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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난이도 하

나쁜, 짓 — novel.naver.com · All chapters

#1화 난이도 하

[너도 HJ 갤러리 차현 관장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잖아. 누구보다 친절하고 매너 있는 분이지만 실수에는 가차 없다는 거.]

그러니까 잘해.

너한테 우리 ‘페르소나’의 1년 치 매출과 위상이 달려 있으니까.

비장한 얼굴로 당부하던 지수를 떠올리며 여은은 HJ 갤러리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녀의 팔에는 지수가 안겨 준 포트폴리오가 한가득이다.

고급스러운 양장 표지의 두툼한 포트폴리오가 모두 여섯 권.

두 팔이 떨어져 나갈 듯 무거웠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여은은 방긋 웃으며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다가갔다.

“차현 관장님 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데스크의 직원이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약속하고 오셨나요?”

“네, 오후 3시에 약속되어 있어요. 이미지 트레이닝 센터 ‘페르소나’ 직원이라고 전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직원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페르소나에서 오셨으면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살짝 낮춰 다소 민망한 말을 속삭인다.

“너무 예쁘셔서 오늘 본사 화보 촬영하는데 오신 모델분인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여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

예쁘다는 말은 그녀에게 있어 칭찬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예쁜 얼굴이 도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방해만 되었지. 아니면 장애가 되었든지.

특히 오늘처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있을 때 예쁘다는 말은 저주에 가깝다.

멋모르고 던진 직원의 말에 어째 불길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그런 그녀의 목에 출입증을 걸어 준 직원이 왼쪽으로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가리켰다.

“관장님은 지금 여기서 한 층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B 스튜디오에 계세요. 스튜디오 옆 코너를 돌면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운 여은은 직원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화장을 짙게 하지 않았다.

피부 결만 살짝 정리하고 장미색 립스틱 정도로 색조를 끝냈다.

깔끔한 인상을 주기 위해 액세서리도 일절 하지 않은 그녀는 대신 안경을 껴서 그 예쁘다는 얼굴을 가렸다.

우아한 러플 장식의 하얀 셔츠블라우스에 감색 슬랙스, 굽이 낮은 펌프스, 그리고 하나로 깔끔하게 묶은 긴 머리.

튀지 않지만 세련되고 단정한 느낌을 주도록 노력한 여은은 심호흡하며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섰다.

“잘하자, 서여은.”

잘해야 한다.

그녀의 어깨에 페르소나의 미래가 걸려 있다.

그뿐일까.

계약이 성사되기만 해도 인센티브로 당장에 목돈이 생긴다.

그러면 적어도 엄마 수술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일이 페르소나뿐만 아니라 그녀 개인에게도 퍽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번 일.

그러니까 페르소나 주요 고객이자 투자자이기도 한 HJ 갤러리 관장 차현의 새로운 의뢰를 뜻한다.

[조카가 있어. 아주 골 때리는 조카가.]

페르소나를 찾아와서 던진 차현의 첫마디였다.

[우리 아버지가 그 녀석을 아주 귀하게 쓸 생각이신데, 이대로는 곤란하거든. 그러니까 물건 좀 만들어 봐요. 온 국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잇남으로.]

그러면서 차현은 트레이너로 여은을 지목했다.

[서여은 씨가 좋겠어. 우리 조카가 얼굴을 좀 따지거든. 그러니 잘해 봐. 성사만 되면 인센티브 두둑하게 챙겨 줄 테니까.]

차현의 조카라니.

한주 그룹 차지섭 회장의 장손이고, 차강 부회장의 아들인 차인우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한주 물산 대표인.

현재 한주에 몸담고 있는 손자는 그 사람이 유일하니까.

그런 이유로 여은은 지난 일주일을 꼬박, 한주 물산 차인우 대표에 대해 알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골 때리는’ 조카라더니, 미디어 속 차인우는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반듯한 외모와 큰 키는 물론이고, 신사적인 태도와 부드러운 미소가 일품인 사람이었지.

조금만 다듬으면 온 국민이 사랑하는 ‘잇남’이 될 소지가 충분한 사람.

그런 이유로 여은은 이번 프로젝트의 난이도를 ‘제법 쉬운’으로 체크했다.

물론 그녀가 트레이너로 받아들여진다는 가정하에 말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으면 안 돼. 일단 차인우 대표님 마음에 들어야…….”

그런 생각으로 막 스튜디오를 지나쳐 약속한 방을 향해 코너를 돌던 참이다.

“아앗.”

무언가에 어깨를 부딪친 여은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이며 넘어갔다.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손에 들고 있던 포트폴리오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알아봤다. 오늘은 일진이 사나울 거라고.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이게 뭔 꼴인지. 그 짧은 순간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부디 이 꼴사나운 모습을 그 누구도 보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걱정처럼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던 손이 본능적으로 손에 닿는 무언가를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사람?’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여은은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다.

새카만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새기듯 비치고 있었다.

“조심 좀 하죠?”

마주친 눈동자가 마치 밤 같기도 하고, 우주 같기도 한…… 남자였다.

하지만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어 가슴 언저리가 서늘하기도 했다.

그런 남자의 눈동자가 슬쩍 아래를 향했다.

“이것도 좀 놓고.”

그제야 제가 남자의 셔츠 깃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여은이 중심을 잡으며 서둘러 손을 놓았다.

구겨진 셔츠 깃을 불쾌한 듯 만지는 남자의 얼굴이 차가웠다.

쯧, 작은 소리로 혀를 찬 듯도 하다.

“버튼이 뜯어졌네.”

혼잣말인 듯 싸늘하게 흘리는 목소리에 여은의 어깨가 절로 좁혀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고가의 셔츠였다.

고쳐 준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새것을 사 준다고 해야 할까.

머뭇거리며 손을 뻗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짧게 쳐냈다.

“됐습니다.”

이어 까만 눈동자로 여은을 핥듯이 훑은 남자는 언짢은 듯 눈썹을 구긴 채 멀어져 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조차 무척이나 오만한 남자였다.

그가 머문 자리에 묵직한 시더우드 향기가 감돌았다.

그제야 숨을 들이켠 여은은 남자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스튜디오 옆 사무실에서 40분가량을 기다렸다.

40분 전,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차현의 말을 전해 주었다.

“스튜디오로 들어오시랍니다.”

심호흡한 여은은 다시 포트폴리오를 들고 차현의 부름에 응했다.

스튜디오 B.

하얀 나무 문 너머에서는 화보 촬영이 한창이었다.

갤러리에서 본사 화보 촬영이 있다고 하더니, 이게 그것인 모양이다.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스튜디오에 카메라 플래시가 하얀빛을 뿜으며 연속적으로 발화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던 여은은 몇 걸음 못 가 움직임을 멈췄다.

쉴 새 없이 셔터음을 터트리는 카메라가 열렬히 담아내고 있는 대상에게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저 남자는…….”

조금 전의 그 남자다.

그녀와 어깨를 부딪쳤고,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 준 그 남자.

깊고 짙은 어둠을 담았지만 블랙 사파이어처럼 고귀한 빛을 간직한 검은 눈을 가진 남자.

“모델이었어?”

모델이었던 모양이다.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려 어딘지 모르게 나른한 느낌을 주는 남자는 카메라 감독의 사인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시선을 내리기도 하고,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기도 하고.

그저 그것뿐인데, 남자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스튜디오를 장악하고 있었다. 오묘한 검은 눈동자가 이 하얀 스튜디오를 온통 검게 물들이는 기분이랄까.

남자가 가진 묘한 위압감에 여은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잘생겼지?”

홀린 듯 남자를 바라보던 여은은 갑작스레 끼친 인기척에 깜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차현이 그녀 곁으로 다가서 있었다.

검은 눈동자를 반들반들 빛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차현은 도무지 50대 후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다.

하얗게 탈색한 쇼트 커트 머리마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만든, 강한 개성의 소유자.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개선하는 ‘페르소나’의 VIP.

그런 차현에게 여은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스튜디오에 들어왔으면 제일 먼저 차현을 찾았어야 했는데, 다른 곳에 넋을 둔 것에 대한 사과였다.

“모델분이 근사해서 저도 모르게 계속 쳐다봤네요.”

“그냥 근사하기만 할까?”

유쾌한 표정을 지은 차현이 입꼬리를 활짝 벌리며 웃었다.

“최고의 얼굴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명에 따라,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차현의 말처럼 최고의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최고의 얼굴인 것 같습니다.”

제 의견에 동의해서일까, 차현의 얼굴에 만족감이 넘치게 흘렀다.

“역시 서여은 씨. 보는 눈이 있네.”

이래서 나는 서여은 씨가 마음에 든다니까?

흡족한 목소리로 슬쩍 띄워 준 차현이 그녀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이리 와요. 우리 조카 소개해 줄게.”

순간 긴장으로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페르소나와 그녀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차현의 조카, 차인우.

그에게 계약 허락을 받아야 페르소나의 VIP이자 투자자인 차현을 만족시킨다.

차현을 만족시켜야 페르소나에 미래가 있고, 페르소나가 살아남아야 그녀가 산다.

마른침을 삼킨 여은은 차현의 손에 이끌려 지난 일주일을 마르고 닳도록 본 남자 앞에 서게 되었다.

“차인우 대표?”

차현의 부름에 화보 촬영을 지켜보던 차인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인우는 화면이 실물을 못 담아내는 듯, 미디어 속 모습보다 훨씬 상품 가치가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사해. 내가 말했지? 이미지 트레이닝 센터 ‘페르소나’의 서여은 씨.”

그러자 차인우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잔잔히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서여은 씨. 차인우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도 퍽 부드럽다. 조금 느린 감이 없지 않지만, 이것도 다듬으면 된다.

까다롭다고 해서 미디어 속 모습과 많이 다를까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차인우는 ‘제법 쉬운’이 아니라 ‘아주 쉬운’ 난이도의 고객이 될 모양이니까.

매너 역시 좋았다.

무거운 포트폴리오를 그녀에게서 앗아 가 적당한 곳에 놓아두는 센스까지 완벽했다.

“이렇게 무거운 걸 여기까지 들고 오다니, 근성도 있고.”

이어진 말에는 ‘예쁜 얼굴’의 불운마저 깨진 듯 느껴졌다.

“난 마음에 드는데요, 고모님?”

당사자 입에서 마음에 든다는 말이 흘러나왔으니, 계약은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정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여은이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감사합니다.”

차현도 흡족한 표정이었다.

기뻐하는 지수와 한시름 놓았다며 눈물짓는 엄마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이 소리 없이 흘렀을 때다.

“네가 마음에 들면 뭐 하니? 도하가 마음에 들어야지.”

차현이 그녀의 어깨너머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