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섯 살 장서하 어린이
1. 여섯 살 장서하 어린이
2006년 4월 17일.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서하는 한동안 멍- 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불 속에서 손을 꺼냈다. 작고 말랑한 손바닥에 짧고 통통한 손가락. 주먹을 한 번 꼭 쥐었다가 천천히 펼쳐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작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로 만 다섯 살이 됐다고 해서 자고 일어난 사이 갑자기 손이 쑥 커졌을 리는 없으니까. 아직 10년은 더 자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가끔은 이 조그만 몸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서하는 다시 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 몸으로 산 지도 벌써 다섯 해였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진짜 처음에는 미치는 줄 알았지.’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껏 입을 열어서 말을 하려고 하면. “으애애앵!” 이 꼴이었으니까. ‘…….’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다. 배가 고파도, 졸려도 울음이 나오고. 무엇보다 울어야 분유가 나오든 기저귀를 갈아주든 했으니. 신생아의 생리현상은 본인이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걸 깨닫고 난 뒤부터 서하는 그냥 평범한 신생아로 살기로 했다. 한마디로 틈만 나면 울어젖혔다는 말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딘지 알아내는 일. 처음 귀에 들어온 이름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서하. 영민. 혜진… 아마도 가족들의 이름. 그리고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익숙한 단어 하나. …해원? 처음에는 그냥 가족 이름인가 싶었다. 그러다 말을 알아듣고, 거실에 놓인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볼 수 있게 되면서 확신이 들었다. 2001년생 장서하. 그녀는… 대한민국 해원그룹. 무려 재계 서열 7위의 대기업 집단인 해원그룹 회장 장태국의 손녀로 태어났던 것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기쁘기보다 얼떨떨한 기분이 먼저였다. 전생의 서하에게 가족이란 건 없었다.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심지어는 명절에 찾아갈 본가라는 곳조차 없었다. 오로지 혼자서 아등바등 돈을 모으고 굴려가며 살아남았던 삶. 그런데 다시 눈을 떠 보니 부모님이 있었고, 오빠가 있었으며, 조금 뒤에는 여동생까지 생겼다. 그것도 무려 재벌가에서. 뭐- 성별이 바뀌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재벌집 손녀라는 타이틀 앞에서는 그 정도야 가뿐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꿈인가?’ 처음에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망상인가 싶었다. 곧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어린아이의 손으로는 제 뺨을 때려봐야 간지러울 수준이라, 눈에 보이는 대로 엄마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은 뒤에야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우리 서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괄량이일까?” 살짝 촉촉해진 눈으로 서하를 내려다보던 엄마의 서늘한 눈매는 덤이었고. 똑똑. 그때 방문이 열렸다. “서하야. 일어났어?”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엄마 윤혜진이 고개를 내밀었다. 서하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네, 엄마.” “우리 딸, 생일 축하해.” “헤, 고마워요.” 혜진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서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섯 해 동안 매일같이 받아온 손길이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묘한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그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걱정하고 아껴주는 것. 그것이 서하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있을 때 잘해야지.’ 서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손길에 얌전히 머리를 맡겼다. “잘 잤어?” “네.”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없어요. 완전 멀쩡해요.” “어젯밤에 이불 다 차내고 잤잖아.” “엄마가 다시 덮어주셨잖아요.” 혜진이 피식 웃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중간에 살짝 깼거든요.” 사실 완전히 깬 건 아니고, 옅게 잠들었다가 이불이 덮이는 감촉에 잠시 정신이 들었을 뿐이지만. 혜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서하는 원래 그런 아이였으니까. 키우는 데 손이 참 덜 들어가는 아이라고 할까? 서하는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떼를 쓰는 법이 거의 없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바닥에 드러누운 적도 없고. 글자를 가르쳐주면 금방 읽었고, 숫자를 알려주면 곧잘 계산했다. 가끔 어른들이 보는 경제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뉴스 채널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혜진도 적잖이 놀랐다. 혹시 자기 딸이 정말 영재나 천재라도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물론 서하도 엄마의 그런 반응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조심하기 시작했다. 꼬마 천재가 되어 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밑천이 다 드러날 테니. 알 수 있는 것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고, 너무 빨리 익혔다 싶으면 며칠쯤은 더듬거렸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도 전부 알아들었지만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신문이나 뉴스는 꾸준히 챙겨 봤지만… 원래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도 호기심을 보이기 마련이니까. 덕분에 혜진의 놀라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서하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조숙하고 머리가 좋은 어른스러운 어린이. 그 정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까. “얼른 씻고 나와. 아빠 기다리셔.” “아빠 아직 출근 안 하셨어요?” “응. 오늘은 우리 서하 얼굴 보고 가신대.”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서윤이도 기다리고 있어.” 서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서윤이가 왜요?” “언니 생일이라고 새벽부터 혼자 신났어.” “내 생일인데?” “그러게 말이다.” 혜진이 웃으며 방을 나갔다. 서하는 침대에서 폴짝 내려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 살짜리가 신났다는 말은 경험상 대개 좋은 징조가 아니었으니까. ---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마자 서윤이 쪼르르 달려왔다. “언니!” 작은 몸이 그대로 서하의 다리에 들러붙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서하가 한 발 뒤로 휘청했다. “야, 장서윤.” “생일!” “그래. 언니 생일이지.” “케이크!” “저녁에 먹을 거야.” “지금!”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서윤의 통통한 볼살이 삽시간에 시무룩해졌다. ‘…언제 봐도 귀엽긴 해.’ 아빠도 그렇고, 엄마는 나가면 미스코리아 뺨칠 정도라고(아빠의 표현이다) 할 만큼 미인이라 그런지 유전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타고났다. 다소 올드한 표현이지만 지금이 2006년임을 감안하면 뭐. 그리고 그 유전자의 축복은 서하 역시 마찬가지. 집 밖에 나갈 일은 별로 없지만, 한 번 나가기만 하면 귀염뽀짝한 외모로(엄마의 표현이다) 주위 어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다. ‘이 정도면 아역 배우나 연예인 해도 될지도?’ 가끔 세수를 하다 거울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니 말이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큰 눈, 우유빛깔의 하얀 피부까지. 누가 봐도 참 예쁜 아이라는 칭찬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는 서하 본인이 봐도 정말 미래가 기대되었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서하가 시무룩해진 서윤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저녁에 언니가 제일 큰 조각 줄게.” 서윤의 얼굴이 곧장 밝아졌다. “진짜?” “응.” “딸기이?” “음, 딸기는 언니가 먹을 건데.” “…….” 서윤이는 금세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알았어. 특별히 하나만 줄게.” 그제야 서윤이 헤-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언니 좋아!” “그래, 그래.” 잔뜩 사랑받고 자란 세 살 어린이 서윤이는 금세 기분이 풀려 방방 뛰었다. “서윤이 버릇 나빠지게 다 받아주지 마.” 소파에 앉아 있던 장성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9살짜리 오빠. 중2병도 아니고 초2병이 도졌는지 요즘 나날이 싸가지가 없어지는 중. ‘오빠만 아니면 확 그냥…’ 9살짜리랑 싸우는 것도 웃겨서 지금은 넘어간다. 그때 식당 쪽에서 아빠, 장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공주님들, 이제 밥 먹자.” 서하의 가족들이 하나둘 식탁 자리에 앉았다. 장영민은 이미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손목시계까지 찬 것을 보면 아침 식사를 마치는 대로 바로 회사로 출근할 모양이었다. 서하가 의자에 올라앉자 영민이 작은 상자를 하나 슥- 내밀었다. “서하야. 생일 축하한다.” “어? 선물이요?” “그래. 저녁에는 바쁠 것 같으니 미리 주는거야.” 상자 안에는 앙증맞은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어린이용 사이즈로 나온 것 같았지만, 얼핏 보아도 흔히 볼 법한 시계는 아니었다. “와, 이거 되게 비싸 보이는데.”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영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게 비싼 건지는 어떻게 알았데?” “...” 아차, 말실수했다. 서하를 본 혜진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보. 방금 봤어요?” “뭘 말이야?” “서하가 또 저러잖아요. 아빠가 애들 앞에 두고서도 맨날 일 얘기, 돈 얘기만 하니까 애가 벌써부터 저러죠.” “크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6살짜리가 선물을 받으면 예쁘다고 좋아해야지, 비싼 것부터 찾고.” 서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떴다. ‘아빠 때문은 아닌데…’ 그냥 어쩔 수 없는 습관이라고 할까?. 아무리 재벌집 손녀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정신머리는 성인에 가까웠으니까. ‘꼭 옛날 버릇 때문에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재벌집 손주가 돈 걱정한다는 게 웃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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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재사회화가 조금은 덜 된 여섯 살 어린이 장서하는 여전히 돈 걱정이 많았다. “하하, 뭐. 우리 서하가 어릴 때부터 돈 개념은 확실했지.” 장영민이 사람 좋게 웃으며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들 잊지 않았지? 오늘 저녁에 본가 가는 거.” “네!” “할부지?” “그래, 할아버지 집에 가서 언니 케이크 촛불도 불고, 할아버지도 뵐 거야.” 그래, 바로 그 할아버지가 문제다.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해원그룹. 2006년 현재 재계 순위 7위. 그룹 매출 16조 원, 자산 20조 원. 임직원만 5만여 명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거대한 해원그룹은. ‘2008년 금융위기 때.’ 무너질 예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