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랑 잘래요?
2. 저랑 잘래요?
남자는 대답은커녕 희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희원이 아니었다.
“혼자 오셨어요?”
남자가 신경 쓰였고, 무슨 오기인지 희원은 눈앞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다.
남자에게선 은은한 우디 향이 났다. 어쩐지 평소 접했던 향과 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가까이서 본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잘생긴 외모였다.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 그리고 쌍꺼풀이 없는 긴 눈매와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희원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신이 빚은 조각상과 같은 얼굴에 홀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굳게 다문 남자의 입이 열렸다.
“뭡니까?”
불청객의 등장에 남자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희원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미치도록 근사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동굴 속에 들어온 것처럼 낮고 울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희원은 점점 확신이 생겼다.
반드시 이 남자와 자고 싶다고.
평소의 희원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나 이 사람한테 첫눈에 반한 거구나.’
남자를 만난 장소가 이런 장소가 아니라면, 결혼이 정해지기 전에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쩐지 씁쓸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면 이 일탈을 후회하지 않는 것만으로 가치는 충분했으니까.
마음을 다잡은 희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혼자 오셨어요?”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남자는 예의를 차리지만 여전히 불쾌한 기색을 담아 말했다.
“상관있죠? 그쪽이랑 한잔 같이하고 싶거든요.”
희원의 말에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한층 더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모르는 사람이랑 안 마십니다.”
남자는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이쯤 되면 다른 남자를 찾아 일어서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희원의 마음에 더 큰 오기가 생겼다.
“성희원이에요.”
“이름을 묻는 게 아닌데.”
“아, 그래요. 그럼 뭘 해야 할까요?”
모든 걸 내려놓은 상태였다.
결혼 전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내 의지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 든 남자였다.
이런 곳에서 만난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건 너무 허무하지만, 희원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룻밤을 보낼 상대에게 마음이 있어 다행이라고…….
희원을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술에 취한 사람이랑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쪽이 일어나기 싫다면 내가 일어나죠.”
남자의 굵고 낮은 목소리는 마치 심장에 직접 말하는 것처럼 가슴을 울렸다.
“그럼 먼저 실례하죠.”
남자가 일어섰다. 희원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잠, 잠시만요.”
당황한 희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뻗었다. 하지만, 남자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목적지에 닿지 못한 희원의 몸은 반동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망했다. 이게 뭐야.’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게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자의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과한 욕심이 화를 부른 게 아닐까, 희원의 머릿속에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까만색 대리석 바닥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곧 바닥에 부딪히게 될 거라는 공포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
이상했다.
조만간 느껴져야 할 고통이 전혀 없었다.
대신, 제 허리를 감싼 무언가가 느껴졌다.
희원은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그러자 한심스럽게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가지가지 하는군요.”
핀잔을 들어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오히려 좋아졌다.
남자가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원은 오늘 여러 번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날 수 있습니까?”
남자는 희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의 품에서 좋은 향이 났다. 시원하고 상쾌하고 편안한,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감, 감사합니다.”
“다리에 힘주고 일어서요.”
남자는 희원이 똑바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말은 차갑게 하지만 남자의 행동엔 저를 향한 배려가 있었다.
희원의 마음속에 남자를 잡아야 하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생겼다.
“그럼 놀다 가십시오.”
말을 끝낸 남자가 뒤돌아섰다.
희원은 양손으로 덥석 남자의 손을 잡았다.
“또 뭡…….”
남자가 돌아 희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제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희원이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저랑 잘래요?”
남자의 얼굴이 와장창 구겨졌다. 그는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취했으면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희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취하지 않았어요.”
“그럼 미쳤습니까?”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희원은 기죽지 않았다.
“절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미치지 않았어요. 보시기엔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항상 이런 말 하는 여자 아니고요.”
희원은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물론 제 모습에서 설득력을 찾기 힘들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제 꼴을 보면 못 믿으시겠지만요.”
그녀가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한참 동안 희원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했다. 그는 조금 전보다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당신은 내가 누군지는 압니까?”
“아뇨. 모르죠. 그쪽은 절 아나요?”
“…….”
남자는 침묵했다.
희원은 남자를 설득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서로를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사람 일이 전부 그렇게 모든 걸 알아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저에 대해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좋아요. 오늘이 제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이니 그쪽이랑 저랑 다시 볼 일은 없을 거고요.”
“성희원 씨.”
이름이 불린 희원이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남자가 제 이름을 기억해준 게 어쩐지 기뻤다.
“제 이름 기억해주셨네요.”
희원이 웃자 그녀를 향한 남자의 시선은 얼굴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했다.
“오기로 이러는 거라면 관두는 게 좋습니다. 결국, 후회하는 건 본인이니까.”
“후회요?”
희원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물론 비웃은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오해한 것 같았다.
희원은 남자를 잡았던 제 손을 놓고는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죄송해요, 그쪽 말을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제 인생에서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어서요.”
그 말을 하곤 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남자의 변화를 희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저 사실은 인형처럼 살아왔거든요. 그거 아세요? 숨 쉬는 것 빼곤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을 정도로 모든 게 후회가 돼요. 차라리 반항이라도 해볼걸…….”
“…….”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겠지만요. 그래서 해보고 싶었어요.”
남자는 희원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의지로 움직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지금 일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처럼 인형처럼 사는 게 더 분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앞으로도 말이에요. 그래서 한 번쯤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 말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더 눈에 띄게 흔들렸다.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말입니까?”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다.
결국 부친을 향한 반항이 모르는 남자와 자는 거라니.
희원은 지금의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황당했을 것이다. 바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잠자리를 목적으로 오는 건 아닐 테니.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냥…… 당신이었으면 했어요. 당신이라서 얘기한 거고요.”
희원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바텐더가 희원과 남자의 자리로 왔다.
“마티니 한잔과 목테일 한잔 부탁하지.”
남자는 바텐더를 향해 말하곤 의자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남자의 행동에 깜짝 놀란 희원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보는 남자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앉죠.”
“…….”
“대신 논알코올 마시도록 해요.”
남자의 말에 희원이 커다란 눈을 껌벅였다.
“지, 진짜요?”
“네.”
갑자기 바뀐 남자의 태도에 희원은 당황스러웠지만 말이 바뀔까 싶어 빠르게 남자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
“…….”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희원을 향해 남자가 말했다.
“이해 갑니다.”
처음 본 남자는 마치 자신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는 듯 감정에 공감해주었다.
누군가 제 마음을 알아봐 준 건 처음이었다. 낯선 감정이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희원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해되세요?”
남자가 가만히 저를 응시했다.
“압니다. 그 기분.”
“…….”
“내 인생인데도 내 뜻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삶,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자신이 한심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희원은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의 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한 건 사실이었다.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공감해주는 남자를 보니 마음이 일렁거렸다.
“잔뜩 상처 입은 주제에, 괜찮은 척 웃지 않아도 됩니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쌓였던 응어리를 툭 하고 건드렸다.
희원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남자는 말 없이 티슈로 눈물을 닦아냈다.
“……죄송해요.”
“진짜로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네.”
희원은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후회할 일 없어요. 제가 후회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