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법사
9. 마법사
50층.그 숫자가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현재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 50층을 돌파한 랭커는 단 9명.그중에서 직업이 '마법사'인 인간으로 한정하면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고작 3명 밖에 없었지?'한 손으로 다 꼽고도 남는 숫자다.탑의 마법사들은 보통 10층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가지 주력 속성을 특화해 파고들었다.그리고 커뮤니티에서는 각 속성별로 가장 층수가 높은 일인자들을 묶어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예를 들어, 전기 속성의 원탑 랭커라면 '전법 강호형' 이런 식이었다.50층의 마경을 돌파한 3명의 괴물 마법사들은 다음과 같았다.빙결 특화 51층 마법사, 얼법 안양호.대지 특화 51층 마법사, 땅법 홍선현.마지막으로…….***화염 특화 마법사이자, 50층의 몇 안 되는 랭커 중 한 명.불법 정희란은 지금 고뇌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51층을 도대체 어떻게 뚫어야 할까……."그녀는 지금 51층이라는 벽 앞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51층부터는 탑의 테마가 '신비로운 숲'으로 바뀐다.그곳에는 온갖 괴랄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렸는데, 중에서도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는 놈이 하나 있었다.석화와 독, 그리고 미친 마법 저항력을 가진 몬스터. 바실리스크였다.역장 골렘, 푸른 와이번과 함께 이른바 법사의 3대 무덤이라 불리는 녀석.물론 50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마법 저항력을 가진 몬스터를 아예 안 만나본 것은 아니다.애초에 그녀가 51층에 도달했다는 것 자체가, 저 3대 무덤 중 두 녀석을 이미 어떤 식으로든 완파했다는 증거였으니까.하지만 바실리스크는 앞의 두 놈과는 궤를 달리했다.답답한 마음에 51층을 통과한 다른 마법사들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했지만, 전혀 참고가 되지 않았다.얼법 안양호.그 인간은 마법사라는 직업의 탈을 쓴 검사나 다름없었다. 빙결 마법은 어디까지나 적의 발을 묶는 보조 용도로만 쓰고, 본체가 직접 검을 들고 달려가 썰어버리는 방법으로 돌파했다.땅법 홍선현.그쪽은 아예 바실리스크 발밑에 거대한 싱크홀을 파서 그대로 생매장시킨 뒤 질식사시켜 버렸단다.오직 불꽃만을 쏘아대는 순수 화염법사 희란에게는 불가능한 공략법이었다."진짜 난 여기서 끝인 건가?"51층에 갇혀 제자리걸음만 한 지 벌써 석 달째다.이 답답한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뿐이었다.하나는 돈지랄.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마도구나 특수 아이템을 현질해서 억지로 뚫어내는 것.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능한 지인의 화력을 빌리는 것이었다.초기 등반자 짬바가 있는 만큼 꽤 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유의미한 도움은 받지 못했다.현질도 상황이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세계구급 랭커들조차 60층에서 단체로 막혀버리면서, 고등급 마도구와 아이템들의 유통 물량이 싹 말라버린 탓이다."에휴, 이렇게 한탄만 해봐야 뭐 뾰족한 수가 나오겠냐..."그녀는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젓고는 폰을 집어 들었다.최근 등반이 막히면서 강제 휴식기가 길어지자, 그녀는 새로운 취미 하나를 발굴해 냈다.커뮤니티 갤질.특히 같은 등반자들이 모여있는 등반갤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오늘의 사자성어(124)]작성자: 목인석심오늘의 사자성어는 맹귀우목(盲龜遇木)입니다...눈먼 거북이가 우연히 떠다니는 나무를 만난다는 말이지요~보통 힘든 상황에서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되는 뜻으로 사용된답니다...여러분도 아무리 고된 시련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희망의 끈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행운을 만날지도 모르잖아요ㅎㅎ-명명백백한 피규어의 왕을 뵙습니다...-이제 이분 피규어 안 파시나요? 사이트 사라졌던데 ㄴ(링크) 여기로 옮겼음ㅇㅇ ㄴㅇㅎ ㄴ회사 차린 거임? ㄴ그런듯-님꺼 피규어 너무 비싸요ㅠㅠ ㄴ? 그 퀄에 그 가격이면 ㅈㄴ 혜잔데ㅋㅋ ㄴ거지 ㄲㅈ-안녕하십니까 EDG방송국에서 나왔습니다. 혹시 대화 가능하신가요?"이 사람, 이제 그 정령 분양 글은 안 올리는 건가? 나름 참신해서 재밌었는데."등반갤은 글 리젠이 엄청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본업과 직결된 이야기들이 오가는 곳이라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쓸모없는 징징글이나 똥글이 태반이긴 해도, 가끔 현역 등반자들조차 이마를 탁 칠 만한 참신한 게 올라오기도 했으니까.그때, 폰 화면 상단에 톡 알림이 하나 떴다.[님]"응? 뭐야. 강호형씨네?"세간에는 전기를 다루는 전법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그녀는 무심코 문자를 클릭했다.[주딱: 님][불법법: 왜요][주딱: 저번에 정령 분양글 진짠지 알아봐 달라고 하지 않았음?]"아."강호형. 그는 49층에 도달한 고층 랭커지만, 동시에 무려 49개의 갤러리의 주딱을 역임하고 있는 미친놈이다.정신이 나가 있는 놈들이 수두룩한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저건 진짜 뭐 하는 새끼냐?'라는 평을 들으며 명성이 자자한 인물.커뮤니티 관리만 안 했어도 진작에 50층은 뚫었을 거라는 게 정설이었고, 사실 본인이 주딱 달고 있는 갤러리 숫자에 층수를 맞추려고 일부러 49층에서 머물고 있다는 괴소문까지 돌 정도였다.그런 강호형이 등반갤의 완장 자리를 탐내지 않을 리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 현재 그는 등반갤의 주딱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예전에 희란이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그 목인석심의 정령 분양 글이 진짜인지 뒷조사 좀 해달라고 넌지시 부탁한 적이 있었다.마법사의 직감이랄까? 단순한 관종의 어그로치고는 마음에 걸렸었다.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불법법: 그랬죠.][주딱: 그거 진짜던데]"...?"[불법법: 므므ㅏ뭐요?]너무 놀란 나머지 손가락이 꼬여 오타가 났다.[주딱: 직접 확인해봤는데 찐이더라고][주딱: (불 정령 샐러가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헐."[불법법: 이거 AI 아니에요?][주딱: ...내가 누군지 모름?]"미친, 이게 AI가 아니라고?"희란은 강호형이 보낸 사진을 다급히 눌러 확대했다.화면 가득, 불꽃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생명체가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귀엽네."그녀가 기존의 문헌이나 지식으로 알고 있던 정령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하지만 그 강호형이 확실하게 팩트 체크를 끝냈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주딱: 그래서 어캐할 거임][불법법: 혹시 연락되나요?][주딱: 당연하지]"정령... 정령이라..."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제대로 된 야생 정령은 적어도 55층은 넘어가야 보이니.하지만 정령이라는 신비한 존재가 지닌 특수성에 대한 정보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희란의 눈동자에 희망이 돌기 시작했다."만약 정령이 있다면……. 51층 등반 가능하지 않을까?"***나는 모니터 화면에 온갖 동물 사진들을 띄워놓고 턱을 괴었다."음, 바람 속성이면 역시 새가 무난하려나?"내 옆에는 페트가 장난감 안경 낀 채 모니터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렌즈알도 없이 뻥 뚫린 투명 플라스틱 쪼가리였지만, 녀석은 나름대로 진지했다.-도리도리.페트가 짧은 목을 좌우로 저었다."새는 별로야? 그럼 그냥 저번처럼 무난하게 사람 형태로 갈까?"-끄덕끄덕."모델도 샐러 때처럼 나로 하고?"-끄덕끄덕.연속되는 칼 같은 긍정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가늘게 떴다."……너 솔직히 지금 생각하기 귀찮지?"-끄덕끄……. 도리도리!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방 안을 채우는 어색한 침묵.-딱!나는 가차 없이 녀석의 이마팍에 딱밤을 찰지게 먹여주고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이 찔끔 맺힌 녀석을 무시한 채, 나는 머릿속으로 견적을 짜기 시작했다.이번 고층 랭커를 위해 새로 빚어낼 정령의 속성은 바람으로 정했다.이유는 간단하다. 그 50층 마법사의 주력 속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만약 대지나 얼음을 다루는 땅법, 얼법이라면 필연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는 기동성을 바람의 유틸성이 보완해 줄 것이다.반대로 화염을 다루는 불법이라면? 바람과 불꽃의 시너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최고의 조합이다.'주딱한테 그 마법사 속성이 뭐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그건 예의가 아니었다.그런 의미에서 어느 속성에든 찰떡같이 달라붙는 바람 속성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안전한 선택지."아, 몰라... 그냥 내일 해야지~"사실은 굳이 물어보는 것이 그냥 귀찮은 게 가장 컸다.어차피 시간은 널널했다. 백수의 가장 큰 무기는 남아도는 시간 아니겠는가.마우스를 휙 던져버린 나는 곧바로 페트와 듀오 모드로 협동 게임을 켰다. 총싸움 게임에 접속해 녀석과 나란히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렸다.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게임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띠리리링! 띠리리링!탁자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에서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렸다."뭐야? 무슨 알람이지?"화면을 확인했지만, 무슨 알람인지 적혀있지 않았다.내가 꼼꼼하지 않은 탓이었다.그러자, 헤드셋을 훌렁 벗어던진 페트가 책상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크큭! 되겠냐? 네 다리 길이로?"나는 녀석의 뒷덜미를 쥐어 책상 위로 툭 올려주었다.착지하자마자 페트가 짤막한 손가락으로 달력의 한 날짜를 콕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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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어?"오늘이 딱 불 정령 빌려준 지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