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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의 정령(2)

정령 분양합니다 — novelpia.com · All chapters

3. 불의 정령(2)

50b5c646986296154692837e829c8d3f.jpg 서은하는 자신의 상태창에 박혀 있는 직업명을 보았다.[직업: 정령사(Elementalist)]이름만 들으면 꽤 괜찮아 보인다.자신은 뒤에서 구경만 하면서, 소환한 정령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가끔 시련을 극복하고 고위 정령을 부리는 직업.게임도 아니고 목숨이 오가는 현실이었으니, 직접 피 튀기며 싸울 필요가 없는 정령사는 로판 여주들이 애호하는 것이 이해될 만큼 편하고 매력적인 직종이었다.하지만 현실의 정령사는 그냥 병신 직업1였다.'정령이 없으면 스킬을 단 하나도 못 쓴다고? 장난해?'그렇다.정령사는 '정령'이 있어야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부 직업이다.당연한 소리다.정령 없는 정령사?그건 검 없는 검사, 지팡이 없는 마법사보다 더 쓸모없는 짐짝이다.서은하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허공에 대고 스킬을 발동해 보았다.[스킬: 정령 소환(Elemental Summoning)]-삐빅![소환할 수 있는 정령이 없습니다.]"아, 씨발 개병신 직업."문제는 그놈의 정령이라는 게 탑 50층은 넘어가야 코빼기라도 보인다.이제 막 각성해서 1층 언저리를 기어 다니는 쪼렙 뉴비에게 정령이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현재의 서은하는 조금 튼튼하기만 한,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하아... 내 팔자야. 남들은 불도 쏘고 검기라도 휘두르던데, 나는 왜..."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신세 한탄을 하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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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잉. 위잉.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화면을 확인한 은하의 미간이 좁아졌다.[발신자: 등반갤 운영자]탑 등반자 갤러리의 관리자. 일명 '주딱'이라 불리는 놈이었다.각성 초기, 정보 교환소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지금까지 묘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지인이기도 했다.[주딱: 님, 갤러리 봤음?]은하는 신경질적으로 타자를 쳤다.[신은왜나를낳고검사마법사궁수도적을낳았는가: 나 생리니까 말 시키지 마라.][주딱: (링크)][주딱: 일단 이거 한 번 들어가 봐ㅋㅋ]은하는 혀를 차며 주딱이 보낸 링크를 눌렀다.아무리 그래도 지인에게 바이러스 링크나 보낼 놈은 아니라는 믿음이 보이는 행동이었다.뭐, 그보다는 지금의 그녀 자신이, 뜯어낼 콩고물 하나 없는 빈털터리라는 게 더 큰 이유이긴 했다.화면에 뜬 것은 등반자 갤러리의 베스트 개념글 목록이었다.[캬아!!!! 드디어 내 아내가 도착했다!!!][이거 질감 실화임? 진짜 사람 같은데?][앞으로 내 장인어른을 욕하는 자를 내 적으로 간주한다][지금까지 나온 피규어, 인형들 다 범부면 개같이 개추ㅋㅋ]"......이게 뭐야? 갤러리 잘못 보낸 거 아냐?"하지만 다시 확인해 봐도 등반갤이었다.[신은왜나를낳고...: 여기 왜 이럼?][주딱: ㅋㅋ]관리자인 주딱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만도 했다.등반에 관련된 정보를 나누어야 할 갤러리가, 난데없는 피규어 주문 제작 떡밥에 완전히 잡아먹혀 버렸으니 말이다.가장 쉬운 해결책은 간단했다.공지사항으로 '앞으로 갤러리 성격에 맞지 않는 피규어 관련 글 작성 시 차단하겠습니다'라고 못을 박고, 어긴 유저를 밴 때려버리면 그만이다.하지만 주딱의 성향은 그런 독재적인 운영과는 거리가 멀었다.그는 최대한 유저들에게 개입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추구하는, 좋게 말하면 방임주의고 나쁘게 말하면 귀차니즘이었다.[신은왜나를낳고...: 그래서 어쩌라고?][주딱: 일단 이것도 봐봐][주딱: (링크)]새로 날아온 링크.별생각 없이 그것을 클릭했던 은하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올랐다.[정령 분양합니다]작성자: 목인석심"저, 정령...? 정령을 판다고!?"은하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하지만 이내 요동치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정령 관련된 파편이나 부산물만 해도 경매장에서 수백억을 호가하는데, 무려 정령 그 자체를 이런 허접한 커뮤니티에 분양 글로 올린다고?대가리 빈 사기꾼 지망생의 수작질일 것이 뻔했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기대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는지, 은하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타자를 쳤다.[신은왜나를낳고...: 구라 아님?ㅋㅋ][주딱: 내가 따로 연락해봤거든?]-꿀꺽.긴장감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주딱: 인증 사진이라고 보내주긴 했는데, 내가 진짜 정령을 본 적이 없으니까 이게 찐인지 짭인지 모르겠더라고?][신은왜나를낳고...: ?]"아오, 씨발. 괜히 기대했네."[주딱: 그러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나도 모르지.][주딱: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한 번 총대 메고 연락해 봐라.][신은왜나를낳고...: 뭐? 내가?][주딱: 어. 네가 정령사잖아. 찔러봐서 사기면 사기라고 네가 갤에 저격 글 하나 써. 그럼 내가 그거 명분으로 깔끔하게 밴 때려버리고 갤러리 수습하게.][주딱: 만약에... 진짜 찐 정령이면, 넌 그토록 원하던 정령 얻어서 떡상하는 거고. 겸사겸사 갤러리에 후기도 좀 올려주고 ㅎㅎ 그럼 자연스럽게 피규어 떡밥도 묻힐 거 아냐. 어때, 완벽하지?]은하는 어이가 없었다."미친놈인가, 진짜..."욕이 튀어나왔지만, 은하의 시선은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 몰랐다.'진짜면... 만약 저게 진짜 정령이라면?'그동안 파티 구인 게시판에서 무직 백수 취급을 받으며 조리돌림당했던 수모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은하는 바싹 마른입술을 축였다.***나는 멍하니 방구석 천장을 바라보았다.등반갤에 그 분양 글을 올린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쏟아지는 주문량을 견디지 못한 페트가 파업을 선언하기도 했고,그 짧은 팔다리로 짐을 싸서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으며,나는 나중에 양분에 여유가 생기면 플라스틱 부하들을 쫙 깔아주겠다며 눈물겨운 똥꼬쇼로 녀석을 어르고 달래야 하기도 했다.결국은 각성자 자격증을 이용해 '플라페트'라는 회사명으로 정식 사업자 등록까지 마쳤다.아무튼."에휴... 정령 장사(아직 시작도 안함)는 접어야 하나?"피규어 주문은 폭주했지만, 정작 내 메인 상품인 정령과 관련된 쓸모 있는 연락은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다.그나마 갤러리 관리자인 주딱이라는 작자가 자기가 아는 정령사 한 명을 찔러봐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여태 감감무소식이었다."그냥 페트 굴려서 번 돈으로 양분이나 사 먹을까..."사실 이대로만 가도 최소한의 의식주, 아니 한 달 식비 500만 원은 확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우리 집 실질적 가장인 페트의 가내수공업 능력이 그만큼 쩔어줬으니까. 이 페이스라면 월 몇억 단위로 벌어들이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나는 지금도 거실 구석에서 '플라스틱을 깎는 정령'이된 페트의 작은 뒷모습을 떠올리며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아무리 그래도 주 120시간 노동은 좀 심했나...?"-띠링![신은왜나를낳고검사마법사궁수도적을낳았는가: 안녕하세요? 그 등반갤 운영자 소개로 연락드렸는데요!]"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객님이 오셨다.[목인석심: 네, 안녕하세요 ㅎㅎ][신은왜나를낳고...: 갤에서 정령 분양한다고 글 쓰신 분 맞으신가요?][목인석심: 네, 맞습니다.][신은왜나를낳고...: (...)]대화가 뚝 끊겼다.화면 너머로 상대방이 엄청나게 고뇌하고 있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뭐랄까...'이 사기꾼 놈! 네 죄를 알려라!'라고 호통치고 싶은 마음과 '진짜 정령을 팔려는 분이면 어캐하지?'라는 간절함이 맹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듯했다.이윽고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린 상대가 채팅을 보내왔다.[신은왜나를낳고...: 혹시 직접 만나서 정령을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목인석심: 그건 좀 곤란합니다만 ㅎㅎ][신은왜나를낳고...: (...)]세계수 특성상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체력 소모가 극심한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서 거절한 것이다.다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다르게 보일 게 뻔했다.'아! 이 씹새끼는 사기꾼이 확실하구나!'온갖 창의적인 육두문자와 패드립, 고인 모독 드랍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그(...)의 살기가 화면을 뚫고 뿜어져 나왔다.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신고할 상황을 만들기 전에, 재빨리 타자를 쳤다.[목인석심: 아, 그럼 일단 정령을 먼저 받아보시고 나서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신은왜나를낳고...: (...)][신은왜나를낳고...: ]상대방이 적고 있던 채팅이 싹 지워졌다.백스페이스를 누르며 지우는 데만 한 10초는 걸린 것 같은데, 대체 저 안에 얼마나 길고 현학적인 말들이 담겨 있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신은왜나를낳고...: ...그렇게 해도 되나요?][목인석심: 네. 일종의 체험판 같은 느낌이죠. 일주일 정도 댁으로 정령을 빌려드릴 테니, 직접 써보시고 비용을 내실지 결정하시면 됩니다.][신은왜나를낳고...: 그럼 가격은 대충 어느 정도로...]"흠..."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가격을 정하지 않았다.당장 곯은 배를 채울 양분만 생각하다 보니 구체적인 단가를 책정하지 않은 것이다.요즘은 흔해 빠진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는 데도 돈이 깨지는 시대다. 하물며 사료도 안 먹어, 똥오줌도 안 싸, 심지어 빵빵한 이능력까지 쓸 수 있는 미친 가성비의 정령을 헐값에 넘기는 건 말이 안 됐다.나는 스마트폰으로 슬쩍 프리미엄 묘종의 분양가를 검색해 보았다."미친. 500만 원이나 해?"그렇다면 내 정령은 최소 억 단위는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슬쩍 채팅창 상단을 훑어보았다.[신은왜나를낳고검사마법사궁수도적을낳았는가]척 봐도 땡전 한 푼 없는 개털 그지 깽깽이였다."쩝..."여기서 선금부터 부르면 백퍼센트 기겁하고 도망갈 것이다.이건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목인석심: 가격은 일주일 뒤에 구매하실 때 알려드릴게요 ㅎㅎ][신은왜나를낳고...: 아, 네... 알겠습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한 물건을 파는 시장은 소비자가 갑이다. 하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독점 매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즉, 판매자인 내가 무조건적인 갑이었다.나는 당당하게 상대방의 주소를 받아냈다. 그런데 막상 주소를 받고 나니 문제가 하나 생겼다."어... 이거 어떻게 보내지?"퀵을 부르자니 살아있는 불덩어리(?)를 받아줄 리 만무했다.나는 깊은 고민 끝에,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박스를 가져와 그 안에 뽁뽁이와 비닐 호일을 두르고 불의 정령을 야무지게 포장하기 시작했다.'뭐, 일반 택배로 보내도 괜찮겠지?'참고로 불의 정령은 현재 가사 상태였다.아까 한 번 깨어났을 때, 너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낼 거라고 말해줬더니 너무 서럽게 울면서 방바닥을 태워 먹으려 하기에 재워버렸기 때문이다."아 맞다. 숨구멍을 뚫어줘야지."-뽕! 뽕!정령이니 괜찮을 수도 있지만, '불' 정령이니 혹시 모른다.불은 산소가 필요하니까.내가 이렇게 세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