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손주 만들어 와라.
2화 : 손주 만들어 와라.
이연은 막무가내인 상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들어 보니 불한당이 아니라 은인 같은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암”
이게 얼마 만인지.
역시 주말엔 알람 없는 기상이 최고였다. 이연은 개운한 마음으로 침대에서 떼기 싫은 몸을 겨우 일으켰다.
“원두를 어디에다가 뒀더라.”
평범한 아파트의 안방 두 배 이상은 되어 보이는 넓은 방을 걸어나온 이연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추출했다.
그래, 이때 아니면 이런 초고급 펜트하우스에 언제 살아 보겠어.
지금 이연이 머무는 곳은 도현이 원래 살고 있던 집이었다. 2층으로 나뉘어진 펜트하우스에는 층마다 작은 마당이 있었고 2층에도 작은 부엌이 자리 잡고 있어서 1층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집의 최대의 장점인 완벽한 공간 분리 덕분에 1층에서 지내는 도현과, 2층에서 지내는 이연은 서로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다.
층 분리가 정확하게 되어 있는 덕분에 사생활 역시 철저하게 보장되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자 따로 출근했다.
두 사람은 정말 결혼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었다.
덕분에 이연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편하게 집을 활보하고 돌아다녔다.
가끔은 도현의 눈치를 너무 안 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 배가.”
생리가 시작된 지 이틀 째라 생리통으로 제일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연은 콕콕 찔러 오는 배를 부여잡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뒤적였다.
구석에 자리한 약을 꺼내 진통제 두 알을 입으로 털어 넣으니 인제야 서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서류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결혼 계약서]
“3년 동안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일했으니 각자 결혼에 대한 가치관은 말해 봤자 입만 아프지. 어른들이 원하는 결혼이란 제도에 묶이는 척하고 우린 자유를 얻는 거, 그게 내가 유 비서랑 원하는 결혼 생활이야, 물론 유 비서한테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
결혼 계약이라니, 계약서까지 끄적였던 걸 다시 생각하니 어이없기도 재미있기도 했다.
이연은 마시던 물을 화장대에 올려놓고 종이를 집어 올렸다.
“서로의 사생활을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서로의 사생활 보호, 가족들 앞에서 최대한 부부처럼 보일 것, 동거에 대한 기본매너는 지킬 것 등등 몇 가지 적혀 있는 조항 중 제일 눈에 띄는 건 두 가지였다.
[서로에게 흑심 품기 금지.]
[계약기간은 2년, 그전에 타당한 이유 제시 시 조기 이혼 가능.]
도현의 제안으로 시작한 거짓 결혼이지만 확실한 건 이 자유로운 생활이 이연도 퍽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자유를 얻기 위해서. 적어도 이연에게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연은 만지작거리던 서류를 다시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어디 가신 거야…….”
오늘은 도현의 본가에 가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인데. 약속이 있다던 도현은 5시가 넘도록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벌써 시할아버지인 갑수의 쩌렁쩌렁한 잔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철컥-.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도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오셨어요?”
“응.”
이연이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와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무미건조한 대답과 함께 이연을 스쳐 지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이연은 도현의 단답형에 하마터면 들어가시라고 꾸벅 고개를 숙일 뻔했다.
이놈의 직업병.
가끔 집에서 마주쳐 도현과 대화할 때면 이연은 야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도현은 밖에서는 편하게 해도 된다고 했으나 그 편안함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었다.
편하게 하라고 했으면서, 정작 도현에게 이연의 이름은 항상 ‘유 비서’였다.
‘같이 살자’고 할 땐 그렇게 앞뒤 없더니 어느새 다시 선을 분명하게 지키고 있었다.
.
.
.
“늦겠는데.”
“회장님께 늦는다고 연락드릴까요?”
“아니, 됐어.”
도현은 편안한 슬랙스와 반팔로 갈아입고, 트렌치 코트를 든 채 서둘러 거실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도현의 뒤를 이연도 서둘러 따라나섰다.
“아악-.”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구두를 서둘러 신다가 균형을 잃은 이연이 본능적으로 도현에게 몸을 던졌다.
“악!”
도현이 그에게로 넘어지는 이연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역시. 잡아 줄 거란 기대도 안 했다. 난 이제 무릎이 깨지겠구나.
이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어? 뭐지.
도현이 바닥으로 직행하려는 이연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덕분에 이연은 옷을 붙잡혀 아등바등하는 우스운 꼴을 하게 되었다.
툭-.
“앗,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이연은 옷을 쥐던 도현의 손이 떨어지자 재빨리 자세를 정리했다.
어쨌든 자신을 방치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이연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껏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왜 그렇게 허둥대. 유 비서답지 않게.”
“늦어서 회장님께 또 한 소리 들을까 봐요.”
이연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한 소리 들어도 내가 들을 거니까. 허둥거리지 마.”
그러니까, 방패막이가 돼 준다는 거지?
듣기에는 까칠해 보여도 해석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참 모르겠다.”
저 남자는.
까칠했다가도, 어쩔 땐 다정함이 묻어나려다 마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서 현관문을 나서는 도현의 어깨가 갑자기 참으로 널찍해 보였다.
*
“6시까지 오라고 하지 않았냐.”
차고에 주차하고 올라오자마자 떨어진 불호령이었다.
베이지 톤 조명이 비치는 쇼파에 앉아 있는 갑수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않고 꾸짖었다. 시선은 오직 신문을 향해 있었다.
“제가 외부 일정이 있어서 늦었어요.”
도현이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기업을 이끌어 가려면 시간 분배를 잘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시간 엄수는 필수야.”
“오느라 힘들었겠다. 주말에 시간 내기도 힘든데, 고생 많았어.”
갑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덕호가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반겼다.
도현의 아버지이자 안갑수 회장의 뒤를 이어 우성그룹 중 우성전자를 이끌고 있는 안덕호 부회장이었다.
덕호는 도현의 팔을 한번 툭 치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을 반기는 덕호의 눈가에 물줄기처럼 뻗어진 잔주름이 웃을 때 인상을 선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서 앉거라. 배고프지? 며늘아가 저번에 갈비찜을 잘 먹길래 이번에도 이모님한테 해 달라고 했어.”
갑수와는 다른 따스함에 이연은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몇 번 뵙지 못한 덕호지만 이연을 진심으로 며느리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모님 갈비찜이 생각났는데…… 감사합니다. 아버님.”
덕호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분이 일찍이 사별을 하셨다니……. 이연은 덕호를 볼 때마다 예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은 도현의 어머니 이야기가 생각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다.
“앉아라, 먹자.”
갑수는 이미 상석에 앉아 있었다. 도현은 이연을 보며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빼내 주었다.
앉으라는 건가?
“고마워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결혼하고서 안 사실인데, 도현도 가끔 덕호의 다정함을 읊을 때가 있었다.
이연의 움직임에 맞춰 의자를 넣어 준 도현도 이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갑수의 손이 움직이자 무거운 공기만 가득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손주 소식은 도대체 언제 들려줄 거냐, 벌써 너희 결혼한 지 4개월이다.”
숟가락 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현이 네가 유 비서 아닌 다른 여자랑은 결혼할 생각 추호도 없다고 멋대로 혼인신고하고 찾아와선 뭐라고 했냐, 할아버지가 원하는 손주 바로 만들어 준다고 했냐, 안 했냐?”
갑수는 이연에 대한 호칭을 아직도 ‘유 비서’라고 하고 있었다.
아직 이연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노력하고 있어요. 밤마다.”
켁-.
이연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도현은 이연의 앞에 있던 물컵을 들어 이연에게 건넸다.
“천천히 먹어.”
아니, ‘밤마다’에 사레들린 거예요.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눈 깜짝 안 하고 진지하게 할 수 있는지, 이연은 도현의 연기력에 새삼 놀랐다.
“더 괴롭히면 이연이가 남아나지 않을걸요.”
씨익 웃는 도현의 얼굴이 사뭇 상큼했다.
이연의 얼굴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사레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흠흠.”
갑수도 도현의 말이 민망스러운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손주 데려오기 전까지 결혼 사실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조심하고.”
“네.”
두 사람도 바라는 바였다. 2년 안으로 정리할 관계에 결혼식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혼인신고부터 한 뒤 갑수에게 결혼을 통보하면 결혼식도 생략할 수 있을 거라던 도현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 실장한테 말해서 보약 하나씩 해 맥여야겠어. 유 비서는 옷도 좀 맞는 걸로 사 입고 피부과도 다니면서 관리 좀 하거라, 숍도 좀 다니고.”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기품도 다 관리에서 나오는 거야. 적당한 관리는 필요한 법.”
대놓고 기품이 없다고 꼬집는 말이었다. 이연은 당혹감에 눈을 어디에다가 두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 어련히 알아서 하겠죠. 며늘아가, 잠깐 줄 게 있으니 이리 와 보거라.”
“네, 아버님.”
덕호가 구세주처럼 이연을 구출해 주었다. 이연이 덕호를 따라 서재로 들어오자, 덕호가 문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닫았다.
“우리 집안 남자들이 좀 까칠하지? 며늘아가가 이해 좀 해 줘.”
“까칠하다니요.”
이연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피는 못 속인다는 게 갑수도 한 까칠 하지만 도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덕호의 반만 닮았어도…….
“집안 사정이긴 하지만 우리가 겪은 상처가 좀 있어, 그래서 그래. 다들 상처를 안고 살다 보니 까칠해질 수밖에 없더라고. 더군다나 아버지는 도현이가 외동아들이다 보니 참견이 많아, 힘든 일 있으면 언제나 시아버지 찬스 쓰고.”
인자한 덕호의 웃음에 이연도 따라 미소가 지어졌다.
***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 나서야 도현의 본가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고생했어, 유 비서.”
“네, 들어…….”
도현은 인사만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같이 집안일을 소화하고 집에 올 때면 이연의 인사를 끝까지 받은 적이 없는 도현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이연은 터덜터덜 지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왔다.
“하, 고단하다.”
갑수와 덕호가 무섭다거나 불편한 건 아니었다. 다만 거짓 결혼이다 보니 무슨 질문을 할지 몰라 긴장이 바짝 되어 기가 다 빨리는 느낌이었다.
이연은 들고 있던 가방을 침대로 휙 던져 버리고는 화장대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주근깨가 거슬리셨나 보네.”
이연이 낮게 실소를 터트렸다.
다행이다. 들키지 않아서.
오늘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다. 원래 모습을,
도현에게조차도.
이연이 손가락을 들어 광대에 잔뜩 밀집해 있는 주근깨를 손으로 쓱쓱 비벼 문질렀다.
이연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마법처럼 주근깨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