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혼합시다, 우리.
5. 결혼합시다, 우리.
희원은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여유로운 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그녀였다.
“그렇습니까?”
짧은 침묵 후에 강우가 내놓은 대답에 희원은 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자 이미 오래전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손바닥이 보였다.
그 후로도 침묵은 이어졌다.
잠시 후,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희원의 귓가에 들려왔다.
당황한 희원이 고개를 들자 강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수를 둔 걸까. 뻔한 거짓말을 해 그가 화가 난 걸까.
희원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강우가 나가버리면 결말은 뻔했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는 결혼이라 할지라도, 그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사실대로 얘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강…….”
희원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강우가 자신의 쪽으로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성희원 씨.”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희원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조금 전 강우의 숨결이 닿았던 자신의 귀를 감싸 쥐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불현듯 그날 밤, 그가 지금처럼 제 귀를 달아오르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숨결이 닿았던 곳이 홧홧했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강우는 희원의 반응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고 하기엔…….”
말을 하다 만 그가 재킷 주머니 속에서 쪽지 한 장과 돈 30만 원을 꺼냈다.
“이게 익숙하지 않습니까?”
희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꺼낸 건 자신이 남긴 흔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희원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왠지 이대로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네요. 그렇다면 내가 생각나게 해줄 수 있는데.”
“……네?”
“자리가 좀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강우가 천천히 희원의 입가를 문질렀다.
입술을 매만지는 그의 손과 얼굴에 닿은 뜨거운 숨결에 희원은 그날을 떠올렸다.
“우리 꽤 정열적이었던 같은데, 나한테 매달렸던 성희원 씨는 퍽 귀여웠고.”
강우의 말에 희원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그날 밤 우리 꽤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성희원 씨는 아닌가 봅니다.”
이어진 강우의 말에 희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난 아직도 내 밑에서 울던 모습이 성희원 씨 모습이 생각납니다. 취해서 기억나지 않는다면 억지로 떠올리게 해주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진심은 아니시죠?”
“해볼래요, 우리?”
희원은 마주친 강우의 눈빛이 마치 올가미가 되어 제 몸을 옥죄는 것 같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제 입에서 인정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아, 알겠어요.”
희원은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두 손을 뻗어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강우의 입을 막았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제 됐어요?”
강우는 희원의 대답이 퍽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나른하게 올렸다.
그는 너무 얄궂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밀어붙이는 그가 어쩐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희원은 있는 힘껏 강우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것도 좋지만…….”
강우가 제 입을 막고 있는 희원의 손바닥에 키스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읏.”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굳게 다물었던 잇새 사이로 묘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강우가 미소를 짓고는 희원을 손을 내렸다.
“내 취향은 아닙니다.”
강우는 희원을 자리로 앉히고는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더 버티면 뭐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네요.”
강우는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어 마셨다.
희원은 강우를 바라보며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강우가 희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성희원 씨 얼굴을 몰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대로 말하자면 성희원 씨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당신이라는 거 알고 잤고, 이 자리도 성희원 씨라서 마련했고.”
강우의 직설적인 말에 희원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세요.”
희원의 대답에 강우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내가 뭘 원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
“결혼을 물리고 싶다는 그런 말이라도 해주길 바랍니까?”
희원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결혼이었다.
그걸 받아들이고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체념한 지 오래되었다.
차강우가 이 차강우라는 사실을 몰랐던 때는 결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도살장에 끌려오는 것처럼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심지어 그가 결혼 상대였다는 사실에 어이없게도 마음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강우를 만나고 마음속에 조금씩 의지가 생겼다. 상대가 그날 밤의 다정한 남자라면 같이 사는 게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을 일렀다. 아직 강우가 원하는 게 뭔지, 진짜 모습이 뭔지 모르니까.
대답을 요구하는 강우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희원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누가 내 시선 피하는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희원 씨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고개를 든 희원이 마주친 그의 눈동자에는 짙고 무거운 감정이 일렁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성희원 씨는 이 결혼하고 싶습니까?”
강우가 진지한 눈으로 희원에게 물어왔다.
“……차강우 씨는 어떤데요?”
희원은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했다.
강우는 제 부친처럼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게 아니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성희원 씨라면 결혼할 마음이 생기는 것 같군요.”
“…….”
“그래서 성희원 씨도 이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나는 한번 내 손에 들어온 건 놓지 않는 주의니.”
강우의 대답에 희원은 혼란스러웠다.
손을 놓지 않겠다는 강우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혼합시다, 우리.”
“…….”
“도망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망치고 싶었다.
지옥 같은 그 집에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제안 하나 하죠.”
강우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감정 한톨 깃들지 않은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희원 씨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거요?”
“네. 도망치게 해주겠습니다. 그러니 성희원 씨도 나한테 협조해요.”
“협조라뇨?”
“성희원 씨는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습니다.”
거래를 하자는 강우의 말에 희원은 어쩐지 실망감이 먼저 들었다.
강우가 제 의견을 먼저 물어봐 줘 부친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 역시 제게 원하는 게 있었다. 조건 없이 주는 건 없다는 걸 살면서 뼈저리게 깨달았음에도 그가 베푼 짧은 친절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희원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강우는 그런 희원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결혼을 원치 않습니다. 몸으로 들이대는 여자, 내 배경만 보고 달려드는 여자 전부 질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때마침 성희원 씨가 상대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거요?”
“나는 결혼하라는 말을 더 안 들어도 되고, 성희원 씨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딱 삼 년만 버티면 성희원 씨를 더 자유롭게 해주죠.”
“계약…… 결혼이라는 말인가요?”
희원의 말에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성희원 씨는 똑똑한 여자군요. 네. 맞습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의 유효기간은 3년, 3년 후에 이혼하는 조건입니다.”
“…….”
“성희원 씨도 자유가 필요하다면 굳이 결혼에 얽매일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잘 맞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강우는 제품에서 꺼낸 반지 상자를 꺼내 희원의 앞에 내밀었다. 그가 반지를 열자,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짝이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죠?”
“결혼반지입니다. 이 반지를 끼면 성희원 씨가 결혼을 받아들인다고 이해할 겁니다.”
“결……혼 반지요?”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희원은 당황스러웠다.
강우와의 결혼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거절하려면 지금입니다.”
“……원하는 게 단순히 계약 아내인가요?”
“내가 성희원 씨에 바라는 건 내 아내 자리입니다.”
“왜 제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시는 거죠? 제가 아니라도 다른 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희원은 반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기 전 확인하고 싶었다.
왜 하필 자신인지,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그는 LS그룹의 차기 회장이었고 게다가 외모도 뛰어난 그를 마다할 여자가 없을 것 같았다.
누가 봐도 현저히 기우는 결혼을 선택한 이 결혼은 조건이 있는 계약과 같았다.
정략결혼이나 계약 결혼이나 조건을 보고 선택하는 건 당연한 건데, 희원은 마음 어딘가가 허했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강우가 말했다.
“첫 번째로 이 결혼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 걸려 있습니다.”
“……네.”
“그리고 두 번째는 말했듯이, 성희원 씨와 내가 원하는 게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겠네요.”
강우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엔 어쩐지 마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성희원 씨가 결혼을 거절하면 나는 또 다른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건 성희원 씨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강우는 반지 케이스를 닫고는 희원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