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팔려 가는 결혼
1. 팔려 가는 결혼
“회사를 위해서다. 잔말 말고 결혼해.”
성현제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버지, 제가 결혼이라뇨. 게다가 LS그룹 차강우라면…….”
고작 22살이었다.
억눌려 살아온 인생, 오로지 대학 졸업만 기다리며 버텨왔다.
자신을 상품으로만 여기는 부친으로부터, 학대를 일삼았던 계모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졸업한 후에는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 그 후 아이들을 가르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희원은 자신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절망했다.
“저 이제 22살이에요. 제가 어떻게 결혼을 해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팔려 가는 결혼, 결혼하면 인생은 끝이라는 걸.
희원의 말에 성 사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22살이지. 네 엄만 네 나이 때 널 낳았다.”
희원은 양심도 없이 모친에 대해 말하는 성 사장을 보며 분노가 차올랐다.
성 사장은 아내가 죽고 난 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비서였던 추현정과 재혼했다.
처음엔 몰랐다. 추현정과 성현제가 제 모친이 살아 있을 때부터 내연관계였다는 사실을 안 건 나중의 일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두 명의 동생들이 사실은 혼외자였다는 사실을 안 희원은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그러면서 엄마를 입에 담다니!
분노가 치밀었지만, 희원은 성 사장의 앞에서 무력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애써 감추며 제 부친을 노려보는 일뿐이었다.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아시면서 결혼시키시려는 거예요?”
상대는 소문의 그 망나니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한 곳인 LS그룹의 차강우.
남자는 차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면서 어릴 적부터 해외에서 생활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남자가 한국에 입국한 것도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남자의 소문은 무성했다.
[한번 잔 여자랑은 두 번은 안 잔다며?]
[갑질도 장난 아니라더라. 조금 마음에 안 들면 물건 집어 던지고 난리가 난대.]
[그뿐이야? 지난번 어떤 여자가 연락처 좀 달라고 했다고 얼굴에 대고 욕을 했다더라.]
[그런데 외모가 아주 엉망이라며,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다는 소문도 있고…….]
[누가 그러는데 제대로 걷지 못한대. 그런데 솔직히 외모가 문제가 아니잖아. 문제는 그 성격이지. 여자는 어떻게 만난다는 거야?]
[그 정도 돈이 있는데 붙는 여자 없겠어? 솔직히?]
성격파탄자, 여성 편력, 가시밭길이 될 게 뻔한 결혼이었다.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은 거 모르세요?”
“내가 왜 몰라?”
절망적인 희원의 표정과는 다르게, 성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남자가 그 정도 흠 있는 게 대수라고.”
“아버지!”
“LS라니. 하하.”
부친에게 있어 자식은 그저 사업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다음 주에 간단하게 상견례를 하고, 이번 달 안으로 결혼식을 올릴 거다.”
“……저 아직 학교 졸업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렇게 빨리 자신을 팔아넘길 줄은 몰랐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희원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성 사장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성현제는 있는 힘껏 테이블을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내가 여태껏 널 왜 이렇게 곱게 키운 줄 아느냐? 바로 이날을 위해서다.”
곱게 키웠다고?
그냥 사업이 더 중요했던 거잖아.
희원은 성 사장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저 상품으로만 생각했다.
나중에 회사를 위한 거래 수단으로 사용할 때 흠집이 없는 최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뿐, 그 안에 사랑은 없었다.
결혼 시장에서 좀 더 좋은 값을 받기 위해서는 상품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성 사장은 그녀의 모든 걸 통제했다.
희원은 남자친구는커녕 친구조차 부친의 허락 없이는 만들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희원을 ‘귀한 진성 식품의 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희원은 자신을 그저 물건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부친이 항상 원망스러웠다.
“너 하나로 인해 이 사업이 틀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너. 여태껏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산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딴소리 말고 학교 휴학해. 아니다. 때려치워. 그깟 학교가 중요하냐. 무려 LS다. LS그룹과 사돈이 되는 거다.”
성 사장은 희원의 안위보다 사업을 확장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아버지 저 말고.”
세진이도 있고 유나도 있는데 왜 하필 저예요?
내뱉지 못하는 말이 희원의 입 안에 맴돌았다.
“토 달지 말고 말 들어.”
성 사장은 희원의 말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조용히 피부 관리받고 요리 학원이나 다니고 있어. 알겠어?”
“…….”
“안 나가?”
성 사장의 호통에 희원은 싫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서재에서 나왔다.
불행이 정해진 결혼이었다.
제 인생이 팔려 가듯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싫어, 이렇게 결혼하기는 죽기보다 싫어.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결혼은 의지로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일 뿐이었다.
***
며칠 후.
희원은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야한 옷을 입고 회원제로 운영되는 최고급 바로 향했다. 절친인 주아가 이곳의 VIP였기에 입장은 어렵지 않았다.
“하, 내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일단은 내 옆에 붙어 있어. 알겠지? 여기 은근 미친놈도 많아서 잘 보고 선택해야 해.”
주아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노는 걸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의 주아와 희원은 정 반대 타입이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성 사장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주아가 대한민국 최고의 반도체 회사 경선 반도체의 외동딸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희원은 이따금 주아가 좋은 집안을 갖고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알겠어. 고마워. 괜히 어머니까지 신경 쓰게 만들어서 죄송하네.”
희원이 오늘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주아가 애써 밝은 척하며 말했다.
“뭐가. 어머니도 너 답답하게 사는 거 속상해하셨어.”
“고마워, 주아야.”
“뭘. 그나저나 너 정말 괜찮겠어?”
주아는 가까이 다가와 희원의 귀에 속삭였다.
“원나잇이라니.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희원을 바라보는 주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내가 가장 바라는 거니까.”
저를 생각해주는 주아의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원은 제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주아는 괜찮다는 말에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주아야, 고마워.”
하지만 제 손을 잡는 희원의 표정을 보던 주아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왕 온 거 즐기다 가자. 남자 못 만나더라도 우리끼리라도 재밌게 놀면 되지.”
희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 사장은 주아와 만나는 장소까지 통제했다. 그런 간섭 속에서 희원이 오늘 바에 올 수 있었던 건 주아의 모친이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희원이가 결혼하면 잘 만나지 못할 텐데, 주아가 너무 섭섭해하더라고요. 요즘 결혼 전에 친구들끼리 여행가는 게 유행이라면서요? 때마침 경기도에 별장이 있어요. 주아랑 희원이 하루만 같이 보내도 될까요?]
[결혼도 안 했는데 외박은 안 됩니다. 결혼 전일수록 신중해야…….]
[사장님, 우리 주아랑 희원이 가장 친한 친구예요. 그렇게 걱정되시면 제가 동행하고요.]
[아니, 그렇게 하셔도 저는…….]
[걱정되시면 사장님께서 동행하셔도 좋고요. 경기도 별장 산 안에 있어서 힐링 되실 거예요.]
[큼큼,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시죠. 다음 날 오전까지는 희원이 보내주십쇼.]
주아의 모친은 끈질기게 성 사장을 설득했다. 물론 가능했던 건 주아의 모친이 재계서열 14위인 한서 그룹의 차녀였기 때문이었다.
권력에 약한 성 사장은 희원이 주아와 외박하는 것을 허락했다.
“응. 그렇게 하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희원은 오늘 반드시 목적을 이룰 생각이었다.
오늘, 희원은 원나잇을 할 생각이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절대로 먼저 올라가지 마.”
주아는 신신당부를 하고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희원이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해보려는 일탈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솔직히 두려웠다. 처음 본 사람과 잠을 잔다는 건 희원으로서도 큰 모험이었다.
부친은 딸을 좋은 값으로 팔아넘기기 위해 순결을 강요했다.
원나잇을 한다는 건,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부친을 향한 반항심이었다.
하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진짜 괜찮아, 우리 들어가자.”
그때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탈이 그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 * *
바에 도착한 희원은 주아와 빠르게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아는 아는 사람을 만나 잠시 자리를 비웠고, 혼자 뻘쭘하게 앉아있기 민망했던 희원은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돌아왔어도 주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카운터에 앉은 남자의 운동선수인 것처럼 탄탄하고 넓은 등이 보였다.
어쩐지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희원은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앉아 있던 자신의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히또 드려요?”
“네.”
대답을 하면서 시선을 돌려도 희원의 온 신경은 남자를 향해 있었다.
하룻밤을 보낸다면 저 남자였으면 했다.
인연은 비록 하룻밤으로 끝나겠지만, 평생 후회하지 않을 밤을 보내고 싶었다.
저 남자라면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일단 저질러보자.’
망설임 끝에 결심이 선 희원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바텐더를 향해 희원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남자를 향해 걸어가는 희원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수록 어지러웠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술을 입에 댄 건 처음이었다. 마음만 앞서 주량을 알지도 못한 채 독한 술을 연거푸 마셨던 결과는…… 그녀를 만취 상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희원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다행인 건, 남자의 곁에 앉았을 때는 조금 정신이 든 것 같았다.
희원은 남자를 향해 몸을 돌리고 턱을 괴었다. 그리곤 제 기준으로 가장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