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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폐급 세계수

정령 분양합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1. 폐급 세계수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눈을 떴다."으으..."힘겹게, 아주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힘들어... 머리 아파..."뻑뻑한 눈을 깜빡거리자, 거울에 드문드문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허리까지 닿는 긴 녹색 머리칼.어딘가 텅 비어 보이는 하늘색 눈동자.뽀얀 피부와 긴 속눈썹....그리고 무엇보다 자그마한 키. 5efe62578cf2b04222434d5569714efa.jpg "에휴..."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지만, 자고 일어나보니 이런 모습이 되어 있었다.탑을 오르는 초인, '등반자'로 각성한 것이다.압도적인 무력과 끊임없이 쏟아지는 재화, 심지어 나라의 수명까지 늘려주는 등반자는 이 시대의 막강한 권력자였다. "근데... 나는 왜 이런 꼴인 걸까?"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이제는 하도 봐서 너덜너덜해진 기분마저 드는 상태창을 허공에 띄웠다.[이름: 임한율(林瀚栗)][성별: 여성(女)][성향: 순선(順善)][종족: 세계수(世界樹)][특성: 낙지생근(落地生根), 반근착절(盤根錯節), 우공이산(愚公移山)]상태창은 주인의 성향을 따른다고 했던가. 한자를 좋아하고 옛것을 사랑하던 내 취향이 반영되어, 상태창이 온통 한자투성이인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진짜는 저 종족 칸.[종족: 세계수(世界樹)]평범한 등반자라면 당연히 '직업'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뜬금없이 종족명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세계수.딱 봐도 뭔가 범상치 않은 이름이었지만, 진짜 범상치 않기만 했다.그냥 평범한 검사나, 모험가, 궁수 같은 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도슝좍이라고 불리는 도적이라도 하고 싶었다.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침대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푹!"세계수... 진짜 개쓰레기야..."아직 각성도 못한 일반인들이 듣는다면 배부른 기만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그도 그럴 게, 세계수는 '나무'다.일단 이름부터가 세계 수(樹) 아닌가. 나무는 필연적으로 양분을 필요로 한다.하지만 내 몸은 나무가 아니라 연약한 여자아이의 형태였다."씨이... 왜 나문데 광합성을 못 하냐고오..."찰랑거리는 초록색 머리카락은 그저 장식이었다. 나에겐 엽록체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그렇다면 대체 양분은 어떻게 얻는단 말인가?"아, 양분 얼마나 남았지..."고개를 돌려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싱크대 한쪽에는 말라비틀어진 생선 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그렇다. 뭔 개잡종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변한 이 세계수는 식충식물.아니, 식육식물이었다.살아있는 생물을 가지고 쫍쫍해서 그 안에 있는 걸 양분으로 바꿔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문제는 그 효율이 개미 똥구멍만도 못하다는 데 있었다."흑흑... 식비 때문에 파산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요즘 물가가 얼마나 살인적인가. 해양 몬스터들의 창궐로 수산물 가격은 금값이 되었고, 살아있는 소나 돼지를 구하는 건 돈 때문에 꿈도 못 꿨다.월 식비만 500만 원. 그것도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그때, 내 시야 밑으로 누군가가 뽈뽈뽈 걸어왔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고, 자그마한 체구를 뽐내는 녀석. 머리에 야무지게 눌러쓴 파란색 페트병 뚜껑이 들썩거렸다.내가 아직까지 살자하지 않은 이유이자, 개노답 세계수 인생의 한 줄기 빛, 소금, 그리고 희망! 33f1524b0d74f5bf97042e6379895da3.jpg "페트 일루와잇!"나는 페트를 덥석 껴안았다. 가랑이 사이에 녀석을 끼워두고 마구마구 부비부비했다.페트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버둥버둥거렸지만, 그래봤자 녀석의 크기는 고작 소형견만 했다.압도적인 체급 차이 앞에 페트는 얌전히 와구와구 당할 수밖에 없었다.-부르르르르르르르~!내가 기어코 배방구를 시전하자, 빡친 페트는 머리에 쓰고 있던 뚜껑을 벗어서 나의 정수리를 내리쳤다.-딱!"아얏!"페트는 단단히 화가 난 듯 플라스틱 발을 동동 구르더니, 보란 듯이 내 코앞에 스마트폰 액정을 들이밀었다."응? 폰은 왜?"제대로 좀 보라는 듯, 페트가 액정을 내 얼굴에 바짝 붙였다. 그제야 화면에 띄워진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제목: 고양이 분양합니다~]작성자: 고양이는사랑이번에 우리 냥이가 여섯 마리나 낳았지 뭐예요? (사진)다 키울 형편은 안 돼서 좋은 분께 분양합니다~ 생각 있으신 분은 연락 주세요! (링크)"페트야..."나는 한없이 우울해진 표정으로 페트를 들어 올렸다."당장 내가 먹을 것도 부족한데, 고양이를 어떻게 키워?"비참한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고양이 한 마리 거둘 능력조차 없는 빈곤한 처지라니.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탄하고 있는데, 페트가 다시 한번 내 이마를 때찌 했다."응?"내가 물음표를 띄우자, 페트가 짧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더니, 곧이어 화면 속 고양이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뭐? 너를 분양하라고?"그건 절대 안 될 소리였다. 이 지옥 같은 방구석에서 내 곁에 남은 건 페트 하나뿐인데.하지만 동시에 씁쓸한 생각이 스쳤다.그래, 나처럼 무능력하고 밥만 축내는 식충이 주인보다는, 돈 많고 근육 빵빵한 알파남 등반자 밑으로 들어가는 게 이 녀석의 앞날을 위해서도...-찹! 찹! 찹! 찹!상념에 빠지려던 찰나, 기겁한 페트가 내 양뺨을 쉴 새 없이 후려갈겼다."아악! 그만! 그만해!"페트는 옹졸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꽉 부여잡고는, 두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아... 맞다. 너 나 없이는 못 살지."페트의 정체는 '정령'이었다.그것도 '플라스틱의 정령'이라는 꽤 MZ한 정령.인류에게 아직 정령은 미지의 존재였다. 탑의 50층은 넘어가야 '정령이 깃든 뭐시기~'나 '타락한 정령 저시기~'가 겨우 발견된다고 한다.그런 만큼 나는 페트를 찾은 게 아니라, 직접 만들었다. 그 부작용인지 몰라도 페트는 생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내게서 양분을 공급받아야 했다.만약 페트가 사라진다면 내 식비는 2할 정도 줄어들 테지만,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페트가 없다면 당장 내일의 나부터 살아남을 수 없을테니까."그럼 대체 뭘 어쩌라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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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는 주인의 멍청함에 답답하다는 듯 침대 매트리스를 -퍽퍽 내리쳤다. 꽤 앙증맞았다.이내 녀석은 폰을 조작해 [탑 등반자 갤러리]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서 1인극을 시작했다.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오른쪽 허공에 건네는 시늉을 하더니, 이번엔 우다다 달려가 오른쪽 역할을 맡아 그것을 덥석 받았다. 받은 물건을 만족스럽게 살피며 고개를 끄덕인 페트는, 다시 왼쪽을 향해 무언가를 스윽 내밀었다. 그러곤 다시 왼쪽으로 달려와 그걸 받고는 "와아~!" 하며 신나서 방방 뛰었다.나는 그 무언극을 끝까지 감상하고 나서야, 녀석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아! 정령을 만들어서 분양하자는 거야?"페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제 너 말고는 더 정령을 못 만드는걸?"나라고 그 창조경제를 생각 안 해본 게 아니었다.페트를 무한 복사할 수만 있다면, 한두 마리쯤은 연구소에 넘겨서 거액의 후원금을 타 먹을 작정까지 했었다. 다만 페트를 탄생시킨 이후로는 그 어떤 사물에도 정령이 깃들지 않았다.하루먹고 살 양분도 부족한 탓이었다.내 시무룩한 대답에, 페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은은한 초록빛을 머금은 둥근 구체.양분을 뭉친 덩어리였다."뭐야!? 이거 어디서 났어!?"페트는 엎드린 채 내 발밑을 기어 다니며, 입 모양만으로 야옹, 멍멍을 표현했다.소리는 나지 않았다."아~ 길고양이나 동네 똥개들한테서 조금씩 슬쩍해 왔다고?"페트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페트가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었어?'나무라는 종족 특성 탓인지, 나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극도로 체력이 소모한다. 반면 정령인 페트는 자유롭게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다.근데 녀석이 밖에서 양분까지 추출해 올 수 있다면... 굳이 번거롭게 정령을 더 만들어서 분양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페트가 매일 산책 나가서 길고양이들 기운이나 좀 빼오면...-찹!페트가 내 뺨을 야무지게 후려치더니, 침대 위를 상하좌우로 맹렬하게 뒹굴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온몸으로 '더 이상은 못해! 이 망할 주인놈아!라고 항의하는 듯했다."하긴..."내가 페트 없이는 못 산다고 했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페트는 우리 집안(구성원=나와 페트)의 실질적 가장이었다.플라스틱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을 활용해, 녀석은 피규어나 프라모델 부품을 주문 제작하여 돈을 벌어오고 있었다. 한 달 수입만 대략 450만 원. 내 한 달 치 식비가 딱 500만 원이었으니, 페트가 없었다면 내 통장은 진작에 '텅장'이 되고, 나는 말라 죽었을 것이다.우리 페트는 존나 유능했다."흐음..."나는 녀석이 가져온 초록색 구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략 일주일은 버틸 수 있는 제법 낭낭한 양이었다. 모른척 지금 바로 흡수해 버리면 다음에 또 구해오지 않을까...-찹!음흉한 내 속내를 읽은 페트가 다시 한번 뺨을 때렸다."아얏! 농담이야, 농담!"나는 뺨을 문지르며 구체로 손을 뻗어 양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그래, 나도 이런 찌질한 방구석 생활은 이제 질렸다.나 또한 탑에 들어가고 싶다. 몬스터도 썰어보고 싶고, 시원하게 돈도 펑펑 써보고 싶었다. 개폐급 반푼이 등반자 신세에서 탈출하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각성 초기보다 실력이 늘긴 늘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약해진 게 흠이긴 하지만, 적어도 양분을 조작하고 다루는 섬세함만큼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과거의 내가 우연에 기대어 페트를 찍어냈다면, 지금이라면 의도적으로 정령을 빚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터.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어느새 페트도 옆으로 다가와 빈 페트병을 응원 도구처럼 흔들고 있었다.나는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값싼 라이터를 집어 들고 찰칵, 불을 켰다.그리고 한껏 기합을 넣어 소리쳤다."나와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