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등반자
6. 등반자
세계수라는 능력.생명에게서 양분을 추출해, 그 양분으로 정령을 창조한다.이 정령이라는 놈들은 꽤나 융통성이 넘쳐서, 해당하는 속성이나 개념 안에서는 말 그대로 '뭐든' 할 수 있다. 양분만 충분하다면 그 형태와 한계에는 제약이 없었다.다탄두 각개 목표 재진입 탄도 운반체의 정령이라든가, 열화 우라늄 날개안정 분리 철갑탄의 정령 같은 흉악한 녀석들도 얼마든지 내 손으로 빚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게임으로 치자면, 나는 소환사형 왕귀캐라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여기서 집중해야 할 단어는 다름 아닌 '왕귀'다."초반이 안 좋아도 너무 너무 안 좋아……."나는 가느다란 내 팔뚝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왕귀캐가 초반에 약한 건 일종의 숙명이다.초반부터 무쌍을 찍고 다니는데 후반에도 강하다면, 우린 그걸 왕귀캐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양심 뒤진 좆사기캐라고 부를 뿐.물론 내 능력이 잠재력 면에서는 사기라는 걸 인정하지만, 지금 당장의 무력만 놓고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솔직히 지금의 나라면…… 길 가던 평범한 중딩 한 명하고 멱살잡이를 해도 시원하게 털릴 자신 있는데."거실에서 닌텐도를 뿅뿅거리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페트가 가세한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 녀석은 어디까지나 가내수공업에 특화된 생산직이지 전투직이 아니니까.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보통 '등반자'로 각성하게 되면, 굳이 탑에 기어들어 가 몬스터의 뚝배기를 깨고 다니지 않아도 기본적인 신체 스펙이 월등히 상승한다. 무형의 힘이 몸을 돌며 뼈와 근육을 강화하기 때문이다.근데 나는?등반자라는 타이틀을 번듯하게 달고 있으면서, 탑은커녕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버겁다.이유는 간단했다. 내 종족 자체가 나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식물은 원래 돌아다니는 생물이 아니다. 흙에 뿌리를 박고 가만히 있어야 할 나무가 두 다리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려 하니, 숨만 쉬어도 어마어마한 양분이 줄줄 새어나가는 것이다.나중에 양분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레벨업을 한다면 또 모를까, 지금 당장 외출을 감행하는 건 내 명줄을 깎아 먹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게다가 몸뚱이 자체가 아예 변해버리지 않았던가.다른 등반자들은 각성해 봤자 키가 좀 커진다거나, 근육이 질겨진다거나, 심해 봐야 이마에 조그만 뿔이 돋아나는 등 원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하지만 나는 건장한 성인 남성에서, 쪼그만 여자아이의 몸으로 변해버렸다. 예전의 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태다."흐음."나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결론적으로 나의 신분을 숨겨야 한다.비스트 같은 거대 독점 기업의 파이를 빼앗아 먹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긴 했지만, 지금의 내겐 나를 지킬 최소한의 방패조차 없기에.하지만 모순되게도, 양분을 모으고 살아남으려면 내 정령들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야만 한다.분양 건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나의 존재는 등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질 수밖에 없다.사업을 키우려면 필연적으로 유명해져야 하는데, 유명해지면 내 목숨이 위험하다.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할까?***서은하는 우뚝 솟은 등반자 관리청 건물 로비에 들어섰다.평소 같았으면 자신보다 앞서나가는 쟁쟁한 각성자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은하는 달랐다. 턱은 당당하게 치켜올려져 있었고, 걸음걸이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그녀가 로비를 가로지르기 시작하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정확히는 은하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오른쪽 어깨 위였다."야, 저거 뭐냐?""헐, 미친. 대박, 인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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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움직이는데? 꼬물거리는 거 안 보여?""등반자 각성하면 저런 것도 키울 수 있는 거냐? 그 저번에 비스트인가 뭔가 하는 기업에서 판다는 몬스터 펫, 그거 아냐?"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은하의 어깨 위에는 세상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생명체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조그만 크기, 주황빛을 머금은 통통한 젤리 같은 몸뚱이, 그리고 이마 위에서 찰랑거리는 불꽃.택배 상자에서 꺼내어 '샐러'라는 이름을 붙여준 불의 정령이었다."코오오..."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든 말든, 샐러는 맹한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은하의 목덜미에 말랑한 뺨을 기댔다. 그러고는 통통한 두 앞손으로 은하의 옷깃을 꼭 끌어안으며 편안하게 늘어졌다.목덜미를 타고 기분 좋은 온기가 스며들었다.'헤헤!'자신에게 쏟아지는 경이로운 시선들과,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샐러의 따스함. 은하는 주체할 수 없이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부러움 섞인 눈빛들이 그녀의 자존감을 한껏 펌핑시켜 주고 있었다.'그래도... 뭔가에 싸서 데려올 걸 그랬나?'은하는 문득 주변의 과도한 관심에 아주 약간의 부담을 느끼며 생각했다.처음 그녀의 방에 배달되었을 때처럼 은박 돗자리나 뽁뽁이로 칭칭 감아서 가방에 숨겨 왔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은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어차피 숨긴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었다. 정령사가 정령을 다루는 이상, 언제고 꼬리는 밟히게 되어 있다. 게다가 당당하게 어깨에 얹고 다니는 이 우월감을 굳이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로비를 지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은하는 신규 각성자 등록을 위한 키오스크 구역에 섰다.누군가 뒤에서 정보를 훔쳐보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재질을 알 수 없는 묵직하고 어두운 천으로 사방이 가려진 독립된 부스 형태를 띠고 있었다.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모니터 화면이 밝아졌다.[신규 등반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각성하셨다면, 본인의 스테이터스 정보를 입력해 주십시오.][※해당 사항은 타인에게 절대 공유되지 않으며, 개인정보 유출 시 법적 책임은 본 관리청에 있습니다.]스테이터스.이는 등반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정보창을 이르는 공식 명칭이었다.하지만 숱한 서브컬처와 웹소설, 게임에 뇌가 절여진 현대인들은 이를 그저 '상태창'이라고 친숙하게 불렀다. 애초에 상태창이든 스테이터스든, 머릿속으로 상태창을 띄우겠다고 의식하기만 하면 눈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으로 튀어나오는 방식이다.명칭이 무어라 불리든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은하는 익숙하게 속으로 상태창을 읊조렸다. 그러자 망막 위로 그녀의 정보들이 홀로그램 팝업처럼 떠올랐다.키오스크 화면에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을 요구하는 입력 칸이 나타났다.능력치나 보유 스킬 같은 민감한 사항까지 전부 적어 낼 필요는 없었다. 사람마다 상태창의 형태는 천차만별이기에, 관리청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통계용 데이터만을 수집하는 것이다.[이름: ______][직업: 검사 / 궁수 / 도적 / 마법사 / 모험가 / 해당 사항 없음: _______][만약 귀하의 스테이터스 위 목록과 다르다면 클릭해주십시오 ●]은하는 홀로그램 키패드를 두드려 이름표에 '서은하' 세 글자를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그리고 직업 란.은하는 망설임 없이 [해당 사항 없음]에 체크를 했다.빈칸이 활성화되었다.[해당 사항 없음: 정령사]입력을 마친 은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대기표를 발급합니다.][결제하실 금액은 449,000원입니다.]"미친... 드럽게 비싸네."아무리 초인들을 관리하는 특별 행정 비용이라지만 45만 원에 육박하는 돈은 현재 쥐뿔도 없는 은하에게 피 같은 금액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체크카드를 긁은 뒤, 위잉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대기표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은하는 부스 근처의 푹신한 대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샐러는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늘어진 채 새근새근 콧방울을 부풀리고 있었다."0719번님! 0719번 대기자님!"생각보다 대기 시간은 짧았다. 금세 은하의 번호표를 부르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은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한 긴장감이 배를 타고 올랐다."이쪽으로 오시겠어요?"은하를 부른 직원은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여성이었다.그녀는 은하를 인솔해 관리청 내부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직원의 시선은 자꾸만 앞을 보지 못하고 은하의 어깨 위로 미끄러졌다."저기... 아까부터 봤는데, 그건 펫인가요?""아, 네. 뭐... 비슷해요."직원이 안내한 곳은 새하얀 벽면으로 둘러싸인 넓은 방이었다.방 한가운데에는 캡슐 형태의 커다란 스캐너 장비가 놓여 있었고, 그 외에도 근력이나 동체 시력을 측정하기 위한 각종 패드와 기구들이 즐비했다."자, 여기서부터는 등반자님의 기초 신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테스트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우선 저기 있는 탈의실에서 환복을 부탁드릴게요."직원의 안내에 고개를 끄덕인 은하가 탈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직원이 다급하게 손을 들어 은하를 제지했다."잠시만요! 그... 스캐너나 측정 기구들은 굉장히 예민해서요.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실 때 그 아이는 데리고 가시면 안 됩니다."은하는 멈칫했다.그녀의 어깨에서 세상모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샐러를 내려다보았다.테스트를 하려면 밀폐된 기계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불을 머금은 녀석을 안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어... 그럼 제가 검사받는 동안 잠시 맡아주실 수 있나요?"은하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직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직원은 샐러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불꽃과, 오렌지빛으로 달아오른 뺨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혹시... 만지면 뜨겁나요?"순간 은하는 '아니요, 그냥 따뜻해요'라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처음 상자에서 녀석을 꺼내려다 무심코 손을 댔을 때, 확 끼쳐오던 그 열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계약으로 이어진 상태가 아니거나, 샐러가 완전히 경계를 푼 상태가 아니라면 일반인에게는 화상을 입힐 여지가 충분했다.은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말에 직원은 잠시 허둥지둥 방 안을 뒤지더니,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두꺼운 장갑을 양손에 단단히 껴안고 나타났다. "자, 그럼... 제가 잠시 안고 있겠습니다."직원은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샐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가 멈칫했다.어디를 잡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약간의 침묵 끝에 직원이 선택한 곳은 샐러의 통통한 목덜미였다.고양이를 다룰 때처럼, 직원은 샐러의 뒷목을 덥석 잡고 허공으로 쭈욱 들어 올렸다.-코오...?갑작스러운 공중 부양에 단잠에서 깬 샐러가 눈을 번쩍 떴다.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샐러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녀석의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잔뜩 쫄아있는 직원의 낯선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1초.2초.3초.짧고도 긴 정적이 방 안을 감돌았다.샐러는 직원의 얼굴을 스캔하듯 훑어보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한 번 끄덕였다.마치 '아, 너는 내 주인이 아니구나.' 하고 상황을 완벽히 파악한 것 같았다.그리고 그 직후.뿌에에에에엥-!!방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샐러의 몸에서 주황빛 불길이 확 솟구치며 주변의 공기를 일순간에 훅 달아올랐다."앗 뜨거! 아니, 안 뜨겁네! 어떡해, 울어요! 등반자님, 얘가 막 울어요!!"두꺼운 가죽 장갑 덕분에 손을 데지는 않았지만, 기겁한 직원이 허공에 샐러를 매단 채로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샐러는 허공에서 짧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흩뿌리며 오열하고 있었다."...저 빨리 환복하고 오겠습니다."은하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이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은하의 방구석 히키코모리 생활이 너무 길었다.한마디로,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