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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윤이는 고래가 좋아

재벌집 손녀로 태어났습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4. 서윤이는 고래가 좋아

해원그룹 장태국 회장은 출근하는 차 안에서 손녀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손녀가 했던 말을.  서하가 무언가 이해하고 반도체를 이야기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여섯 살짜리가 D램의 수급을 이해한다거나, 글로벌 메모리업체들의 설비투자 계획을 분석했다고 생각할 만큼 장태국은 손녀를 과대평가하지 않았으니까.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일 수도 있었다.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이란, 의례 어디선가 어른스러운 말을 들었다 싶으면 그걸 써먹고 싶어 하는 법이니.  ‘그런데 사탕 비유는 너무 정확했단 말이지…’  그럼에도 장태국 회장이 자꾸 대화를 곱씹는 이유.  그건 서하의 말이 어린아이 답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반도체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법. 공급자는 한정되 있지만, 어느 하나라도 공급을 예측 이상으로 늘린다면…’  서하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공장을 늘리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모두 틀리면 어떻게 되느냐고.  장태국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익숙한 기시감이 장태국의 몸을 덮쳐왔다.  1997년.  해원그룹이 망하기 직전까지 몰리고, 팔다리 한두개쯤은 떼어 낸 다음에야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 때도 해원이 벌였던 사업 하나하나에는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물동량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건설도 호황이었다. 해외 반도체 공장은 생산 케파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었고.  심지어 IMF 당시 돈 먹는 하마여서 그룹의 존립을 위험케한, 중국에 지은 그 반도체 공장은 지금 해원전자의 수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알짜배기가 아니던가?  ‘그 때 버텨서, 지금은 수익을 내지. 하지만 버티지 못했다면…’  해원이 IMF에 백기를 들고 전자 사업을 포기했다면, 중국 반도체 공장은 그저 멍청한 투자로 한국 경제사에 기록 한 줄로 남았을 뿐이리라.  요지는, 그룹이 살아남을 수 있느냐에 있었다.  기실 해원그룹은 IMF의 광풍에서도 버틴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건실한 경영을 해왔다.  분식으로 그룹을 통째로 날린 대원그룹이나 한도 그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부채율.  그게 해원이 IMF에서 살아남고, 이후 재빠르게 체력을 회복해 오히려 금융 부분까지 손을 뻗칠 수 있었던 이유니까.  장태국은 눈을 떴다.  차창 밖으로 분주한 서울의 아침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차가 사옥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장태국은 대답 대신 넥타이를 한번 정리했다.  당연하게도 손녀의 말 하나로 투자계획을 뒤집을 생각은 없었다.  해원전자의 현재 실적은 좋았다.  메모리는 돈을 벌고 있었고, 앞으로의 수요 전망도 나쁘지 않았다.   규모가 곧 원가경쟁력이 되는 산업에서 남들이 투자할 때 혼자 멈추는 것 역시 위험했다.  여섯 살 손녀의 한마디를 듣고 수조 원짜리 계획을 접는다면 그게 더 큰 문제.  다만, 장태국은 희미한 위험 신호를 느꼈다.  지금껏 해원그룹을 건실하게 경영해온 장태국의 직감.  집무실에 들어간 장태국은 오전 보고를 몇 건 처리한 뒤 비서에게 말했다.  “전략기획 들어오라 그래.”  “예, 회장님.”  십여 분 후 들어온 전략기획실장은 원래 예정에 없던 호출에 약간 굳은 얼굴이었다.  장태국은 인사도 짧게 받고 바로 물었다.  “전자 증설안 있지.”  “예.”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잡아놓은 거.”  “예, 회장님. 중장기 생산능력 확대 계획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장태국이 손을 내밀었다.  “그거 다시 가져오게.”  실장이 잠시 멈칫했다.  분명 이미 여러 차례 검토가 끝난 자료였다. 회장의 결재까지 받은. 그런데 그걸 다시 가져오라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  “검토 항목을 추가해야겠어.”  장태국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시 한 번 보자. 경쟁사들 증설계획까지 전부 붙여. 그간 업데이트 된 내용들 있을 거 아니야? 어느 회사가 언제 얼마만큼 늘리는지. 발표한 것만 갖고 오지 말고 실제 집행 가능성까지 다시 한 번 체크해 봐. 특히 정부 정책하고 교차로 체크하고.”  “예, 회장님. 알겠습니다.”  “차입도… 차입도 좀 보자.”  임원이 메모하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전자에서 직접 조달하는 것, 그룹에서 연결되는 것, 외화 비중. 만기 구조까지 다시 가져와 봐.”  “예.”  “그리고 현금흐름도 새롭게 짜봐.”  장태국의 말이 이어졌다.  “좋을 때 말고 가격 떨어졌을 때로.”  “예 회장님. 새로 시나리오 나눠서 다시 검토해 올리겠습니다.”  전략기획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이정도면 사실상 호황을 전제로 만들어진 증설안을 반대쪽에서 한 번 뒤집어보라는 소리.  “투자 규모를 조정하실 생각이십니까?”  장태국이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아, 내 말에 보고서를 끼워맞추지 말고 제대로 한 번 해 보란 말이야. 알겠나?”  “예, 회장님. 송구합니다.”  “그래,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입조심하고. 괜히 얘기 새 나가면 전자 아들 사기 떨어질라.”  “예, 회장님.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 * *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 엄마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  “엄마 책 하나만 보고 갈게.”  차가 멈춘 곳은 백화점이 아니라 집 근처에 있는 비교적 큰 서점이었다.  1층 한쪽에는 문구와 작은 생활용품을 팔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책장이 길게 이어졌다. 엄마는 미술책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하다가 우리를 어린이 코너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보고 있어. 멀리 가지 말고.”  “네.”  “네에.”  서윤이가 서하보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엄마는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서윤아. 언니 따라다니고.”  “응.”  “서하야, 동생 좀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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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제야 엄마는 안심한 듯 미술 코너로 갔다.  서하는 낮은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유아용 책이 대부분이었다.  동물 그림책, 숫자 공부, 색칠놀이, 스티커북.  당연하게도 딱히 사고 싶은 책은 없었지만 서윤이를 데리고 어딜 갈 수도 없고. 그래도 책 표지를 구경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자동차와 기계 그림이 잔뜩 그려진 책 하나를 집었다.  옆에 있던 서윤이가 슬쩍 들여다봤다.  “뭐야?”  “자동차.”  “나도 볼래.”  서윤은 옆에 붙어 몇 장을 같이 넘겨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맞은편 책장으로 가버렸다.  음, 서윤이의 취향은 확실히 자동차는 아닌 모양이다.  서윤이가 향한 쪽에는 동물이 잔뜩 그려진 그림책이 있었다.  공룡책 하나를 뽑았다가 조금 보고 내려놓고, 이번에는 그림이 화려한 동화책을 들었다.  그때 서윤이가 돌아왔다.  손에는 토끼가 그려진 얇은 책이 들려 있었다.  “언니 이거 봐.”  “토끼네.”  “응.”  서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윤이가 만족했는지 자기 책을 다시 품에 안았다.  그러다 서하가 들고 있는 책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건?”  “공주 나오는 책.”  “나도 그거 볼래.”  “너 토끼책 있잖아.”  서윤은 잠깐 자기 손에 든 책과 서하의 책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고민하더니 토끼책을 제자리에 꽂고 옆에 있던 같은 시리즈를 하나 꺼냈다.  “이거.”  “그거 나랑 비슷한 건데?”  “응.”  서하는 서윤을 빤히 쳐다봤다.  그냥 서하가 보는 게 괜찮아 보이면 자기도 한 번 보고 싶은 모양이다.  “너 이거 진짜 좋아?”  “응.”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잖아.”  “예뻐.”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 듯했다.  ‘공주 취향인가.’  그동안 딱히 공주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제 슬슬 공주병이 오기 시작할 나이인가.  그런데 몇 장 넘기던 서윤의 시선이 곧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낮은 책장 끝에 커다란 고래가 그려진 그림책이 세워져 있었다.  서윤은 지금 보던 책을 내려놓고 그쪽으로 갔다.  “고래.”  이번에는 서하가 뭘 들고 있는지도 잊은 얼굴이었다.  작은 손으로 책을 꺼내더니 한참 표지를 보았다.  “그게 더 좋아?”  “응.”  “그럼 그거 해.”  “언니는?”  “나는 이거.”  서하는 처음 골랐던 자동차책을 들어 보였다.  서윤이는 자동차 책을 한 번 보고, 자기 고래책을 한 번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바꿀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고래.”  “그래.”  둘이 각자 책을 하나씩 들고 있으니 마침 엄마가 돌아왔다.  두꺼운 전시 도록과 책 몇 권이 팔에 안겨 있었다.  “다 골랐어?”  “네.”  “나도.”  서윤이가 고래책을 번쩍 들어 보였다.  엄마가 웃었다.  “서윤이는 고래가 좋아?”  “응. 엄청 커.”  “그렇지. 엄청 크지.”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엄마는 1층에서 작은 과자 봉지도 하나씩 사줬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서윤이 한참 고래 이야기를 했다.  “고래는 커.”  “응.”  “언니보다 커.”  “당연하지.”  “엄마보다도 커.”  앞에서 운전하던 엄마가 웃었다.  “엄마보다 훨씬 크지.”  “아빠보다도?”  “응.”  그 대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서하가 새로 산 자동차 책을 보면서,  ‘나중에 면허 따면 뭘 사지? 람보르기니? 부가티? 스포츠카는 승차감이 불편하다던데…’  따위의 생각을 하고있을 때.  옆에서 툭, 무언가 닿았다.  서윤의 머리였다.  아까까지 그렇게 떠들어 대더니 어느새 눈이 감겨 코- 하는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고래 동화책이 그대로 놓여진 채.  차가 방향을 틀자 작은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서하는 책에서 손을 때고 쓰러지는 서윤의 머리를 받아 어깨에 기대게 했다.  “서윤이 잠들었어?”  앞에서 엄마가 물었다.  “네.”  “오늘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했나 보네.”  “완전 애기라니까요. 어쩔 수 없죠 뭘.”  괜히 심술이 나서 서윤의 볼을 살짝 찔렀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서하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귀여워서 봐준다 장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