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수족관과 통장
5. 수족관과 통장
서윤이 고래에게 빠진 지 벌써 며칠째. 정확히는 고래 그림책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래. 밥을 먹으면서도 고래. 잠들기 전에도 고래. 어제는 목욕을 하다가 욕조 안에서 두 팔을 벌리고는 자기가 고래라고 주장했다. “푸우우-” 그리고 오늘 아침. 서윤은 식탁에 앉자마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고래는 이렇게 물 뿜어.” “코로 물 뿜는 건 아니야.” 서하가 무심코 정정하자 서윤이 고개를 홱 돌렸다. “뿜어.” “고래는 그냥 숨 쉬는 거야.” “물, 뿜어.” “……그래.” 세 살짜리 애랑 논쟁해서 뭐하겠어? 서하는 포기하고 식빵에 잼을 발랐다. 맞은편에 앉은 아빠는 웃음을 참는지 입가를 손으로 문질렀고, 엄마는 굳이 참을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웃었다. “서하는 왜 동생한테 그런 걸 하나하나 따져.” “나중에 잘못 알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만 서윤인 아직 세 살인걸?” ‘…그건 맞지.’ 하지만 언니로서 동생을 올바른 길로 계도하는 건 언니의 정당한 의무. 나이가 조금만 더 들면 서윤이도 서하의 깊은 뜻을 알아주리라… 하고 서하는 생각했다. 서윤은 관심도 없었지만. 서윤이가 자기 의자 옆에 세워둔 그림책을 끙끙거리며 들어 올리더니 펼쳤다. 페이지 한가득 푸른 고래가 그려져 있었다. “아빠.” “응.” “고래.” “그래, 고래네.” 서윤이 그림책을 탁 덮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했다. “고래, 진짜 볼래.” 장영민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진짜 고래를?” “응.” “어디서?” “바다. 고래는 바다에 살아.”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원래 세 살짜리에게 바다가 얼마나 크고, 고래가 어느 바다에 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서윤은 이미 지금 당장 출발할 생각인지 의자에서 내려오려고까지 했다. 엄마가 재빨리 허리를 붙잡았다. “밥부터 먹어야지.” “고래 보러 가야 돼.” “고래도 서윤이 밥 먹을 때까지는 기다려 줄 거야.” 서윤이가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서하는 포크로 계란을 찔렀다. ‘진짜 고래라.’ 그림책으로 볼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서윤이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궁금해졌다. ‘…세뇌됐나.’ 서윤이가 하도 말하고 다녀서 그랬을지도. “수족관 가면 볼 수 있지 않아요?” 서하의 말에 서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수족관?” “응.” “거기 고래 있어?” 그 눈빛을 보고 나니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없다고 하면 울 것 같은 눈빛의 서윤이. 아빠가 웃으며 서하를 바라봤다. “으음, 돌고래 정도는 찾아보면 있겠지.” “오늘?” 서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빠가 엄마 쪽을 바라봤다. 엄마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짚어보는 듯 잠시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나는 괜찮아요. 성우가 없어서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서윤이가 보고 싶어 하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하에게 왔다. 서하는 왜 묻느냐는 얼굴로 계란을 한 조각 먹었다. “저도 갈래요.” 뭐- 굳이 보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고래!” 서윤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 * * 수족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뛰어나간 것은, 당연하게도 서윤이었다. 정확히는 뛰어나가려다가 엄마에게 붙잡혔다. “장서윤.” “고래!” “뛰면 안 돼.” “고래가 기다리는데.” “고래 어디 안 가.” 엄마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서윤의 속도가 절반으로 줄었다. 서하는 아빠의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라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안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대부분이어서 여기저기서 높은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렸다. 입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명이 차츰 어두워졌다. 대신 벽을 가득 채운 수조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작은 물고기 떼가 한꺼번에 방향을 틀었다. 물고기 떼의 은빛 비늘이 조명 빛을 받아 무수하게 반짝였다. “우와아.” 고래를 찾겠다며 서두르던 서윤은 첫 번째 수조 앞에서부터 그대로 멈춰 섰다. “언니, 봐!” “보고 있어.” “물고기 엄청 많아.” “그러네.” 방금까지 고래가 기다린다고 서두르던 아이는 어디 갔는지, 서윤은 물고기 떼가 움직일 때마다 몸까지 함께 움직였다. 그러다가 수조 벽에 손바닥을 붙이고는 고개를 최대한 가까이 가져갔다. “서윤아, 얼굴 붙이면 안 돼.” 아빠가 아무 말 없이 서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여기서 봐.” “아빠, 쟤가 나 봐.” “그래?” “응. 나 따라와.” 작은 열대어 한 마리가 우연히 유리 가까이를 맴돌고 있었다. “서윤이가 마음에 드나 보네.” “응.” 아빠의 말에 서윤이는 충분히 만족했는지 헤-웃었다. 서하는 그 옆에서 가만히 수조를 올려다봤다. “서하야.” 윤혜진이 불렀다. “응?” “너도 저기 서 봐.” 돌아보니 엄마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서윤은 이미 아빠 품에 안긴 채 양손으로 브이를 만들고 있었다. “저도요?” “가족끼리 왔는데 사진 찍어야지.”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 아빠 옆에 섰다. 서윤이 기다렸다는 듯 서하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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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웃어.” “웃고 있어.” “안 웃는데?” “…….” 카메라 너머에서 엄마가 웃었다. 결국 서하도 조금 웃었다. 찰칵- 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아니, 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좋았다. 어른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해서 수족관까지 시시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 * * 한참을 돌아다닌 뒤에야 서윤은 본래 목적을 기억했다. 커다란 상어 수조 앞이었다. 상어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가자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서윤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빠.” “응.” “고래는?” 아빠가 잠시 말을 잃었다. 서하도 같이 입을 다물었다. 수족관은 고래를 담기에는 애초에 너무 작았으니까. 오늘은 돌고래도 없었고. 결국 엄마가 웃으며 서윤이를 달랬다. “여기에는 큰 고래는 없대.” 서윤이의 표정이 굳었다. “없어?” “응.” “왜?” “고래는 너무 크잖아.” 서윤은 눈앞의 거대한 수조를 한번 바라봤다. 세 살 어린아이의 몸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수조. 천장 가까이까지 이어진 커다란 유리 너머로 상어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것을 올려다보던 서윤이 다시 엄마를 바라봤다. “…여기도 큰데.” 윤혜진이 쪼그려 앉아 서윤과 눈높이를 맞췄다. “진짜 큰 고래는 여기보다 훨씬 큰 바다에서 살아야 해.” “얼마나?” “엄청. 엄청엄청 큰 곳에서.” “상어보다?” “훨~씬.” 서윤은 입술을 오므린 채 잠시 고민했다. 당장이라도 울상을 지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납득하는 눈치였다. 마침 옆 벽에는 해양생물의 실제 크기를 비교해놓은 그림이 붙어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조그맣게 서 있고, 그 옆으로 돌고래와 상어가 차례로 이어졌다. 그리고 맨 끝에는 그것들을 우습게 만들어버릴 만큼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길게 그려져 있었다. 서윤이 그림 앞에 서서 입을 벌렸다. “엄청 크다.” “그러네.” “언니보다 커.” 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동생을 내려다봤다. “그건 당연하지.” “아빠보다도 커.” “그것도 당연하고.” “엄마보다도?” “그래, 엄마보다도 커.” 서윤은 다시 고래 그림을 올려다봤다.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보고 싶다.” 떼를 쓰는 말투가 아니라 정말 궁금한 모양. 아빠가 서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바다에서 보자.” 서윤이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진짜?” “운이 좋으면 볼 수 있을 거야.” “내일?” “그건 안 돼.” 입술이 다시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도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십 분쯤 뒤에 서윤이는 펭귄 수조 앞에 쪼그려 앉아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엄마! 쟤 넘어졌어!” 빙판 위를 걷던 펭귄 한 마리가 미끄러지자 서윤은 배를 잡고 웃었다. 넘어진 펭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어나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에 웃음은 더 커졌다. 조금 떨어져 있던 서하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펭귄 전시장 앞에서 서윤이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윤혜진과 장영민은 자연스럽게 그쪽에 남았다. 서하는 그동안 바로 옆에 늘어선 작은 수조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름과 서식 지역, 수명, 먹이와 같은 잡다한 자료들이 설명판에 자세히 적혀있었다. 같은 종이라도 개체마다 이름이나 식별번호가 있고, 먹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몸무게가 어떻게 변했는지, 건강 상태는 어떤지 따로 기록한다고 했다. 치료를 받으면 치료 기록도 남기고, 먹이를 잘 먹지 않거나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면 그것 역시 개체별로 적어둔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종이라고 해서 한꺼번에 관리할 수는 없으니까. 한 마리가 아픈데 다른 녀석이 건강하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다른 데로 튀었다. ‘그러고 보니.’ 서하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내 이름으로 관리되는 건 뭐가 있지?’ 재산. 서하는 자신에게 언젠가 재산이 생길 거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해원그룹 회장 손녀였으니까. 뭐, 설사 해원그룹이 무너진다 해도 아버지가 가진 재산만 해도 상당해 보였고. 다만 아직까지는 재산이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서하는 지금 고작 만5살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본격적인 증여나 상속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세벳돈이나 용돈 모은 통장은 있을지도?’ 재벌가이니 그것만 해도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한 번 물어볼까?’ 조금 떨어진 곳에 아빠가 서 있었다. 엄마와 서윤은 여전히 펭귄 앞에 붙어 있었고, 아빠만 어느새 이쪽 가까이에 와 있었다. 서하가 설명판을 읽느라 뒤처진 걸 보고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마침 잘됐다. 이런 건 아빠에게 묻는 게 가장 정확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