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
4.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오지 않길 바랐던 날이 다가왔다.
“도착했습니다.”
성 사장이 붙여준 기사의 말에 희원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출발했는데 어느새 차는 LS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려 LS 호텔을 올려다보자 마음이 일렁거렸다.
“왜 하필…….”
웃기게도 맞선을 보러 온 곳은 일주일 전 일탈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며 쾌락의 끝을 보여주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가기 싫다.”
남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끌어안던 단단한 품에서는 숲속에 있는 것처럼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 났다.
하룻밤 일탈이라고 잊어야 하는 기억이라 생각했으면서 잊을 수 없었던 남자를 향한 잔상이 희원을 괴롭혔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이름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남자의 이름을 묻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
지잉.
상념을 깨운 건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 진동 소리였다. 화면에 뜬 이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희원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들뜬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뭐 하는 게냐? 기다리게 하지 말고 도착했으면 바로 들어가.]
그새 운전기사의 보고를 받았는지 성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재촉하는 말은 바짝 날이 선 비수처럼 날아와 희원이 심장에 꽂혔다.
그는 딸을 팔아치우면서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오히려 기대감에 차 있었다.
실망하는 것도 지치는데 매번 부친을 향해 원망이 일었다.
희원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희원의 감정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성 사장은 말했다.
[그쪽에서 상견례를 미루면서까지 널 보자고 한 연유가 있을 거다. 잘 보여야 한다. 괜히 밉보이지 말고.]
“…….”
[성희원, 대답 안 해? 말 듣고 있는 거야?]
지난주 주말에 예정되어 있던 상견례가 미뤄졌다. LS 쪽에서 상견례 전에 당사자들끼리의 만남을 먼저 청했기 때문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상견례 후 결혼 전 딱 한 번 이루어질 만남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둘만 보자는 LS그룹 측의 제안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점점 벼랑 끝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무기력한 현실에 마음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네. 듣고 있어요. 걱정하실 일 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하지만 희원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버티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세게 그러쥐며 간신히 대답을 내뱉었다.
이제부터는 더 죽은 듯이 살게요.
마지막까지 내뱉지 못하는 말을 목구멍 뒤로 삼키며 희원이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래. 잘해야 한다. 진성 식품이 이제 그저 만두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게 되는 건 네 손에 달렸다. 책잡히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굴어. 차 상무 신경 거슬리지 말고. 네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 명심 또 명심해라.]
“네…… 먼저 끊을게요.”
성 사장과의 전화를 끊은 희원이 눈을 떴다. 그리곤 천천히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과 같았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올라탄 희원이 12층 버튼을 눌렀다.
‘소문의 망나니’가 기다리고 있다는 레스토랑에 도착한 희원을 반긴 건,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성희원 님. 먼저 도착하셔서 안쪽에 계십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희원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의 구조는 입구로 들어오면 바로 큰 홀이 있었고 큰 홀을 지나면 프라이빗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개인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넓은 홀에 사람 한 명이 없었다.
희원이 흘깃거리자 직원이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상무님께서 전부 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층에는 저를 포함한 직원 3명을 제외하고는 두 분만 있으시니 편하게 얘기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희원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LS그룹의 위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곳입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에 도착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희원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했다.
“열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문을 열자 통창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190센티 큰 키에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와 긴 다리는 마치 모델과 같았다.
“……말도 안 돼.”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희원이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의 얼굴이 매우 익숙했다.
헛것을 보는 것 같아 눈을 여러 번 깜박였지만 보이는 건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일주일 동안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는 남자였다.
“차……강우 씨?”
희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남자가 제 이름을 듣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긴 다리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네, 제가 차강우입니다.”
굵고 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 코끝을 강하게 찔러 들어오는 우디 향.
“…….”
살면서 가장 당황한 순간이었다. 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강우가 희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희원은 하룻밤을 보낸 남자를 맞선 장소에서 만났다는 사실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희원은 손을 뻗어 강우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들었다.
“……성희원이에요.”
마주한 강우의 얼굴에선 그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는 먹잇감을 지켜보듯 전신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강렬한 눈빛, 그의 시선이 닿는 곳곳이 마치 발가벗은 것처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의 눈빛은 일주일 전 함께 보냈던 그날 밤과 같았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일단 앉아요.”
손을 뗀 강우가 말했다.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오가는 말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도 없었다.
희원은 저를 향한 강우의 시선을 피하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맞받아칠 수도 없었다.
이 남자가 차강우였다니.
희원의 머릿속에 이복동생인 유나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차강우 그 남자 불구라며? 그런데 돈이 많아서 여자들이 붙는 거래.]
[게다가 얼굴도 아주 추하대.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어서 화장으로 가리는 거라던데?]
[나는 돈을 몇십억을 줘도 그런 남자랑은 키스도 못 해. 솔직히 돈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런 남자랑 어떻게 살아?]
못생겼다는 말도 불구라는 소문도 사실은 전부 거짓이었던 것이었다.
블랙홀처럼 짙은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올리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은 지나가는 누구라도 홀릴 만큼 완벽했다.
침묵을 먼저 깨트린 건 강우였다.
“우리 구면인 것 같지 않습니까?”
“……저희가 구면인가요?”
희원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사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일단은 모르는 척 잡아뗐지만, 오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희원은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짧은 시간, 그녀의 작은 머리통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제 이름 성희원이에요.]
강우는 제게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에게 이름을 밝혔다.
그러게 이름은 왜 말해서, 희원은 그때의 제 입을 꿰매고 싶은 기분이었다.
설마……?
불현듯 강우가 자신을 이미 알고 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만약 알고 있음에도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건, 어쩌면 제 약점을 잡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강우가 굳이 제 약점을 잡고 싶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재계 서열 1위 LS그룹에 비하면 진성식품은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그러니 호사가들은 이 결혼은 LS그룹이 밑지는 장사라고 떠들었다.
이러다 결혼이 파투 난다면, 비난의 화살은 전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었다.
물론 희원이 이 결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 파투 나는 이유가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결혼엔 진성 식품의 존망이 걸려 있었다. 회사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성 사장은 희원에게 결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주아를 통해 결혼의 목적에 대해 들었다.
머릿속에 주아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얼마 전, 강우의 아내를 고른다는 소문이 들렸잖아? 그 망나니도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고, 승계 때문에 외국에 살던 거 불러들였대.]
[승계?]
[응, 장남이잖아. 그런데 한국 입국한 이후에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았대. 그러니 지독한 소문이 떠돈 거지.]
[아아.]
[그런데 그게 입에 담기도 뭐해. 성유나가 말했던 소문은 빙산의 일각이야.]
강우에 대해 이복동생인 성유나가 했던 말도 상당한 수준이었는데, 그보다 더 심하다니.
희원은 결혼이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니 차강우가 아무리 재계 서열 1위 LS그룹을 잇는 남자라 할지라도, 딸 가진 부모들은 그 망나니의 개차반 같은 인성과 소문을 듣고 제 딸을 보내기를 껄끄러워했지. 게다가……외모에 대한 소문도 상당했으니까, 그런데 네 아버지가 널 보낼 줄은 몰랐어.]
어릴 적부터 희원은 부친이 자신에 대해 결혼 시장에 내놓을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외모와 체중은 물론 교우관계, 그리고 전공까지.
성 사장이 희원을 초등교육과로 보낸 이유도 초등학교 교사가 신붓감으로 선호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희원은 단아한 외모에 예의가 발랐고, 결혼 시장에서 1등 신붓감으로 뽑히게 되었다.
[게다가 너희 아버지랑 LS그룹 차 회장님이 대학 동문이잖아. 어쩌면 두 분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희원은 강우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긴장하지 않은 척 보이고 싶었다.
차라리 술에 취해 그랬다고 하자고,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기에 당신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저는 차강우 씨와 처음인……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