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등반자(2)
7. 등반자(2)
서은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왔다.전신을 훑고 지나간 각종 신체검사의 결과는 한마디로 처참했다. 검사 결과표가 띄워진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관리청 직원의 미간이 좁아졌다."음……. 일반인 기준으로는 확실히 우수한 편이십니다만, 등반자 기준으로는 조금…….""많이 낮나요?""...전투직보다는 생산직 각성자분들에게 더 적합한 수치이긴 하네요."어떻게든 상처 주지 않게 포장해 보려는 직원의 눈물겨운 노력에, 은하는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이어진 서류 확인 절차."혹시 외부 병원에서 각성자 건강진단결과서는 떼 오셨나요?""아뇨? 꼭 챙겨야 하는 건가요.""괜찮습니다. 어차피 여기서 기초 스캔을 진행하니까요."직원의 안내에 따라 캡슐형 기기에 잠시 들어갔다 나온 은하는 다행히 건강에 어떠한 이상도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직원은 차트에 빠르게 '건강 이상 없음'이라고 기재했다.이제 남은 것은 대망의 능력 검사. 은하는 샐러를 돌려달라고 직원에게 요청했다.이윽고 직원이 바퀴가 달린 특수 합금 보관함을 조심스레 끌고 왔다.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샐러가 맹한 눈을 끔벅이며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샐러!"은하를 발견한 샐러는 반갑다는 듯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익숙한 온기가 닿자 은하는 거짓말처럼 마음에 안정감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녀석에게 깊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빨리 탑을 올라야겠어.'은하는 샐러를 향한 자신의 애착에 놀라면서도, 하루빨리 탑을 등반해 그 목인석심님으로부터 샐러를 정식으로 분양받겠다는 결의를 다졌다.잠시 후, 능력 측정을 위해 이동한 곳은 축구장 넓이와 맞먹는 거대한 돔 형태의 공터였다.사방이 뚫린 휑한 공간. 은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아무도 없네요?""공간 확장 기술이 적용된 구역이라 그렇습니다." 직원은 빈 공간을 가리켰다."눈에 보이지 않을 뿐, 실제로는 다른 등반자분들도 이 공터의 각기 다른 위상에서 능력을 측정하고 계십니다. 서로의 스킬이 간섭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죠."직원의 설명에 은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개조차 되지 않은 기술에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되었다.원칙적으로 각성자가 관리청의 허가 없이 현실 세계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엄격한 불법이다. 즉, 지금부터 할 테스트가 은하 인생 최초의 스킬 사용인 셈이다."측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허공을 향해 스킬을 한 번 시전해 주시고, 그다음에는 타격용 허수아비에 한 번 시전해 주시면 됩니다. 어느 쪽부터 하시겠습니까?""그럼…… 허공부터 할게요."은하는 빳빳하게 굳은 어깨를 풀며 속으로 스킬명을 읊조렸다.[스킬: 공격 명령(Offensive Command)을 시전합니다.]은하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선이 되어 어깨 위의 샐러에게 곧바로 전달되었다.그러자, 샐러의 두 눈이 빛났다.샐러는 곧 짧고 통통한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화르륵-!순간, 아무것도 없던 새하얀 허공에 불의 꽃이 피어났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등등이 섞인 형형색색의 화염이 꽃송이처럼 겹겹이 흩날리며 공중을 아름답게 수놓았다.범위가 넓진 않았지만, 한 폭의 화려한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이 아름다웠다."와아……."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은하와 달리, 한쪽에서 관측용 기계를 조작하던 직원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모니터에 뜬 수치를 확인한 직원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하지만 직원은 프로였다. 이내 내색하지 않고 표정을 갈무리한 직원이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다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허, 허수아비도 바로 진행해 볼까요? 혹시 휴식이 필요하시지 않다면 바로 하셔도 괜찮겠습니까?""네. 괜찮아요. 바로 할게요."은하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터 한가운데의 바닥이 부드럽게 열리며 짚으로 된 허수아비가 솟구쳐 올랐다.'진짜 신기하네.'은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의지를 다지며 스킬을 발동시켰다.[공격 명령(Offensive Command)]이번에는 표적이 명확했다. 샐러가 다시 한번 손을 허수아비 쪽으로 뻗었다.그리고, 그 직후.화아아악-!"어?"은하의 입에서 바보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직원 역시 기계를 조작하다 말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무언가 날아가는 궤적이나 전조증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샐러가 앞손을 뻗는 그 순간, 수십 미터 떨어져 있던 허수아비의 몸체에 아까 보았던 그 불꽃이 '이미' 들러붙어 타오르고 있었다.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직원은, 이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땀방울을 느끼며 조용히 기계 패널 끝에 자리한 노란색 버튼을 꾹 눌렀다.특수한 각성자가 나타났다는 비상 버튼이었다.***[등반자 등록증][이름: 서은하 / 직종: 정령사 / 현재 층수: 0층]"축하드립니다, 서은하 님. 지금 이 시간부로 정식 등반자 등록이 완료되셨습니다. 이제 언제든 탑 내부로 진입하실 수 있습니다.""아, 감사합니다."은하는 갓 발급되어 따끈따끈한 등록증을 만지작거렸다.손끝에 닿는 단단한 합금 플라스틱의 감촉이 이제야 실감을 더해주었다.드디어 나도 탑에 오를 수 있다.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은하는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하루빨리 층수를 올려 돈을 모아야, 샐러를 정식으로 분양받을 수 있을 테니까.그녀는 탑에 진입하기 위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일반적인 상태창을 띄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이상 감각이 전신을 부드럽게 감쌌다.[탑 1층에 입장하셨습니다.]시야가 한 차례 일그러졌다가 펴지며, 매캐한 흙먼지 냄새와 축축한 이끼 향이 폐부로 훅 쏟아져 들어왔다.현실과는 완벽하게 격리된 다른 세계.거대한 둥치들이 얽히고설킨 어두컴컴한 원시림과, 울퉁불퉁한 바위 벼랑이 이어지는 탑의 최하층이었다.일명 '튜토리얼 구역'.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준비 없이 뛰어든 수많은 신입 등반자들이 차가운 시체로 변해 나가는 뉴비들의 무덤이기도 했다.은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어두운 숲속에서 들려오는 정체모를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조차 뼈를 시리게 만드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관리청에서 봤던 수칙들을 기억하자.'은하는 관리청에서 달달 외웠던 1층 생존 수칙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되짚었다.첫째, 1층 몬스터라고 절대 얕보거나 방심하지 말 것.둘째, 고블린은 무리를 지어 다니니, 한 마리씩 유인하여 철저하게 일대일로 상대할 것.셋째, 1층에 스폰되는 고블린은 2마리씩 2개 조, 총 4마리. 놈들을 전부 토벌할 때까지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말 것.-키리릭…… 키히히.바로 그때였다.전방 십여 미터 앞, 짙은 수풀 사이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은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녹색 피부를 가진 흉측한 인간형 몬스터였다.성인 남성의 허리춤 정도밖에 오지 않는 왜소한 체격.찢어진 입가 사이로 흘러내리는 누런 침과, 손에 쥐어진 끝이 이빨처럼 빠진 녹슨 단검.탑의 가장 기본적인 몬스터, 고블린이었다."힉……!"실제로 마주한 몬스터의 위압감은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코를 찌르는 악취와 시뻘건 눈동자에 질린 은하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사냥감이 겁을 먹었다는 것을 눈치챈 고블린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키에에에엑!고블린이 바닥을 거칠게 박차며 괴성을 질렀다.식은땀이 눈앞을 가리고, 다리가 얼어붙어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패닉에 빠진 은하가 눈을 질끈 감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샐러!"[스킬: 공격 명령(Offensive Command)]은하의 외침에, 그녀의 어깨에서 고블린을 경계하던 샐러의 두 눈이 번뜩였다.녀석은 맹렬하게 돌진하는 고블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화아아아악-!-키에…… 엑?!은하의 목 앞 세 뼘 거리까지 도약했던 고블린의 몸체가, 공중에 뜬 그 상태 그대로 형형색색의 불길에 휩싸였다.아무런 전조도 없이 전신에서 터져 나온 다채색의 화염은, 고블린의 질긴 가죽과 근육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시간이 없었다.공중에서 불덩이가 된 고블린은 은하에게 닿기도 전에 이미 시커먼 숯덩이로 변해 있었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툭.바람에 흩날리는 시까먼 재 사이로, 맑은 빛을 내는 작은 돌멩이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몬스터의 고유한 부산물이자 영양분의 결정체, 1층 고블린의 마석이었다.은하가 얼빠진 얼굴로 그 마석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어깨 위에 앉아있던 샐러가 돌연 고개를 홱 돌렸다.녀석은 은하의 등 뒤, 짙은 그림자가 깔린 수풀을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화르륵-!-키에엑?!등 뒤에서 터져 나온 끔찍한 비명에 은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그곳에는 방금 전 숯덩이가 된 놈과 똑같이 생긴 고블린 한 마리가 불길에 휩싸여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은하의 뒤를 잡기 위해 소리 없이 접근하던 놈이었다.녀석 역시 비명 몇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아."은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그제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1층의 생존 수칙.'고블린은 무리를 지어 다니니, 유인하여 무조건 일대일로 상대할 것.''1층의 고블린은 2마리, 2마리, 총 4마리이니 다 잡을 때까지 긴장을 놓지 말 것.'"맞다. 2마리씩 무리 지어 다닌다고 했지……."눈앞의 한 마리에게 정신이 팔려, 나머지 한 마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만약 샐러가 아니었다면 파상풍과 각종 전염병으로 인챈트된 저 단검이 여지없이 등짝에 꽂혔을 것이다.은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선은 자연스레 어깨 위의 샐러를 향했다.'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해.'샐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뒹굴거렸다.은하는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마석을 주워 주머니에 챙겨 넣고 다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긴 터라 한결 신중해졌다.그렇게 오 분쯤 걸었을까.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남은 고블린 두 마리가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파먹고 있었다.이번에는 놈들이 은하를 발견하기 전이었다.은하는 놈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샐러에게 조용히 의지를 전달했다."샐러?"[스킬: 공격 명령(Offensive Command)]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샐러의 눈이 번쩍였다.화아아악-! 화악!
d3kza0VLSVdxajZ6L09aWC8xUnR2RzNrQ3V4clJ6V1FUVlhrZDVxU0RYQ2ZzbUtQSUU5bHM3d3hIZ0EzRDVabQ
-키, 키엑?!-끼에에엑!공터에서 식사를 하던 두 마리의 고블린이 동시에 불길에 휩싸였다.녀석들은 적이 어디서 공격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제 몸을 태우는 화염 속에서 허우적대다 허무하게 바스라질 뿐이었다."……끝났어."은하는 헛웃음을 흘리며 바위 뒤에서 걸어 나왔다.방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몬스터 2마리가 재가 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맑게 빛나는 마석 두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이것으로 1층 할당량인 고블린 4마리 토벌이 모두 끝났다.뉴비들의 무덤이라 불리며 수많은 신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1층 튜토리얼을 클리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십여 분. 그마저도 숲을 조심조심 걷느라 소비한 시간이 대부분이었다.은하는 4개의 마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쳐다보았다.샐러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근데 이거…… 원래 이렇게 쉬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