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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의 정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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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의 정령(3)

-째각. -째각.단조로운 시곗바늘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서은하는 핏발 선 눈으로 벽시계를 노려보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오늘. 바로 오늘이다.자신의 인생이 180도 뒤집힐지도 모르는, 정령이 오기로 한 날.은하는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마른침을 삼켰다.'진짜 올까? 아니, 사기라도 오긴 오겠지.하지만 의심의 싹은 쉽게 잘리지 않았다. 정령.자신이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멀쩡한 정령을 실제로 본 등반자는 없다고 한다.그 정도로 귀하신 몸을, 대한통운 일반 택배로 보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미친놈. 아무리 생각해도 단단히 미친놈이야, 그 목인석심인가 뭔가 하는 작자는.'뭔 특수 택배도 아니니, 그저 다른 집의 생수통이나 두루마리 휴지 팩과 함께 화물칸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배달된다는 뜻이다.[배달 예정 시간까지: 5분]"후우... 5분. 딱 5분 남았어."은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호흡이 가빠지고, 뺨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심장 박동은 이미 BPM 150을 가볍게 돌파한 지 오래였다.만약 이게 사기라면?상자 안에 벽돌이나 쓰레기, 혹은 '속았지 병신아ㅋㅋ'라고 적힌 쪽지 따위가 들어있다면?'아니야. 그럴 리 없어.'은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상대방은 자신에게 단돈 1원도 요구하지 않았다. 선입금을 유도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정보를 털어간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서은하는 누가 털어먹으려 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완벽한 무일푼 깡통이었다.비렁뱅이에게 공들여 사기를 칠 멍청이는 없다.그 사실 하나가 은하의 뇌를 지배했다.평소의 서은하였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온갖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파티 구인 게시판에서 '정령사? 걍 허수아비 세워두는 게 더 괜찮을 듯 걘 탱킹이라도 하잖아ㅋㅋ'라는 조롱을 받으며 눈물 콧물을 다 뺐던 그녀 아니던가.하지만 한 번 맛본 희망은 지독한 마약과도 같았다.이미 은하의 이성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영접하기 직전의 광신도, 혹은 전 재산을 코인에 꼴아박고 떡상만을 기다리는 차트 중독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때였다."야! 서은하! 택배 왔는데 이거 네 거냐!?"거실 쪽에서 들려온 동생의 고함 소리.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예정 시간보다 3분이나 일찍 도착했다."그, 그래! 택배 기사님들도 바쁘시니까 일찍 오실 수 있지...!"은하는 거의 발작하듯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방문 손잡이를 잡는 손이 덜덜 떨렸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내쉬었다. 하지만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덜컥-!방문을 박차고 거실로 나간 은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소파에 길게 누워 노트북으로 너튜브를 보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었다."야. 너 엄마가... 씨발, 깜짝아!?"동생은 은하를 보자마자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바퀴벌레가 턱시도를 빼입고 나타나 정중하게 명함을 건네는 꼴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뭐, 뭐야? 너 미쳤어? 아니면 남친이라도 생겼냐? 갑자기 웬 원피스를...""택배 어딨어!"처음 본 누나의 기세에 쫄아버린 동생은 현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저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하는 현관으로 쇄도했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평범한 규격의 종이상자. 겉면에는 익숙한 택배사 로고가 찍혀 있었다."흡...!"은하는 숨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어 올렸다.묵직했다. 빈 상자는 아니다. 무언가 들어있음이 확실했다.동시에 벽돌이라기에는 가벼웠다. 그녀는 상자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쏜살같이 도망쳤다.쾅!방문이 거칠게 닫히고,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남겨진 동생만이 황당하다는 듯 멍하니 그쪽을 바라볼 뿐이었다."후우... 씁... 후우..."은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대 정중앙에 상자를 고이 내려놓았다.이제 심장은 두근거리는 수준을 넘어, 흉곽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쿵쾅대고 있었다. 고막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미신과 의식을 다 동원했다.몸의 부정을 씻어내기 위해 목욕재계를 했고, 가장 깨끗하고 비싼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12시간 동안 '행운이 깃드는 주파수 432Hz' 영상을 틀어놓기까지 했다.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병신 같은 짓거리였지만, 지금의 은하에게는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간절했기에."자, 이제 열어보자..."은하는 비장한 표정으로 책상 서랍을 열고 도구를 찾았다.일반적인 커터칼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 어울리지 않아.'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논리인지 모를 논리를 대며, 은하는 서랍장에서 식칼을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번쩍이는 스테인리스 식칼을 든 원피스 차림의 여자. 제3자가 봤다면 영락없는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이었겠지만, 은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제발... 제발 목인석심이 사기꾼 새끼가 아니기를.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천지신명님, 제발...'속으로 온갖 신들을 다 소환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테이프 틈새로 칼날을 밀어 넣었다.찌익-테이프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상자 날개를 조심스럽게 열어젖히자, 매캐한 박스 냄새와 함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났다."...?"은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상자 안에는 은박 돗자리 재질로 보이는 수상한 비닐 호일이 덕지덕지 감긴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크기는 대략 주먹 만 했고, 겉에는 뽁뽁이가 무식할 정도로 두껍게 둘러져 있었다."뭐지...?"은하는 정령을 배달한다기에 돌 같은 것을 생각했다.그녀의 상식상으로는 살아있는 정령 자체를 택배로 보낼 리는 없으니, 뭔가 신비한 돌 같은 것으로 정령과 계약하는? 그런 것을 상상했었다."...이게 정령이라고?"은하는 반신반의하며 손을 뻗어 뽁뽁이 겉면을 살짝 쓰다듬었다."어라?"온기.분명 차가운 방 안인데도 불구하고, 뽁뽁이 너머로 미지근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은하가 뽁뽁이를 한 겹 벗겨내고, 안쪽의 은색 비닐 호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앗, 뜨거 미친!"은하는 기겁하며 손을 뗐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방금 끓인 물이 담긴 종이컵을 쥐었을 때처럼 훅 끼쳐오는 열기였다.그녀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아주 미세한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코오... 코오..."......?"은하는 숨을 죽이고 상자 쪽으로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 댔다.-새근새근... 코오오..."자는 소리?"이거, 진짜 살아있는 건가?은하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이 커졌다. 당황스러움은 찰나였고, 곧이어 벅차오르는 감격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손끝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비닐 호일을 벗겨내기 시작했다.바스락- 바스락-호일이 한 겹씩 벗겨질 때마다 방 안의 온도가 묘하게 올라가는 듯했다. 다시 만져본 표면은 아까처럼 미친 듯이 뜨겁지는 않았다. 적당히 기분 좋은 수준의 따뜻함.그리고 마침내 비닐이 완전히 벗겨졌을 때, 주황빛을 머금은 묘한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이... 이게 뭐야?"은하는 멍한 표정으로 그 물체를 내려다보았다.자고 있는 것은, 주황색 피부의 기묘한 생물체였다.게다가 털이 너무 수북해서 얼굴의 이목구비는 보이지도 않았다. 위쪽은 그럭저럭 둥글둥글한데, 하반신 쪽은 묘하게 갈라져 있어서 마치..."어... 엉덩이?"그것도 아주 통통하고 탐스러운 복숭아 같은 엉덩이 모양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은하는 살짝 의아함을 느끼며, 방구석에 세워져 있던 플라스틱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빗자루 막대기 끝으로 그 주황색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푹, 푹.탄력 있는 젤리를 찌르는 듯한 촉감이 막대기를 타고 전해졌다.그러자, 그것이 아주 느릿하게 꼬물거리며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스르륵-덩어리가 한 바퀴 구르며 마침내 앞모습을 드러냈다.그곳에는 구겨진 은박지를 이불 삼아 곤히 잠든, 주먹 크기의 조그만 생물체가 있었다.은은한 빛을 머금은 주황빛 피부는 통통하다 못해 쿡 찌르면 터질 듯이 부드러워 보였다. 머리통 위로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지만, 위협적이기는커녕 갓난아기의 부드러운 배냇머리처럼 포근하게 살랑거렸다."이게... 정령...?"은하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녀석은 감긴 눈을 반쯤 뜨더니 하품을 쩍 했다.-쿠아아암... 쿠울...그러고는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숙면에 빠져들었다.'미친...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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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온 정신을 집중해 그토록 외치고 싶었던 스킬명을 발동했다.[스킬: 정령 계약(Elemental contract)을 시도합니다.]시스템 특유의 기계음이 귓가를 때렸다.성공이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삐빅![정령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스킬이 취소됩니다.]"......엥?"은하는 허공에 뜬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뻗은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파르르 떨렸다.침대 위의 주황색 덩어리는 제 속도 모르고 그저 평온하게 콧방울을 부풀렸다.-코오오... 퓨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