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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탕이 많으면

재벌집 손녀로 태어났습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2. 사탕이 많으면

저녁이 되자 서하네 가족은 성북동 본가로 향했다.차창 밖으로는 2006년의 서울 거리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화창한 봄철을 맞아 거리는 한껏 화려한 생동감을 뽐내는 중이었고.‘강남은 지금도 삐까뻔쩍하네.’미래와 조금의 차이는 있어도 역시 강남은 강남인 모양.뒷좌석 가운데에 앉은 서윤이는 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골아떨어진 상태였다. 꾸벅꾸벅 조는가 싶더니, 이내 서윤이의 고개가 서하의 어깨 위로 툭 기울었다.서하가 슬쩍 밀자 반대쪽으로 넘어갔다가, 잠시 뒤 서윤의 고개가 다시 기울어 서하에게 턱- 기댔다.‘에휴. 이 꼬맹이가.’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앞으로 2년 뒤인 2008년, 해원그룹은 금융위기를 정면으로 맞는다.주력 계열사인 해원전자가 휘청이면서 위기는 그룹 전체로 번진다. 금융계열사들은 하나둘 팔려나가고, 호텔과 백화점마저 조각 조각 나눠져 매각 대상이 된다.결국 금융 부문의 책임을 진 아빠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할아버지가 평생 일군 회사는 채권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장씨 일가의 지분도 사실상 사라지고.그들에게 남은 건 부스러기 계열사 몇 개, 그리고 가문의 자산 조금.‘뭐, 솔직히 그것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 없겠지만…’그 부스러기 자산들만 해도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부임이 분명하다. 로또를 몇 번 당첨되도 가질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일 테니까.‘…그렇지만 이걸 알고도 그냥 있으라고?’할아버지의 경영 능력이 파멸적이어서 그룹이 분해된 거면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다.하지만 서하가 기억하기에 해원그룹은 그저 단순히 오너의 무능이나 방만한 경영으로 사라진 그룹은 아니었다.호황기에 무리한 투자를 한 기업이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파도를 미처 넘지 못하고 추락한 것일 뿐.‘오히려 할아버지는 능력 있는 경영인이지.’서하를 예뻐하는 할아버지라서 평가가 후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평가를 봐도 그랬다.해원그룹을 무너뜨린 것은 금융 위기도 금융 위기이지만…‘반도체, 그게 문제지.’반도체 치킨게임. 08년의 리먼 사태와 함께 해원그룹이 넘어야 할 산이었다.그리고 서하는…‘기왕 재벌 그룹 손녀로 태어났는데, 망하는 건 억울하지 않겠어?’이번 생의 목표. 잘 먹고 잘 살기. 기왕이면 재벌가 손녀로 폼나게.그걸 위해서 의지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 *본가에는 이미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서하 왔니?”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 한명숙이 가장 먼저 서하를 반겼다.“할머니, 안녕하세요.”“우리 생일 주인공 왔네.”한명숙이 품에 안으려 하자 서하는 얌전히 다가갔다.처음에는 이런 것도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지 오래였으니까.“할아버지는요?”“안에 계셔. 네 큰아버지랑 이야기 중이야.”거실에는 큰아버지 장영준의 가족과 고모 장수경의 가족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른들은 늘 그렇듯 여상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둘러 앉았다.서하는 할머니 옆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주인공이 자신이라지만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서하는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꼬맹이고, 아직은 밥 잘 먹고 유치원만 잘 다녀도 집안 어른들이 크게 바랄 게 없는 나이였으니까.몇 년 후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어른들도 공부니 유학이니 하며 서하를 귀찮게 굴 테지만… 지금은 그저 어른들의 덕담을 듣고 생일선물이나 두둑하게 챙기면 되는 셈.잠시 후 식사가 시작됐다.재벌 회장 할아버지가 아끼는 손녀딸의 생일상답게 상차림은 꽤나 화려했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다들 감흥이 없었지만.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이야기.처음은 그저 평범한 신변잡기로 시작했다.아이들 학교 이야기나 누가 어디에 다녀왔다는 이야기, 아니면 해원호텔에서 이번에 새로 외국인 총주방장을 스카우트해 오기로 했다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식사가 중반으로 넘어갈 무렵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로 흘러갔다.“아버지, 보고 받으셨겠지만 전자가 이번 분기도 생각보다 좋습니다.”큰아버지, 장영준이 말했다.식탁 상석에 앉아 있던 장태국이 고개를 들었다.“메모리 쪽 말이가? 보고는 받았다.”“예. 서버 쪽 수요도 탄탄하고 모바일 쪽도 계속 물량이 붙고 있습니다.”“그래, 가격은 좀 괜찮고?”“당분간은 괜찮을 걸로 보고 있습니다.”장태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 옆에서 말없이 미역국을 떠먹던 서하는 어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이미 여러 번 보고 들은 이야기였다.반도체 호황과 수요 증가, 그리고 좋은 실적.이건 반도체 치킨게임이 오기 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반도체 대호황의 조짐이니까.장영준이 말을 이었다.“곧 보고를 올릴겁니다만, 아무래도 신규 라인 증설은 예정대로 밀고 나가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그 말에 미역국을 뜨던 서하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래? 규모는 어느 정도로 잡았나?”장태국이 물었다.“처음 계획보다 조금 더 키우는 안을 보고 있습니다. 어차피 짓는 김에 선단공정 대응까지 한꺼번에 하는 쪽이 효율적이니까요.”“돈이 솔찬히 들어갈 텐데.”이번에는 장태국의 시선이 차남인 아빠, 장영민에게 향했다.영민이 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전자 자체 보유 현금도 있고 그룹 차원의 조달 여력도 충분합니다. 다만 외화차입 비중이 늘어나는 건 조금 봐야 할 것 같습니다.”“요즘 금리면 조달해도 남잖아. 남의 돈 안 깔고 장사하는 집이 어디있다고.”큰아버지 장영민의 말에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뭐, 요새는 괜찮긴 하지.”2006년 해원전자의 대규모 생산설비 증설 결정.훗날 해원그룹 몰락의 시작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결정이었다.물론 공장 하나 지었다고 회사가 망하는 것은 아니다.문제는 그 뒤.시장이 좋으니 경쟁사들도 앞다투어 증설한다. 특히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이 국가적 지원을 받아 돈을 말 그대로 쏟아붇는다.생산량이 늘고, 결국 공급이 수요를 한참 넘어서는 건 당연한 수순.메모리 가격은 파멸적으로 떨어지는데 해원전자는 이미 공장을 짓고 있어서 중간에 쉽게 멈추지도 못한다.거기에 금융계열사들은 해외 파생상품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을 늘렸다.이 호황이 계속될 거라는 전제 아래서.그리고 2008년.그 모든 전제가 한꺼번에 무너진다.반도체 적자. 환율. 외화부채. 금융 손실. PF. 유동성 위기.IMF에서도 살아남은 해원 그룹이지만, 이 두 번째 파도를 맞고서는 결국 침몰한다…는게 서하의 기억이다.결국 해원 그룹은 폭풍우를 향해 배를 몰아가는 중이라는 말이다.서하는 그 탑승객의 하나고. 그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몸으로.“서하야.”그때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서하를 불렀다. 서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네?”“우리 강아지, 왜 밥을 안 먹니? 미역국 맛없어?”“아니요, 먹고 있어요.”“아까부터 숟가락만 들고 있잖니.”서하는 그제야 어른들의 대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굳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생각 좀 했어요.”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보던 장태국이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여섯 살짜리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누?”식탁에 둘러앉은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하에게 쏠렸다.평소 같았으면 그냥 배시시 웃으며 적당히 애교로 넘겼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아니다.아직까지 해원그룹이 살아남을 골든타임은, 지나지 않았으니까.서하가 어느 정도 몸을 통제할 수 있을 때부터 빨빨대며 세워왔던 계획.그걸 오늘부터 실행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서하는 할아버지 장태국을 마주 보았다.회사는 지금 가장 잘나가고 있었다. 아마 올해가 지나면 창사 이래 최대의 성적표를 받아들 테니까.할아버지는 이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그래서 더 투자하려고 하는거지. 원래 반도체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위너 테이크 잇 올(Winner takes it all) 산업. 그 사례를 이미 1980년대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보여주었으니까.‘여기서 금융위기가 올 거라고 말 할 수도 없고.’빅 쇼츠란 영화로 전세계에 숏포지션의 대가로 이름을 알린, 숏신사들의 아이돌이 된 마이클 버리도 지금은 하루 하루 자신의 증거금을 까먹으며 제발 시장이 폭락하기를 드럼 두드리면서 기도하고 있을 뿐.지금 여섯 살짜리 서하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던지는 천진난만한 질문이어야 했다.그런데 이제 핵심을 꿰뚫은.“할아버지.”“그래. 말해 봐라.”“다른 회사들도 공장을 지어요?”순간 식탁이 조용해졌다.장태국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공장?”“네. 아까 큰아빠가 공장을 새로 짓는다고 했잖아요.”“그랬지.”“다른 회사들도 지어요?”큰아버지 장영준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서하가 회사 이야기도 듣고 있었어?”서하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래, 다른 회사들도 열심히 짓고 있지. 지금 물건이 아주 잘 팔리거든.”“많이요?”“그럼, 아주 많이.”서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그럼 물건이 너무 많아지면 어떡해요?”식탁 위의 시선이 장영준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장영준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약간 머뭇대던 장영준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어른들이 시장을 분석하는 거야.”“근데 다들 잘 팔린다고 생각해서 공장 짓는 거잖아요.”“그렇지.”“그럼 그 생각이 다 틀리면요?”서하의 말에 장태국의 시선이 손녀를 향했다.“서하는 왜 그런 생각을 했누?”서하는 어깨를 으쓱했다.“그냥요.”“그냥?”“전 사탕을 좋아하지만, 그리고 서윤이도 사탕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사탕이 엄청나게 많이 있어도 그걸 다 살 것 같지는 않아서요.”딱 여섯 살 수준에 맞춘 원론적인 비유.그런 서하의 대답에 장태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래?”“네.”“우리 서하, 이런 건 누가 가르쳐줬누?”“아무도요.”서하는 다시 숟가락을 들며 말을 이었다.“그냥 그런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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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국은 더 묻지 않았다.잠시 뒤 식사는 다시 이어졌고, 장영준도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대화였지만, 그래도 서하는 만족했다.조금 전까지 편하게 기대앉아 있던 할아버지, 장태국이 등을 의자에서 떼었다는 것을 보았으니까.그리고 할아버지라면 방금 서하의 말에 들어 있던 의미를 알아보았을 것이다.그야- 1980년대 일본 기업의 반도체 치킨게임과 미국 반도체의 몰락, 그리고 그 와중에 어부지리로 성장한 기업이 바로 오성전자와 미래전자… 그리고 해원전자 였으니까.‘일단 하나.’작은 돌멩이 하나는 던져놓았다.* * *식사가 끝난 뒤에는 생일 케이크가 나왔다.재벌가 손녀의 케이크답게 화려하고 풍성한 장식으로 꾸며진 생크림 케이크.케이크 위에는 서하의 나이에 맞춘 여섯 개의 초가 꽂아져 있었고.초에 불이 붙자 서하의 옆에 붙어 있던 서윤이 신나서 호들갑을 떨었다.“언니! 불!”“알아.”“후- 해!”“내가 할 거야. 불장난 하면 밤에 오줌싼다, 너.”“나도 할래!”“네 생일 때 해.”“같이!”“안 돼.”서하의 말에도 서윤은 벌써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었다.서하는 그런 서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그리고 서윤이 바람을 내뱉으려는 순간.서하가 동생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으읍!”서윤이가 서하의 손에 막혀서 버둥거리는 사이, 서하는 재빨리 후- 촛불을 껐다.“어머. 얘들 좀 봐. 서하야, 이제 소원 빌어야지.”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셨고.‘소원이라…’서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촛불을 가만히 바라봤다.이번 생에는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좋아하는 걸 마음껏 좋아하면서 살 것이다.음, 기왕이면 재벌가 손녀로.서하는 촛불 너머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웃고 있는 엄마 아빠.그리고 자기 손을 떼어내려고 낑낑거리는 여동생.조금 떨어진 곳에는 할아버지가 있었다.전생에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사람들.가족.‘그래. 우선 가족들부터 지키고 시작하자고.’서하는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