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서하의 리딩방(2)
8. 서하의 리딩방(2)
2006년의 피치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드문 회사였다. 피치팟의 성공으로 한창 주목받고 있었고, 컴퓨터 회사라는 오래된 이미지에서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그다음은?” “구골하고 사나바, 이비디아요.” 이번에는 장영민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피치와 구골, 사바나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비디아가 여섯 살짜리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아무래도 낯설었으니까. “이비디아는 어떻게 알아?” “컴퓨터 잡지에서 봤어요. 그래픽카드에 들어가는 거 만드는 회사잖아요.” “그걸 왜 사고 싶은데?” “게임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컴퓨터로 보는 영상도 더 많아질 것 같으니까요.” 서하는 굳이 GPU 연산이나 인공지능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때도 아니니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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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컴퓨터 그래픽 성능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말은 2006년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장영민은 펜을 꺼냈다. “그럼 비중은?” 서하는 잠깐 생각하는 척했다. “피치 40퍼센트.” “많네.” “제일 마음에 들어서요.” 생각 같아서는 더 넣고 싶지만, 50%가 넘어가면 너무 한 종목에 올인하는 것 처럼 보일 것이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장영민에게 서하의 투자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쇼케이스. 금융부문을 맡고 있는 장영민에게 리스크 헷지를 신경 쓰지 않는 투자란 그게 잘 되어도 그저 운에 불과할 뿐이란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그다음은?” “구골 25퍼센트, 사바나 20퍼센트, 이비디아 15퍼센트요.” 장영민은 그대로 받아 적었다. “전부 미국 기술주야?” “네.” “왜 한 회사에 다 안 넣고?” 이번 질문에는 서하가 곧바로 대답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요.” “피치가 제일 좋다면서.” “제일 좋아 보이는 거지, 무조건 오른다는 건 아니잖아요.” 장영민의 펜이 멈칫 했다. 서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한 회사에 다 넣었는데 제가 틀리면 많이 잃잖아요. 그리고 회사마다 하는 일도 조금씩 다르고요.” 피치는 소비자 제품. 구골은 검색과 인터넷 서비스. 사바나는 전자상거래. 이비디아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 같은 기술주라는 범주 안에서도 성장동력이 조금씩 달랐다. 장영민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 왜 이 회사들이 다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 질문은 예상하고 있었다. 서하는 굳이 아이처럼 더듬거리려 하지 않았다. 이미 변동성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 적당히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으니까. “앞으로 사람들이 컴퓨터하고 인터넷을 훨씬 많이 쓸 것 같아서요.” “그건 왜?” “계속 편해지고 있으니까요.” 서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예전에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인터넷으로 뉴스도 보고, 물건도 사고,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하잖아요. 앞으로 컴퓨터가 더 좋아지고 인터넷도 빨라지면 할 수 있는 건 더 많아질 거고요.” 장영민은 말없이 들었다. “그러면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도 커질 거고, 인터넷에서 원하는 걸 찾게 해주는 회사도 필요하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파는 회사도 커질 거고, 컴퓨터 성능을 높이는 기술도 계속 필요할 것 같아요.” 서하는 자신이 말한 네 회사를 순서대로 짚었다. “피치, 구골, 사바나, 이비디아요.” 설명 자체는 특별한 예언은 아니다. 2006년에도 PC와 인터넷 보급이 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고, 전자상거래나 검색광고, 디지털 콘텐츠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시장에서 관찰되는 흐름이었다. 그 흐름을 미래에서 보고 온 서하로서는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원래 기차에 탄 승객들은 자신들이 지나온 기찻길이 얼마나 구부러졌는지 모르기 마련. 길을 지나친 이후에야 뒤를 보고 아, 우리 기차가 저렇게 구부러진 길을 달렸었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다. 장영민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한국 회사는?” “이번에는 안 살래요.” “해원전자도?”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더 안 살래요.” “왜?” “우리 집에 이미 많잖아요.” 장영민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서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덧붙였다. “할아버지도, 아빠도 해원 주식이 있을 거고 아빠가 버는 돈도 해원이랑 관련돼 있잖아요. 그런데 제 돈까지 해원전자에 많이 넣으면 해원이 잘못됐을 때 다 같이 안 좋아지는 거 아니에요?” “…….” “그러니까 제 돈은 다른 데 있는 게 낫죠.” 이번에는 장영민이 정말로 침묵했다. 가족 전체의 소득과 재산이 이미 해원그룹이라는 하나의 위험요인에 크게 노출되어 있으니, 개인자산은 다른 곳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한 표현만 붙이지 않았을 뿐, 자산관리의 기본 원칙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걸 여섯 살이 생각했다고?’ 장영민은 한동안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 갔나?’ 변동성에서 끝냈어야 했나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에라, 모르겠다. 애초에 앞으로 직접 투자할 생각이라면 언제까지고 어린애인 척만 할 수도 없으니까. 장영민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좋아, 서하야. 네 말대로 3억을 투자하마.” 서하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그래. 아빠가 서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하 네가 아니라 아빠 부하 직원이 이렇게 보고했을 때 아빠가 뭐라고 할지…” 물론 제대로 된 금융 회사의 보고서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근간에 있는 논리만큼은 탄탄해서 영민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기에. 영민은 저도 모르게 서하의 투자를 허락했다. 고작 여섯 살 짜리 꼬마 아가씨의 말을 듣고서. “대신 네가 마음대로 사고파는 건 아니야.” 장영민은 조건을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계좌는 기존 신탁재산 안에서 별도로 관리하고, 실제 주문은 전문 운용 담당자를 통해서만 넣는다. 신용거래와 미수는 금지하고, 파생상품과 레버리지 상품 역시 손댈 수 없다. “파생상품과 레버리지는 뭔지 아니?” “음, 원리는 알아요.” 서하는 여기서는 잠깐 얼버무렸다. 다행이 아빠는 더 묻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사고 싶으면 이유부터 설명해.” “아빠한테요?” “응. 왜 사고 싶은지, 왜 그 비중인지. 팔고 싶을 때도 똑같아.” 서하는 잠깐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고 손실 났다고 돈 더 달라고 하면 끝.” “안 그래요.” “지금은 다 그렇게 말하지.” “전 정말 안 그런다니까요.” 장영민이 피식 웃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 * * 서하가 서재를 나간 뒤에도 장영민은 한동안 자리에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조금 전 딸이 고른 네 회사의 이름이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 피치. 구골. 사바나. 이비디아. 하나씩 떼어놓으면 전혀 뜬금없는 선택은 아니었다. 이미 시장에서 이름이 알려진 회사들이었고, 각자 성장성이 있다는 평가도 충분히 받을 만했다. 하지만 네 회사를 한꺼번에 묶어 컴퓨터와 인터넷의 사용 증가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설명하고, 거기에 가족자산과 겹치지 않도록 해원전자까지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는 건 꽤 인상적이었다. 이거야 말로 전형적인 리스크 헷지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인상적이라기보다 기절할 만큼 놀랐다. 여섯 살 꼬맹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장영민은 펜으로 메모 한쪽을 가볍게 두드렸다. “신문기사 한두 개 본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딸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이 아이가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건지. 그리고. 서하가 고른 네 회사가 실제로 어떻게 될지. 장영민은 메모를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옆에 크게 물음표를 그리고 피식 웃었다. “우리 딸 투자 실력이 어떨지… 벌써 궁금한데?” * * * “서하야! 전화받아~ 할머니야.” 평소처럼 유치원에서 하원하고 방에서 뒹굴거리던 서하에게 할머니의 전화가 왔다. “우리 손주, 내일 할머니랑 백화점 갈래?” 서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잠시 생각했다. “뭐 사러요?” “그건 가서 보면 알지.” “할머니 것도요?” “할머니 것도 보고, 서하 것도 보고.” 여기까지 들었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갈래요.” 다음 날 오전, 서하는 할머니의 차를 타고 해원백화점으로 향했다.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기사가 운전하는 벤츠S클래스. 서하가 차를 타려고 하자 기사님이 직접 문을 열어주며 인사도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안녕하세요.” 서하도 익숙하게 인사를 받아주며 차에 올라탔다. 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차 문을 열어주는 것부터 조금 어색했을지 모르지만, 다섯 해 넘게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할아버지 댁처럼 집에 상주하는 기사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출근할 때, 어머니도 필요하면 종종 기사를 부르기도 했으니까. “우리 서하 왔어?” “네.” 서하가 옆자리에 앉자 한명숙은 기다렸다는 듯 손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오늘 예쁜 거 많이 사자.” “좋아요.” ‘공짜 쇼핑 개꿀.’ 든든한 물주를 옆에 둔 서하도 간만에 신이 났다. 할머니는 서하의 응석도 꽤 잘 받아주었으니까. 엄마는 어릴 때부터 조숙한 서하에게 나쁜 물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려는지, 가끔은 꽤 엄한 구석이 있었다. “오늘은 해원백화점으로 가요?” “그럼, 평소에는 그러지 않니?” 할머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음, 평소에는 그냥 집에서 가까운 데 가서요.” 엄마는 해원백화점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해원그룹 며느리가 백화점에 방문하면 백화점은 비상이 걸리기 마련. 서하를 데리고는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 해원백화점에 갔던 기억은 있었다. 세상 물정을 알 나이가 되자 가지 않았지만. ‘으음, 지금 생각해보니까 할머니랑 같이 가면 더 부담스러울지도.’ 아빠랑 같이 해원백화점에 간 기억도 없다. 주말에 집에서 가까운 다른 그룹의 백화점에는 같이 간 적이 있어도. 아, 아빠는 심지어 해원백화점 부분에 꽤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백화점인가 리테일 부분 어디의 이사였던가?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그룹 차남이라는 점 때문에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일 테지만 적어도 직속 상사는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