그런 존재를 데려가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시현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청린은 이를 악물었다.
“……좋다.”
세이렌의 눈이 커졌다.
『정말?』
“단, 인간들을 다시 공격한다면 그 자리에서 널 제압하겠다.”
세이렌은 잠시 청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거래 성립이네.』
세이렌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낮고 느린 선율.
마치 오래된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검은 바다가 조금씩 흔들렸다.
[영혼해의 경계에 간섭이 발생합니다.]
[비정상적인 통로가 형성됩니다.]
청린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열리는군.”
세이렌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검은 문양들이 떠올랐다.
그때 집행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이렌.』
세이렌의 몸이 굳었다.
『네 임무를 잊었느냐.』
하지만 그녀는 계속 노래했다.
집행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벌을 받는다.』
그 순간 세이렌의 목에 새겨진 문양이 폭발하듯 빛났다.
『아아악!』
세이렌이 비명을 질렀다.
노랫소리가 끊어졌다.
형성되던 통로가 흔들렸다.
청린은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정신 차려라!”
세이렌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쉽지 않네.』
“그만해도 된다!”
『아니.』
세이렌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못 나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노랫소리가 검은 바다에 울려 퍼졌다.
바닷속.
시현은 갑자기 사슬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사슬이 흔들리고 있었다.
위쪽에서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푸른빛이 내려왔다.
[영혼해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개방됩니다.]
[탈출 가능 경로가 생성되었습니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청린!'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사슬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사슬이 조금씩 움직였다.
[영혼 안정도: 39%]
[수중 호흡 잔여 시간: 01분 02초]
시현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그 순간 집행자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디로 가느냐.』
시현의 몸이 굳었다.
집행자는 낫을 들어 올렸다.
『네 영혼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
검은 참격이 날아왔다.
시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끝인가.'
그 순간.
푸른빛이 시현을 감쌌다.
콰아아앙!
검은 참격이 푸른 장벽에 부딪혔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그의 앞에는 작은 용의 형상이 떠 있었다.
[동해 용왕의 가호가 긴급 발동합니다.]
[계약자의 생존을 위해 잔여 신성을 소모합니다.]
집행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동해 용왕.』
푸른 용의 형상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내 계약자다.』
시현의 눈이 커졌다.
“……용왕님?”
『백시현.』
용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당장 올라가라.』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푸른빛을 향해 헤엄쳤다.
뒤에서 집행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릇을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용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푸른 장벽을 더욱 두껍게 만들었다.
『이곳은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다!』
집행자가 낫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푸른 장벽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그 사이 시현은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잡았다!”
청린이 시현의 팔을 붙잡았다.
푸른 물줄기가 두 사람을 청해목선 위로 끌어올렸다.
콰아앙!
시현은 갑판 위로 떨어졌다.
“커헉!”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떨렸다.
청린은 급히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백시현!”
시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살았네요.”
청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현은 작게 웃었다.
“걱정했어요?”
청린은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는 혼자 뛰어들지 마라.”
“……네.”
“약속해라.”
시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건 상황 봐서…….”
“백시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그때 갑판 반대편에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세이렌이었다.
그녀는 목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시현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쟤는 왜 저래요?”
청린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영혼해의 경계를 열었다.”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세이렌이요?”
청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무슨 조건인데요?”
청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저자를 함께 데려가야 한다.”
시현은 입을 벌렸다.
“……네?”
그 순간.
청해목선 주변의 검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멀리 푸른 하늘이 보였다.
[영혼해의 회랑에서 이탈합니다.]
[현재 해역: 미확인]
[위험 등급: 보통]
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수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영혼해의 집행자와 접촉했습니다.]
[첫 번째 바다의 기억을 확인했습니다.]
[미확인 존재의 봉인이 반응합니다.]
[새로운 칭호가 부여됩니다.]
[칭호: 금지된 그릇]
[효과: 미확인]
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금지된 그릇?”
그때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이다.』
시현은 눈을 감았다.
'……뭐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목소리가 대답했다.
『너를 찾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같은 시각.
어딘지 알 수 없는 바다 위.
거대한 철제 함선이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함선의 갑판에는 수십 명의 무장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군복에는 삼지창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함교 안.
한 남자가 거대한 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정장.
차가운 눈빛.
그리고 손등에 새겨진 푸른 삼지창.
그의 앞에 부하가 다가왔다.
“강태준 님.”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고해.”
“영혼해에서 비정상적인 신성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태준의 손이 멈췄다.
“……영혼해?”
“네. 동해 용궁의 선박 한 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계약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태준이 미소 지었다.
“……재미있군.”
그는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포세이돈 님께서 말씀하신 존재가 나타난 건가.”
그 순간 손등의 삼지창 문양이 빛났다.
[포세이돈의 신탁이 도착했습니다.]
[대상: 강태준]
[명령: 금지된 그릇을 확보하라.]
태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대의 방향을 바꿔.”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어디로 향합니까?”
태준은 바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동해 용궁의 선박을 찾아.”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될 기회가 찾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