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해원 백화점 VVIP
9. 해원 백화점 VVIP
해원백화점에 도착했을 때, 서하는 옛날에 엄마와 함께 왔을 때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는 걸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알아차렸다. 차가 정문 앞에 서지 않고 건물 옆쪽의 전용 출입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과도 연결되지 않은 별도의 승하차 공간이었고, 차가 멈추자 안쪽에서 기다리던 직원 두 명이 바로 문 앞으로 다가왔다. 한 사람은 백화점 고객담당 임원, 다른 한 사람은 한명숙을 오래 전담해온 직원이었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응.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방금 내려왔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인 것 같았다. 서하가 보기에는 그랬다. 두 사람 모두 이제 막 달려나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옷매무새부터 흐트러진 곳이 없었으니까. 하긴 군대로 치면 사단장도 아니고 참모총장이 강림한 셈. ‘으으음… 엄마랑 왔을 때보다 더하긴 하네.’ “서하 아가씨도 오랜만입니다.” 서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직원이 웃으며 응대했다. “많이 크셨네요.” ‘지난번에 본 게 언제였더라.’ 서하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 년 전 쯤이었던가? 한명숙은 서하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 일반 매장과 바로 연결되는 통로가 아니라, 프라이빗한 통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직원이 층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서하가 숫자판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가요?” “옷 부터 보러 가자.” “매장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얘는, 매장에서 옷을 직접 보려면 하루 종일 걸리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곳은 백화점 상층에 마련된 VVIP 살롱. 넓은 거실처럼 꾸며진 공간에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전신거울과 넓은 피팅룸이 붙어 있었다. 꽃병에는 생화가 꽂혀 있었으며, 창 너머로는 백화점 앞 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한명숙이 들어서자 안에서 대기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몸을 바로 세웠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다들 일 봐요.” 한명숙이 말하자 직원들 중 필요한 인원만 남고 나머지가 곧바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서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소파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행거들을 바라봤다. 아동복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이거 다 제 거예요?” “네가 볼 것들.” 한명숙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래에서 가져온 거예요?” 옆에 있던 직원이 대신 답했다. “아가씨께 맞을 만한 제품으로 몇 군데에서 미리 받아두었습니다.” 몇 군데라는 말치고는 양이 상당했다. 원피스와 코트, 가디건만 해도 수십 벌이었고, 다른 쪽에는 구두와 작은 가방, 머리핀과 액세서리까지 종류별로 나뉘어 있었다. 서하는 행거에 달린 작은 태그들을 슬쩍 봤다. 매장명과 품번, 사이즈뿐 아니라 ‘보류’라고 적힌 카드가 붙은 옷도 있었다. “이건 왜 보류예요?” “아직 매장에 내놓기 전이라 그래.” 한명숙이 말했다. 서하가 다시 옷을 봤다. “아직 안 파는 건데 여기 있어요?” “다음에 정식으로 들어오는 옷이야.” 직원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모님께서 손녀분과 방문하신다고 해서 브랜드 쪽에 먼저 요청했습니다.” ‘와… 이게 진짜 재벌?’ 서하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소시민적 기질이 아직까지 남아있는데에는 엄마의 탓도 조금 있었다. 서하가 어릴 때부터 또래에 비해 워낙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니, 자연스레 나쁜 물이 들지 않도록 서하를 최대한 단속했던 것. 서하의 엄마 윤혜진 여사도 서하를 낳기 전에는 해원백화점을 주로 애용했지만, 서하가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되고 백화점 나들이를 할 나이가 되자 어릴 때 버릇을 잘 들이도록 이용을 자제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사방에서 지나치게 받들면서 자란 어린이는, 심지어 그 어린이가 또래에 비해 똑똑하고 성숙하다면 좋은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서하는 그런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진짜 재벌가’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다. ‘이게 진짜 VIP구나.’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다른 직원이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한명숙 앞에는 늘 마시는 차가 놓였고, 서하 앞에는 주스와 작은 과자가 놓였다. '제로가 빨리 나와야될텐데. 액상과당은 몸에 안 좋으니까.'치킨과 피자를 먹으면서도 꼬박꼬박 제로콜라를 챙겨먹었던 서하에게 아쉬운점이 있다면 아직 제로 음료가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것.안 그래도 어린 아이여서 그런지, 여자 아이의 몸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달달하고 달콤한 것들이 땡기는 서하였다.'건강을 생각하면 미리미리 관리해줘야지. 음, 근데 이 집 주스 잘하네. 생과일인가?'서하가 주스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잠시 후 아동복 담당자가 옷 세 벌을 앞으로 가져왔다. “이번 시즌에 가장 반응이 좋은 제품들입니다. 특히 이 제품은 해외에서도 물량이 적어서—” “그건 됐어요.” 한명숙은 첫 번째 원피스를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말했다. 직원의 말이 멈췄다. “네, 사모님.” “서하한테는 너무 과하네.” 원피스에는 자수와 비즈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고, 서하가 보기에도 화려했다. 한명숙은 두 번째 옷도 한번 살펴보고 그냥 넘겼다. 세 번째 옷에서 한명숙의 손이 멈췄다. 장식이 거의 없는 짙은 남색 원피스였다. “이건 입혀봐요.” “네.” 서하는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사이즈는 거의 정확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한명숙은 가격표도 보지 않고 먼저 어깨와 허리선을 살폈다. “한 번 걸어볼래? 팔도 편한 지 보고.” 서하는 두 팔을 위로 들었다. 한명숙이 옷이 당기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는 괜찮니?” “네.” 서하가 봐도 모난 부분 없이 이쁜 옷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인이 좀 그렇긴 한데.’ 하지만 벌써 다섯 해를 살면서 서하의 귀염뽀짝한 외모에 어울리는 옷들을 입어왔던 터라 불편함은 없었다. “이건 하고.” 옆에 있던 직원이 즉시 체크했다. “같은 디자인으로 크림색도 있습니다.” “그건 필요 없어요.” “네.” “할머니.” 서하가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물었다. “두 색 다 있으면 좋지 않아요?” “같은 옷을 색깔별로 다 살 필요가 있니? 크림색 옷을 볼까?” “아뇨. 그래도 살 수 있잖아요.” 한명숙이 서하를 보고 웃었다. “살 수 있는 것하고 사고 싶은 건 다른 거니까.”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색깔만 다른 외출복을 굳이 살 필요는 없겠지. 한명숙은 직원이 새로 가져온 옷들을 천천히 훑었다. 이번에는 연한 베이지색 가디건과 짙은 적색 재킷, 아이보리색 코트였다. 모두 이번 시즌 신상품이라는 설명이 붙었고, 그중 하나는 아직 국내 매장에 정식으로 풀리지 않은 제품이었다. 한명숙은 첫 번째 가디건을 손에 들었다가 원단을 한번 쓸어보고는 곧바로 내려놓았다. “이건 됐네.” “혹시 색상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색은 괜찮은데 서하한테 입히면 얼굴이 죽겠네. 저 아이는 노란 기 도는 베이지보다 푸른 기 있는 색이 나아.” 직원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같은 라인의 블루 그레이로 준비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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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래에 있어요?” “현재 매장에는 없고, 한국 지사 쇼룸에 한 벌 있습니다.” “가져와 봐요. 오늘 꼭 안 봐도 되니까 서하 사이즈에 맞는지 먼저 확인하고.” “네, 사모님.” 매장에 없으면 안 사는 게 아니라, 매장에 없으니 지사에서 가져오는 것. 한명숙의 말 한마디에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움직였다. ‘이게 재벌가의 맛…!’ 여섯 살 인생 처음 맛보는 도파민 파티에 서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자신도 막연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에 일어나니 더 재미있달까? 한명숙은 다음 재킷을 들어 올렸다. 짙은 적색 바탕에 금색 단추. 어깨와 소매 끝에는 같은 색 실로 장식이 들어가 있었다.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옷이었고, 담당 직원도 자신 있게 설명을 붙였다. “이번 시즌 대표 제품입니다. 유럽 쪽에서도 주문이 많이 몰린 디자인이라 국내에는 아동 사이즈가 많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디자인했죠?” 직원이 바로 디자이너 이름을 말했다. 한명숙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옷을 펼쳐 서하 쪽에 한번 대봤다. “옷 자체는 잘 나왔네.” “네. 이번 시즌 컬렉션에서도 특히 평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서하한테는 안 되겠네요.” “색상 때문이실까요?” “아니. 옷이 너무 세.” 한명숙은 서하의 얼굴과 재킷을 번갈아 보았다. “사진 찍을 때야 예쁘겠지만, 지금 저 나이에 입히면 애보다 옷부터 보이네. 그리고 우리 집 행사에 입고 나가기도 애매하고.” 서하는 그 말을 듣고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상상해봤다. 확실히 할머니의 안목은 높았다. 자신이 봐도 옷은 살고 인물은 죽는 그림이랄까. “할머니는 좋은 옷이어도 안 사요?” 문득 든 서하의 궁금증. 한명숙은 오랜만에 귀여운 질문을 듣는다는 듯 소리내 웃었다. “좋은 옷이면 다 사야 하니?” “돈이 있잖아요.” “돈하고 무슨 상관이니.” 한명숙은 너무 당연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말하고는 재킷을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저런 건 갖고 싶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어. 그러니까 더 잘 골라야지.” “아.” “우리 손녀, 그래서 물건을 보는 안목이 중요한 거란다. 해원그룹의 손주가 원하는 물건을 이 할미가 구해주지 못할 것 같니? 그러니 아무 거나 선택하지 말고, 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물건만 사다가 하루가 다 갈 테니까. 좋은 물건은 세상에 너무 많은 법이란다.” 할머니가 귀엽다는 듯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때 살롱 문이 열리더니 다른 직원이 작은 가죽 케이스 몇 개를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요청하신 제품도 준비했습니다.” “벌써 왔어요?” “마침 매장에 일부 들어와 있었습니다.” 케이스가 열리자 어린이용 머리핀과 브로치, 작은 목걸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아동용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한명숙은 그중 진주가 박힌 작은 머리핀 하나를 집어 들고 서하의 머리에 직접 대봤다. “이건 하자.” “네.” “같은 디자인은?” “자개와 다이아 장식으로 두 종류 더 있습니다.” “다이아는 됐고, 자개도 보여줘요.” 서하가 물었다. “왜 다이아는 안 봐요?” “네가 여섯 살인데 머리에 다이아를 주렁주렁 달고 어디 가게?” “아핫…” “보석은 크다고 좋은 게 아니야. 특히 어릴 때는 더 그래. 애한테 어른이 할 걸 그대로 줄여 붙여 놓으면 촌스러워.” “비싼데도요?” “비싸고 촌스러운 물건도 세상에 많지.” 할머니가 서하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고 덧붙였다. “우리 서하가 나이는 어려도 여자는 여자구나. 벌써 보석에 눈을 반짝이고. 그래, 우리 서하는 워낙 인물이 좋아서 다이아도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헤헷.” 서하는 멋적게 웃었다. 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예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